편집실에서

[6호] 김연아책 삼종세트를 보고

- 편집자

 

홍대 앞에서 친구랑 떡볶이 먹다가 김연아 선수 금메달이 확정되는 장면을 봤다. 가슴이 방망이질 해대는 통에 간신히 견뎠다. 연아가 울음을 터뜨릴 땐 뭉클했다. 덩달아 손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난 그녀를 잘 몰랐다. 수십 개의 CF를 찍고 시대의 아이콘이자 희망의 등불로 이름을 날리는 동안, 그런가보다, 예쁘고 장하다고 생각했다. 입때껏 경기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무한도전도 일박이일도 무릎팍도사도 지붕킥도 그런 것처럼, 그저 포털의 메인화면에서 국민적 열풍을 알아차렸을 뿐.

그런데 그날 보니까 정말 잘하더라.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했다. 어느 외신의 보도대로 100M 달리기에서 8초의 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본방사수’로 처음 본 단 한 번의 무대에서 연아의 지나온 삶이 자동재생 됐다. ‘연습기계로 살았겠구나. 꽃다운 나이에 광합성 한번 제대로 못하고 얼음판에서 자기 그림자와 고독한 싸움을 했겠구나.’ 존경스럽고 애처로웠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몇 개의 기사를 열어보았다. 성장과정부터 혹독한 연습, 엄마의 헌신적 뒷바라지까지 김연아라는 영웅의 탄생기를 읽었다. 엄마가 평생 코치였다는 것, 정명훈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영웅 뒤에는 엄마가 있었다고 매스컴에서는 위대한 모성을 칭송했다.

징한 모성이데올로기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연아처럼 너도) ‘하면 된다’의 채찍을 휘두를까 싶으니 씁쓸했다. 사실 우리나라 극성 엄마들의 모성에 순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참에 ‘대한민국 모성’이 단체로 더욱 ‘필’ 받게 생겼으니 심히 염려됐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서점에 갔더니 김연아 자서전 <김연아의 7분 드라마> 어머니 박미희씨 자녀교육 에세이 <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오서 코치가 쓴 <한번의 비상을 위한 천번의 점프> 등 김연아 삼종세트가 특별코너에 나란히 쌓여있었다.

과연 자본주의가 한 명의 영웅을 어떻게 추대하고 소비하는지가 짐작됐다. 김연아 특수를 노리는 기업들은 ‘당신도 할 수 있다’며 열정과 도전을 부채질할 것이다. 모 경제연구소의 김연아 보고서도 나오겠지. 언론에서는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저 멀리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고 유혹할 것이다. 벌써부터 이제 막 꿈을 이룬 연아에게 다음 목표를 묻고 올림픽 2연패의 짐을 지우는 예의 없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조급증 사회답다. 연아의 거액 포상금이 국내 어느 은행으로 갈까를 분석한다. 스무살 국민여동생 김연아를 앞세워 돈, 성과, 속도를 부추긴다.

확실히 착시효과는 있다. 나도 ‘김연아’를 지켜보며 이제라도 애들의 재능을 발굴해 코치로 나서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만날 예쁘다고 원시적으로 물고 빨기만 했지 정한수 한 그릇 떠놓은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쩌면 내 열의와 지도력이 부족해서 아이를 꿈나무로 키우지 못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자식의 매니저로 내 일상을 저당 잡히기 싫은 이기적인 엄마이고, 무엇보다 자식을 벼랑 끝까지 밀어 넣어 정상에 우뚝 세우는 혹독한 고난도의 코칭기술이 없다. 그리고 나는 안다. 여러 상황과 조건이 무르익어 김연아처럼 ‘하면 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되면 한다’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영웅에게 빠져드는 것은 내 안에서 숭고한 특질을 발견하는 것보다 멀리서 남을 추앙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빛 빙판에서 한 마리 백조처럼 날개짓 하는 김연아를 보면서 고단한 일상, 남루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으니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공허하다. 우리는 결코 연아가 될 수 없는 내 아들, 내 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온 국민이 연아에 넋 잃는 사이 MBC에는 친 이명박 인사 김재철 사장이 등극했다. MBC는 민주언론 최후의 보루다. 연아 사랑에 눈멀어 진짜 눈과 귀를 잃게 생겼다. 존재 그 자체로 빛나는 연아에게 시선이 자꾸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우리의 남루한 일상에도 서서히 촛불을 켜야 할 때다.

– 은유

응답 5개

  1. 꿍이말하길

    빛나는 연아에 감탄하면서 혼자 조금 쓸쓸함을 느꼈는데… 글이 내 맘과 같아 시원하네요 ㅎ

  2. Skyjet말하길

    연아에 관심을 주는 만큼, 우리 주위, 그리고 심각한 사안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겠죠.

  3. 박혜숙말하길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영웅에게 빠져들어있는 아이들에게 남루한 일상을 잘 챙겨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부터요…

  4. 박지연말하길

    그러게…애들까지 엄마가 자기한테 헌신(?)해야 된다는 믿음을 가진 이상한 동네…자기가 하다 안되면 그뿐이지만, 안되면 엄마 탓하게 된다면 둘 다 망하지 않을까…? 어쨌든 김연아 선수, 멋졌어요!!

  5. 매이엄마말하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척 공감되는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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