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끝나지 않은 싸움

밀양에서 공동체를 고민하다

- 장희국

 

내 기억 속의 시골은 떠들썩하고 이웃집이 도시의 가족보다 서로를 잘 알고 그러다 보니 싸움도 많고 왕래도 많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 시골은 젊은이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서 나이 드신 분들이 고립된, 그분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향수 속에서 외부 “문명”의 변화와는 점점 멀어지며 그렇게 다가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곳에 갑작스럽게 “문명”의 욕심이 침입해 들어왔다. 시골의 공동체적 문화에 매우 이질적인 “문명”이 침입하기 시작한 순간 기존의 문화는 박살나게 되었다. 아니 박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접속은 새로운(+로의)차이를 생성한다’는 이진경의 말처럼 그들의 공동체는 “문명”과 만나 변화하고 있었다.

분 단위, 초 단위의 시간 계산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자발적인 노동이라는 점에서 시골의 작업은 본디 시간개념이 느긋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실시간으로 연락하는 습관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할 필요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송전탑을 세우려는 “문명”의 시간은 분, 초 단위로 움직이고, 이들을 저지하려는 밀양의 시간도 변화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그렇게 능숙하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골 마을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단체 카톡방을 애용하며, 폰으로 영상과 사진을 찍고, 공유한다. 실시간으로 오가는 정보를 통해 “문명”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한다. 사실 그것은 기존의 공동체에서는 필요 없던 문화라는 점에서 ‘이미’ “문명”의 침입을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문명”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침입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나의 두 가지 선입관에 대한 수정을 검토해 보려 한다. 우선 공동체적인 것은 전통적 혹은 과거의 모습으로의 회귀적인 성격이 있다는 선입관이다. “문명”의 이기를 포기함으로써 공동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공동체의 표상은 자본주의 이전의 과거의 모습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에 쉽게 자본주의 이후의 “문명”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달성되리라 생각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이데아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은 “문명”이 침입한 자리에는 공동체가 와해된다는 선입관이다.

밀양에서의 인상적인 기억 중 주유소 사건이 있는데, 본디 한마을 주민이던 주유소 사장은 송전탑 건립을 위해 기름을 그들에게 판다. 이 광경이 도곡리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경찰과 대치하는 장소에서 목격되었고, 같은 마을 주민이라고 그분에게 기름을 사서 사용하던 마을 주민분들을 배신감을 토로하였다. 이 장면은 분명히 공동체의 와해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공동체의 공론장에서 공통감각을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성토였다. 그것이 오히려 공동체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다 모여 웃고 행복하게만 사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 ‘공통의 감각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라 할 때, 그곳이 행복과 웃음만으로 가득 찰 수는 없다. 오히려 다른 감각을 찾고 구분하고 부딪히며, 그것을 넘어서는 공통감각을 향해 가는 동사적 과정이 공동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의 등장은 서로 공통감각을 가지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맞추자고 성토하는 공동체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밀양은 공통감각의 공유로의 공동체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건의 자리이다.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밀양의 아픔을 공유하러 오는 사람에게는 마을 주민처럼 환대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적 제약보다 감각의 공유가 공동체 혹은 연대의 우선 조건임을 보여 준다. 밀양은 그렇게 기억 속의 공동체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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