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차별하는 자’라는 입장에서 시작하는 것

- 가게모토 츠요시

0.

 

한국을 떠나게 되었기에 이번 글로 제가 이런저런 지껄이는 것은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많은 반응들이 올 줄 몰라서 놀라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답신을 해보고 싶은데 답신 글을 쓰는 방법을 몰라서 답을 못했던 것들도 많았지만 코멘트는 다 읽었습니다.

 

1.

 

한국을 떠나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요새 일본 사정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특히 원전 사태에 관련해서는 스스로의 신체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책을 몇 권이나마 읽어 보았다.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그런 정보에는 접해 왔긴 했는데, 사실 나의 정보 수집은, 큰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인터넷을 찾아서 접했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체계적으로 정보에 접해 온 게 아니다. 그러한 나에게 적당한 책이 몇 권 나왔다. 각 신문사가 원전 사태 이후 지면에서 특집을 한 기사들을 모아서 만든 책들이다. 이것은 나 같은 체계적인 흐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었다.

특히 볼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계속 연재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함정(プロメテウスの罠)>라는 시리즈이다. 지금도 여전히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며, 단행본도 5권까지 나왔다. 이는 원전 사태의 여러 주변 사정을 신문 기사로서는 길게 정리하면서 보여 주는 특집 기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신문 연재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괜히 문학적이지 않아서 읽기도 쉽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아시히신문의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다)

 

2.

 

유익한 정보들이 많은데, 특히 중요한 것은 원전의 역사성을 파고 들어간 부분이다. 이때 <역사성>이란 단순한 연표적인 정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의 음모라든가 원자력 폭탄과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물론 그러한 면은 제대로 봐야 하며, 관련 서적들도 많이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원전과 차별의 문제이며, 그 차별을 역사성에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시골에 원전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는 단순한 도시/시골의 차별 구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전이 없는 시골도 있기 때문이다. 시골은 도시와 달리 <경제 발전>에서 희생을 강요된 지역이다. 그러한 시골이 스스로 손을 내면서 원전을 요구했다. 이는 돈을 위한 행위라고 정리하면 이해가 쉽겠지만 <발전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다.

원전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지역은 구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시골에 대해서 <성장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든가 말하는 <옳은> 발언을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옳음> 역시 도시에 사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좀 더 따듯하게 살고 싶다는 아주 당연한 요구를 부정할 수 없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지 않는 한, 시골 사람들에게 옳은 말을 얼마나 많이 해도,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까지 느낀다. 지금 도시에서 전기가 부족 없이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포하는 차별을 봐야 한다. 단지 시골에서 눈에 보이는 차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의 차별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을 물어보지 않고서는, 원전의 차별 구조에 맞서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나는 <재생에너지>를 가지고 원전이 발전해 온 전력을 대신하면 된다는 식에 담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기를 부족 없이 쓰면서 산다는 생활의 스타일이 바꾸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눈에 띄는 차별 구조를 해소하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 아니겠지만, 거기에서 사고가 멈추면 안 된다.

 

3.

 

이야기가 탈선했는데, 원전의 차별을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즉 일본에서의 경우 일본의 경제 <발전>의 희생이 된 지역은 계속 희생이 되어 왔다. 도호쿠 지방은 아주 그렇다. 일본의 <발전>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도쿄를 비롯한 도시의 발전이었으며, 도호쿠는 중공업도 없고 <발전>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후 도호쿠는 도쿄의 공장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지역이 되었다. 가난해서 집이 제대로 된 게 아니라서 아침 일어나면 이불 위에 눈이 쌓여 있다고 하는 지역이다(<프로메테우스의 함정>2권, 104쪽). 그러한 지역에서 잘 살기 위해 손을 낸 것이 원전이었다. 이러한 시골의 사고방식을 시골 희생의 수익자인 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원전 반대의 운동이 파고 들어가야 할 점은 이러한 <발전하고 싶다>는 갈망에 있을 것이다. 그 갈망에 도달하는 언어를 가져야 한다. 이 언어는 결코 공식적으로 옳은 담론이 아니다. 옳은 담론보다 더 넓은 생활의 담론에 도달해야 한다.

좀 논의를 확대하면, 농민들의 농약을 쓰게 되면서 노동이 편해졌다는 점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노인의 허리가 90도 가까이 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된 기술 발전의 측면을 왜 단순한 옳은 말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을까. 옳은 말이 과연 운동 현장의 당사자에게 도달하는 언어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원전 같이 차별 구조가 없고서는 성립이 불가능한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도시 주민이라면, 스스로의 생활 그 자체가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피해 지역 주민과 통하는 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4.

 

그러면 원전에 대한 시선 중에서 비판해야 하는 시선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재생에너지론’이다. 이는 원전/도시의 차별 구조를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서 설정된 대답이다. 거기에는 결국 도시의 생활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지금 전기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시선에서의 반원전 담론은 결국 원전적인 차별 구조의 재생산을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전기를 이렇게 부족 없이 쓸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도 부끄러움 없이 뻔뻔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차별하지 않은 위치에서 편하게 있고 싶다는, 그야말로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한 도피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영웅 만들기’다. 아사히신문의 연재에서 눈에 띄게 보인 것은 바로 영웅 서사 만들기이다. 물론 당시 후쿠시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아주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스스로가 방사능에 노출되었으며, 피폭당했다. 그러한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이 과감하게 영웅적 행동을 했다. 그것을 아주 영웅스럽게 서사화하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다. 특히 신문이라는 매체에서 그들의 행동을 서사화할 때 스스로의 희생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온몸을 던져낸 사람들의 행동은 독자로 하여금 눈물을 나오게 만들며,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서사로 정리하는 것이 적당한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특집에서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영웅 만들기’였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만큼 징그러운 사회는 없겠지만, 일본 사회가 영웅을 갖고 싶어 하는 분위기에 있다는 것은, 신문에서 잘 보인다. 신문기자는 서사를 꾸며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독자가 원하는 기사를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영웅의 서사에 빠진 것을 보니까, 나는 힘이 빠지기만 했다. 그러나 힘 빠진 상황에서도 말을 꺼내야 할 것이다.

 

5.

 

물론 그 당시 현장에서 판단을 내렸던 사람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방관자에 불과했던 나와 달리 정말 어려운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영웅’이라고 말해야 할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면 일수록 그러한 ‘영웅 만들기’의 서사에는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전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차별 구조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힘든 상황을 견디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의 실천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눈물을 흘려도 차별 구조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은 ‘외부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영웅의 서사에서 빠진 차별 구조의 실제를 하나씩 짚어 가면서 논의할 작업이다. 아주 극단하게 말한다면, 원전 폭발 사태 속에서 순간적 판단을 내리면서 주민을 지키려고 했던 지도자들의 서사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건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원전 반대 운동의 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웅의 서사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패배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반원전 운동은 물론 원전 신설을 백지화시킨 사례들이 많으며, 그러한 의미에서는 승리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번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태는 반원전 운동이 해 온 아주 소중한 작업들의 패배로 봐야 할 것이며, 그 패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6.

 

원전을 멈출 수 없었던 일본 사회는 이제야 세계적으로 방사능을 유출시키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방사능의 유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일본 사회에서 평균수명이 짧아질 것이며, 병의 발생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음에도 원전이 가지는 차별 구조, 구체적으로는 도호코 지방에 대한 차별을 문제화하지 않고서는 반원전 운동은 원전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7.

 

아주 논의가 우왕좌왕해버렸다. 정리를 해야 한다.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것보다, 말해 온 것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1) 나는 일본으로 가니까 방사능에 관한 지식을 자져야 하며, 책을 몇 권 봤다. (2) 신문 기사를 모아 놓은 책이 있어서 유익하다. (3) 그러나 역사성에 파고 들어간 기사는 거의 없고, 영웅 만들기의 서사가 많아서 실망스럽다. (4) 원전에 관한 차별 구조에 맞서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생활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스스로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원전을 없애려 하는 것은 결코 원전 차별에 맞서는 힘이 될 수 없다. (5) 원전을 없애기 위해서는 옳은 말을 발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전 지역에 원전을 갖고 싶다는 의지를 만들어낸 차별 구조에 파고 들어가기 위해, 옳지 않는 말에서도 배워야 한다. (6) 동시에 원전 사태에서의 영웅들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계속 반대 운동을 해 온 사람들의 실천에서 배워야 한다.

 

* 필진 카게모토 츠요시의 칼럼은 이번 원고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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