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에이지의 사상

소년과 함께 성인되기 -구스 반 산트 론

- 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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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식 영화만들기를 시작해보자. 우선 두 명의 소년이 필요하다. 그들은 어디론가 걷고 있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오직 걸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길 걷기는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은 것이다. 약간은 범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을 사랑한다. 우정 이상의 애정관계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고민으로 털어놓지 못한 사랑은 비밀로만 남는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 한 소년은 그 길을 다시 혼자 걷는다. 배경에는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가 흐른다. 짝사랑, 길, 비밀, 죽음은 구스 반 산트의 주요한 키워드이다.

이러한 구조는 그의 초기작부터 계속 이어져 오는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말라노체』(1985)의 ‘월트’와 ‘죠니’의 관계가 그랬고, 『아이다호』(1991) 의 ‘마이크’와 ‘스콧’, 『게리』(2002)의 ‘게리’와 또 다른 ‘게리’의 관계가 그랬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원형이 변주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파라노이드 파크』(2007)에서 ‘알렉스’는 걷는 것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타길 좋아하며, 비록 의식적 차원이지만 그 스스로를 죽여버린다. 거의 드물게 이성애를 그린 작품 『레스트리스』(2011)에서도 ‘에녹’과 ‘애나벨’의 사랑의 여정은 ‘에녹’이 뇌종양으로 숨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사랑의 표시는 ‘길 위’에 그려진다.

구스 반 산트의 주된 관심은 십대 소년들(가끔씩 소녀들)의 성장통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를 둘 것이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성장통의 드라마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오는 철없는 아이들의 백일몽 같은 모험담이 아니라는 것. 혹은 소년의 세계에 머무르려고 하는 중2병적인 유치함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그의 영화가 로드무비처럼 보이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로드무비가 아닌 이유에 대해 말해보면서 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다호』의 마이크는 자신을 “길의 감식자”라고 말한다. 그가 길을 걷는 이유는 그저 길을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마이크는 자신이 “평생 길을 맛볼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지가 아니다. 그에게 길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 이 점에서는 로드무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통상 로드무비의 공식은 주인공들의 여정의 궤적이 주인공의 성장의 궤적이 되는 데에 있다. 그들은 여정을 통해 이런 저런 사연과 인물들과 접하게 되고, 극의 마지막에는 뭔가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길엔 목적지가 없다. 어딘가에 다다르기보다는 그저 여정을 지속시키기 위해 펼쳐지는 장이다. 목적지 없는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로드무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의 주인공들에겐 여정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들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마을에 머무르지도 않고 여정 중에 만난 낯선 이들과 대화하지도 않는다. 극단적으로 그들은 ‘길’중독자들이다. 침묵하며 걷기. 이는 절대로 길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이 같은 광기어린 길 중독은 『게리』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게리’라는 이름의 두 청년이 있고, 그들은 사막을 걷는다. 단지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기 위해. 방향을 잃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걷는다. 한 명의 ‘게리’가 고통에 몸부리치는 또 다른 ‘게리’를 죽인다. (그것은 자살에 가깝다.) 이윽고 게리는 큰 길을 찾게 되며, 남겨진 ‘게리’에 대해 생각한다. 관객들은 이들의 걷기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맹목적으로 보이는 이 걷기는 여정도 없이 아무런 지표도 없는 사막, 가도 가도 똑같은 풍경인 사막 속에서 벌어진다. 숨이 막힌다. 시지프스의 천형에 비견될만한 형벌이다. 이러한 폐색적인 이미지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다룬 『라스트 데이즈』(2005)에도 드러난다. 그러니까 길을 걷는 행위는 방에 갇혀 기타를 치는 행위(『라스트 데이즈』), 끝없이 넘어지면서 혼자만의 스케이트 기술을 연마하는 행위(『파라노이드 파크』)와 같은 것이다. 하여 구스 반 산트의 영화의 문제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이 길에 중독되어 길 밖으로 좀체 나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점에서 다소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의 영화는 성장이 불가능한 로드무비라는 것이다.

다시 앞선 주제로 돌아와, 그렇다면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중2병적인 유치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성장을 거부하고 자기 안으로 함몰해 들어간 이들이 도피자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이 결국 죽음을 직시하고 맞이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때의 죽음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파라노이드 파크』의 주인공 ‘알렉스’는 우연한 사고로, 자신이 죽게 만든 경비원의 몸이 두 동강 나는 광경을 얼어붙은 채 바라본다. 경비원은 내장이 끊어진 채 ‘알렉스’를 향해 기어오고 있다. 코를 찌르는 내장냄새, 살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 폭력이 낳은 희열과 공포가 ‘알렉스’를 압도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알렉스’는 부모의 이혼, 그 자신의 방황으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낭만적 죽음을 버리고 실재적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게리’가 또 다른 ‘게리’를 죽일 때의 눈빛은 세상에 없는 슬픈 눈빛이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어른의 세계로 돌입했다는 것일까? ‘성장이 불가능한 로드무비’라는 평가와 ‘소년의 죽음을 직시하는 틴에이지물’이라는 평가는 왠지 상반되어 보이지 않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아이다호』에 드러난 두 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이크와 스콧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각각 두 명의 장례를 치른다. 하나는 마이크와 스콧이 그토록 따르던 부랑자들의 왕 ‘밥 피전’과 스콧의 부유하고 명망있는 실제적인 아버지 ‘잭 페이버’이다. 『아이다호』가 세익스피어의 희곡 『헨리4세』의 모티브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진 일이다. 주된 줄거리는 방탕을 일삼던 헨리 5세가 반란군이 득세하자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그들을 진압하는 이야기이다. 이 때 헨리 5세의 한 때 방탕함을 부추겼던 인물이 ‘폴 스타프’이다. 그는 『아이다호』에서 ‘밥 피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헨리 5세가 자신의 왕국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폴 스타프’를 보병대장으로 임명해 싸우게 된다.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 전, ‘폴 스타프’는 철없는 이들의 상징이다. 이 철없는 이를 죽이고(상징적으로) 철든 이들의 세계로 헨리 5세가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아이디호』는 이러한 모티브를 미묘하게 비틀어버린다. 스콧은 자신의 아버지 장례를 마친 뒤 명망가의 자손으로 주류사회에 편입되어버리지만 마이크는 밥 피전의 장례를 마친 뒤에도 여전히 길을 따라 걷는다. 이러한 해석의 요점은 철든 헨리 5세에게도 사실 분열이 있다는 것이다. 철없는 자로서의 헨리 5세 즉 마이크는 전혀 스콧처럼 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구스 반 산트는 성인이 되는 소년이 겪는 죽음은 사실 두 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첫째, 소년의 죽음이고, 둘째, 아버지의 죽음이다. 소년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동시에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이다호』의 기괴한 장례식 장면, 밥 피전의 왁짜지껄한 장례식과 잭 페이버의 엄숙하고 근엄한 장례가 동시에 열리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한 소년, 부랑자들의 왕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길을 걷는 마이크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구스 반 산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성공적인 성장서사란 없다. 우리는 성장해서 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소년을 죽이고, 또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 그 자리에 앉은 것뿐이다. 하지만 그 소년은 죽지 않고 거리를 배회한다.

성인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소년 소녀들을 죽였다는 자책감, 죄의식 속에 산다. 어른의 세계에 와서도 마음 한 켠에 묻어나는 허전함의 이유다. 『파라노이드 파크』의 ‘매시’는 경비원의 죽음으로 죄의식에 빠진 ‘알렉스’에게 (그가 저지른 살인은 보다 은유적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를 묻힌 어른의 세계다. 이것이 ‘알렉스’의 살인과 그와 여자 친구의 첫경험이 오버랩 되는 이유이다.) 말 못할 고민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권한다. 그 날 ‘알렉스’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써 불태워 보낸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의식 인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의 응어리를 쉬 털어버리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답답했던 것이고 스스로를 잠시 위로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구스 반 산트의 주인공들도 결국 성인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년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소년과 함께 성인되기. 이것이 구스 반 산트의 성장 드라마가 독특한 이유이다. 쉽게 센티멘탈해지지 않으며, 쉽게 어른인척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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