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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와 이타를 넘어 (4) <이기적 유전자>

- 박성관

『이기적 유전자』. 탁월하게 좋은 책이고, 탁월하게 나쁜 책이다.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든 탁월한 책이다. 그 내용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세 가지에 대해 말해보겠다.

 

1. 인내심 강한 수컷: 확률론의 공과(功過)

 

책에는 수학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도킨스가 설명하는 이론의 핵심에는 확률 이론, 특히 게임이론이 있다. 나는 『춤추는 술고래의 수학 이야기』와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를 통해 확률의 세계를 조금 엿본 적이 있다. 저자들의 말대로 놀라운 내용들도 눈에 띄었는데, 의구심도 적지 않게 들었다. 모델을 구성해서 확률을 추정하고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그 추정치를 평가한다고 할 때, 자의성을 배제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이 ‘이기적 유전자론’(혹은 ‘혈연 선택론’, ‘포괄 적합도 이론’ 등)은 말뿐이지 현장 연구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현장 연구를 안 할리야 있겠는가! 1976년에 나온 『이기적 유전자』에만도 현장 연구가 심심치 않게 이기적 유전자론을 지지하는 근거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아마도 현장 연구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다양한 모델을 구성하고 이런저런 결과(주로 확률 추정치)를 예측한 다음 그중 관측에 가장 가까운 게 옳은 모델이라 판정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모델 구성에서부터 확률 추정, 관찰이나 실험 방법 등이 자의적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역으로 말하자면 확률 이론은 그 모든 단계에서 자의성을 배제할 메커니즘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9장 「암 · 수의 전쟁」을 보면 성실형 수컷과 바람둥이형 수컷 중 성실형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암컷과 수컷의 성적 특성상 교미 후 수컷은 암컷을 버리고 떠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되면 암컷은 자식을 버릴지 말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자식을 버리는 건 난자에 투자한 비용이 크기 때문에(정자에 비해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p. 259)) 손해다. 그래서 암컷은 대개 양육을 하기로 선택한다.1) 물론 버리고 떠난 수컷에 비하면 이익의 크기가 현저히 적다. 이런 상황에서 암컷은 짝짓기 상대로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p. 259)을 선호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가정형 수컷, 성실형 수컷을 어떻게 알아볼까? 혹은 어떤 과정을 통해 좀 더 그런 수컷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의 방법은 오랫동안 접촉을 거부하고 수줍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동의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수컷은 성실한 남편이 될 가망이 없다.”(p. 259) 한마디로 인내심이 강한 수컷을 고른다는 것이다.

“장래의 짝에게 둥지 짓기를 요구하는 것은 수컷을 붙잡아 두기 위한 암컷의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수컷에게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같은 효과를 발휘할지 모른다…… 개체군 내 모든 암컷이 수컷과의 교미에 동의하기에 앞서, 예를 들어 용을 죽이라든가 산에 오르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렵고 대가 높은 행위를 요구한다면, 수컷이 교미 후에 암컷을 버리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짝을 버리고 다른 암컷을 찾아 유전자를 더 퍼뜨리려는 수컷은 누구라도 용을 또 한 마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단념할 것이다.”(p. 265)

 

어떤가, 당신은 지금 도킨스의 말이 이해가 되는가! 함 직접 생각해 보시라.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암컷을 오래도록 유혹하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둥지 짓는 데에도 협력한 수컷이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시라. 한마디로 번식에 열렬한 수컷이다. 그런 수컷은 교미에 성공한 후 어떤 행동을 보일까? 도킨스는 그 수컷이 인내심 있게 이후 또 교미할 때까지 기다릴 거라 예상한다. 정말 그럴까? 그게 합리적인 예상인가? 내가 보기에는 정반대의 행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물 종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정반대 쪽이 더 가능성이 크다. 교미에 성공해서 내 정자를 받은 자식은 이미 만들어 놓았다. 굳이 이 암컷에게 오래 머물 필요가 있을까? 양육이 얼추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쪽은 쉬운 선택이기는 하지만 내 번식도를 생각하면 너무 수익이 적다. 다른 암컷을 만나 또 유혹하고 둥지도 지어 주어야 한다는 게 힘은 들겠지만 이 수컷이 누구인가, 인내심이 강하다고 가정했던 그 수컷이 아닌가! 사주에 참을 인(忍)자가 세 개나 들어 있는 수컷인데 용을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산을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닌, 둥지 짓기 정도의 소소한 요구를 이행할 정도의 인내심이 없겠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걸 글로 쓰려니 무쟈게 귀찮다. 관심 있는 분은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란다. 혹시 나와 견해가 다른 분들은 얼마든지 알려 주시라. 용을 죽이라거나 산을 오르라고는 안하겠다.2)

 

2. 성립 불가능한 이론

 

방금 나는 이기적 유전자론의 자의성에 대해 들춰 보았다. 그런데 책을 더 읽어 가면서 보니 더 황당한 문제가 발견되었다. 사실 이론의 자의성이야 어떤 이론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황당한 문제는 이기적 유전자론이 아예 성립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이론이 현실하고 얼마나 잘 맞는지 이전에, 이론 구성 자체가 불가능한 이론이라 여겨졌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착각이나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이 읽고 판단해 주시기 바란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외양과 달리 그런 행동은 사실 개별 유전자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곤충의 경우 자신의 번식을 포기하고 자기 동생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는데, 그것도 근연도(近緣度)를 계산해 보면 유전자의 합리적 선택으로 판명난다고 그는 말한다. 근연도 자체는 아주 쉬운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서 “두 사람의 혈연자가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근연도이다. 예컨대 “당신이 유전자 G의 사본 1개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것은 틀림없이 당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 어느 한 편에서 받았을 것이다.” 또 “두 사람이 형제 간인 경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절반을 그 형제도 갖고 있을 것이므로 그 근연도는 1/2이다. 이것은 평균적 수치다. 즉, 감수분열이라는 제비뽑기에서 얼마나 행운이 따르느냐에 따라 어떤 형제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유전자는 이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근연도는 언제나 반드시 1/2이다.”3) 이상의 이야기는 특별히 돌연변이가 발생한 게 아니라면 모두 당연한 얘기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전혀 당연하지 않다.

 

예전에도 이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해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형제 간의 근연도가 어째서 1/2이란 말인가? 아빠로부터 반, 엄마로부터 반을 받는데, 그럼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형제 간의 근연도는 99% 이상일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도 당근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저명한 인류학자는 1978년에 『사회 생물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만약 우리가 혈연선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모든 인류는 서로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이라 예측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99% 이상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으니까”라고 주장하였다.”(p. 457)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사실 내 의구심은 더 심했다. 내 생각에 아빠와 나의 근연도는 1/2이 맞다. 엄마와도 그렇다. 내게는 아빠 유전자 중 50%밖에 없으니 말이다. 엄마 유전자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내 형제와 자매는 크게 다르다. 99% 이상 동일하다. 그러니 근연도는 99/100이다(이 얘기는 침팬지 등 수많은 동물들에게도 곧장 적용 가능하다). 그러니 만약 혈연선택이 옳다면 동기 간에는 목숨마저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 형제자매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더 심각한 건 아빠도, 엄마도 나와는 근연도가 1/2밖에 안 되니 부모는 나를 보살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아마 여기에 이런 의문을 제기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근연도가 1/2인데 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가? 조금 있다가 자세히 말하겠지만, 유전적으로 1/2을 공유한다는 것은 나머지 1/2은 다른 걸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아빠와 동일한 유전자를 반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일하지 않은 유전자, 즉 대립 유전자(allele)를 반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유전자가 대립 유전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도킨스의 관점에서는 유전자 자신과 다른 유전자는 적일 뿐이다. 이익과 손해에 따라 관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적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날 도와주는 행위는, 엄마 자신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입장에서 유리한 면 50%와 불리한 면 50%를 갖는 셈이다. 그러니 본전치기인 행위를 애써 할 필요가 없다. 그 행위에 엄마 자신의 시간과 자원이 소비될 테니 말이다. 이런 부모가 있을까? 뭐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보편적인 상황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다.

 

물론 생물학자들이 이를 생각지 않았을리는 없다. 나도 형제 간이나 부모 자식 간 근연도를 똑같이 1/2로 설정하는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1976년)에서는 이 점에 관한 언급이 없다. 1989년에 나온 2판에서는 책 뒤의 보주(補注)에 이렇게 답해 놓았다.

 

“형제 간의 근연도가 1/2……이라는 것은, 형제가 공유하고 있는 1/2은 모든 개체가 공유하는 90%를 빼고 난 나머지 유전자의 1/2을 말한다.”(p. 456)

 

나는 근연도를 왜 이렇게 계산해야 하는지, 그 방식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찾지 못했다. 뭔가 정당화는 했을 거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하니 일단 그렇게 규정했다고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엄마와 자식은 근연도가 1/2이고 형제 간에도 근연도가 1/2이라고 하자. 그 다음에는 지난번에도 나왔던 익사 상황을 또 떠올려 보자. 만일 자식이 물에 빠져 죽어 가려고 할 경우, 부모는 자식을 도와야 할까? 이기적 유전자론의 이론가들은 부모 자식 간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구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유전자의 이익 관점에서 이득이 되어야만 돕는다는 것이다. 자식이 10명이고 아빠가 구하다가 죽을 확률이 1/10이라고 해 보자.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예컨대 5회째 시도에서 아빠가 죽는다고 해보자. 그럼 죽기 전까지 4명의 자식을 구한 셈이다. 그럼 아빠의 득점은 1/2 X 4니까 2점이다. 반면 구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전혀 득점을 올리지 못한다. 이런 계산을 무의식중에 하고 개체는 둘 중 득점이 더 높은 쪽을 선택하도록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식을 구하려고 본능적으로 달려든다. 대충 이런 게 혈연 선택론(이기적 유전자론)이다. 물론 아버지니까, 어머니니까 당연히 자식을 구할 거라고 덥썩 믿어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 이유를 학문적으로 탐구해 본 그들의 태도는 일면 가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식의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 든다면 그거야 어쩌겠는가! 문제는 그런 계산이 허당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따르면 아빠가 첫 번째 아이를 구했을 때의 득점은 1/2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빠는 자신의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50% 갖고 있는 자식을 구했다는 점에서 1/2 득점을 했지만, 자기 유전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만일 이 집안이 오래도록 근친상간을 한 게 아니라면) 유전자를 구했기 때문에 마이너스 1/2점을 맞은 꼴이다. 그럼 결국 빵점이다. 대체 아빠가 왜, 엄마가 왜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개체 간의 생존경쟁이 아니라 유전자 간의 번식 경쟁(혹은 복제 경쟁)이 본질이라고 본 그들의 주장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유전자 간의 번식 경쟁이란 관점을 취하면서 그들이 개체 간 생존경쟁에서 강조되었던 진화론의 핵심을 간과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간단한 예 하나 들어 보자. 아빠의 염색체에 들어 있는 유전자 중, 갈색 눈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는 어떤 유전자의 관점에 서 보자. 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 유전자를 갖고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파란색 눈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근연도를 1/2이라 했을 때 그렇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검은 눈동자나 또 다른 눈동자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복잡하니 빼도록 하자). 그럴 경우 아빠가 나를 구하는 것은, 아빠의 갈색 눈 관련 유전자의 입장에서 이익 1/2, 손해 1/2이다. 손해 1/2은 아빠의 행동이 동시에 대립 유전자를 구하는 것일 확률이 1/2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식을 아무리 많이 구해도 이득은 전혀 없다. 발생하는 것이라고는 이익일 확률 1/2과 손해일 확률 1/2인 자식들과 소비된 아빠의 시간 및 자원뿐이다.

 

요컨대 아빠의 특정 유전자 입장에서는 자식을 구하거나 돌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건 손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자신이 늙어 죽을 터이고 그럼 그 유전자 입장에서 더 큰 손해가 아닌가? 그러니까 자식을 구하거나 돌보아야 할까? 그것도 손해는 손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나? 참고로 내 결론은, 이기적 유전자론은 이론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는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혹은 이기적 유전자론이 맞다면 유성생식은 지구 상에 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얘기였으니 생각 좀 해 보시고 내게 의견을 주시거나 조언 주시기 바란다.

 

세 가지 중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는데, 이건 특히 도킨스 스스로 “내가 일생 동안 학자로서 성취했던 그 어떤 것보다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라고 자부하는 『확장된 표현형』의 주요 내용과 관련된다. 내가 볼 때도 매우 중요한 연구이며 크게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다윈 진화론의 기본 정신에서 볼 때도 부합한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 내용은 다음 주에 써보겠다.

 

 

1) “짝에게 버림받았을 때 암컷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으나 이들은 모두 불리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잘해 보려는 몸부림일 뿐이다.”(p. 258). 하나 궁금한 것은, 이런 견해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견해를 보였을까 하는 것이다.

2) 이 사례 말고도 모델 운용 과정에서 너무 자의적인 경우가 책에는 적잖이 나온다.

3) 쉽게 생각해 보면 나와 삼촌은 근연도가 1/4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1/8 관계도 있고 1/16이나 1/32 등 근연도가 다양하게 다를 수 있다. 친족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근연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예컨대 8촌끼리는 근연도가 1/128이다. 이런 수치들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론이 바로 혈연선택 이론(혹은 이기적 유전자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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