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고통과 새로운 삶

- 숨(수유너머R)

“유령이란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조각이자 파편, 그것의 시작이다. 건강한 인간은 물론 그런 것을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인간은 무엇보다 지상적인 인간이고, 고로 충만함과 질서를 위해서 이곳의 삶 하나만을 살아야 하니까. 뭐, 하지만 조금이라도 병이 나면, 그래서 유기체 속의 정상적이고 지상적인 질서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당장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아프면 아플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도 더 잦아지며 그리하여 인간이 완전히 죽게 될 때 곧장 다른 세계로 옮겨갈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죄와 벌』중

 

한 때 <주군의 태양>이라는 드라마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매우 단순한 반면 두 주인공의 역설적인 캐릭터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 태공실은 산에서 조난을 당해 구조된 후 3년 간 의식 없이 지내다가 깨어났는데 그때부터 귀신을 보기 시작합니다. 사회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하기 때문에 좋은 학벌에 미모도 소용 없습니다. 반면 남주인공 주군은 잘 나가는 재벌2세, 무분별한 개발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며 사람들의 마음 따위 고려치 않는 냉혹한입니다. 그러니 귀신 따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으로도 그는 충분하니까요. 이야기는 태공실이 주군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태공실의 몸이 주군에 닿으면 눈에 보이던 귀신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거든요. 귀신 때문에 마음 놓고 잠 한번 잘 수 없던 태공실은 주군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습니다. 그녀에게 주군은 생존을 위한 조건입니다.

태공실이 주군이라는 ‘방공호’(드라마 속에서 태공실이 주군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에 영원히 안착한다면 재미가 없겠지요. 오히려 드라마의 회차가 거듭할수록 주군이 태공실의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귀신의 세계로요. 태공실에게 찾아오는 귀신들은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는 영혼들입니다. 한을 풀지 못해 세상을 떠도는 것이지요. 주군은 처음 들어보는 억울한 존재들의 세계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 동안은 들을 귀를 닫아놓고 편히 살았는데 태공실을 통해 알게 된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귀찮기도 합니다. 하지만 점점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게 되고 죽다 살아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잠시 귀신이 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귀신, 유령, 혼령, 원혼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져왔습니다. <주군의 태양>에 나오는 귀신들처럼, 대부분의 원혼은 억울하게 죽어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귀신을 만든 이들, 즉 누군가를 억울하게 죽게 한 이들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지만 귀신은 빛을 피해 어두운 밤에나 모습을 드러내야하지요. 이 세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야기는 그래서 귀신을 만들어냅니다. 귀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소리치는 환타지 속 세상에서야 겨우 사필귀정이 이루어집니다.

귀신 이야기에서 또 다른 핵심은 바로 귀신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주로 특정 인물에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말을 겁니다. 누군가 홀로 있는 시간과 장소를 택해서요. 자정, 화장실, 공동묘지, 어두운 산길은 모두 그런 배경이겠지요. <장화홍련전>에서처럼 말발이 먹히는 권력자에게 호소하는 똑똑한 귀신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님들이 장화와 홍련 두 자매귀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놀라 죽어 나가는 통에 배짱 두둑한 원님을 찾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했지요. 이 세상의 불의를 확인하고 누군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끔찍합니다. 그 고통을 믿지 않거나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어도 소용없구요. 보통의 경우 귀신을 본 사람들은 진짜 미쳐버리거나 사람들이 그를 믿어주지 않고 미친 인간 취급을 합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믿어주지 않는 진실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러니 귀신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미친 것인지 이 세상이 미친 것인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함을 지닌 존재가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것 자체로 그는 이미 이 세계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됩니다.

 

환타지를 현실로 옮겨오면 우리 사회는 아마 귀신으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굳이 <주군의 태양> 태공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네모난 모니터를 통해 누군가의 억울함을, 고통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합니다. 광화문 지하역사에, 대한문 앞에, 밀양 송전탑 아래에, 부천 농성장에, 그외 수많은 곳에서 진실을 외치는 분들은 우리 사회의 억울함과 고통을 대신보고 겪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을 가장 먼저 감지하기 때문에 유령(억울함, 고통)을 보는 거지요. 하지만 유령, 귀신, 억울함, 고통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세계로 이행하게 되는 걸까요?

3일 전, 쌍용차 해고노동자 153명이 서울고법에 낸 해고무효확인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 이제야 그들의 진실에,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에 답하는 이 사회가 밉기도 합니다. 하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찰의 군홧발과 여론의 무관심, 정치권의 거짓말을 견디며 그 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동료들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해고노동자들이 어떻게 진실을 계속 외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심이 더 큽니다.

아마도 그 진실이 삶을 위한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해고노동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외쳤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투쟁했습니다. 천막농성을 하고, 분향소를 만들고,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고, 김밥을 말았습니다. 일터로 돌아가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노력은 고통을 견디며 삶을 실현하는 과정과 함께였습니다.

삶을 꾸려가는 힘은 고통에 굴복하고 포기하는 대신 고통을 드러내고 계속 진실을 외칠 수 있게 합니다. 아마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은 거기에 있을 겁니다. 소설『죄와 벌』마지막 구절처럼요.

 “그는 오직 느낄 따름이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하지만 여기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이자 점차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점차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 여태껏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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