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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마치’와 ‘진짜’ 사이에서

- 고병권(수유너머R)

루쉰의 <소잡감(小雜感)>(1927)은 몇몇 서양학자들(맑스나 니체, 벤야민 등)이 애호했던 ‘단편(fragement)’ 내지 ‘아포리즘(aphorism)’ 형식의 글이다. 니체는 두 개의 산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이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선이라고 했다. 그것은 문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모서리를 돌지 않고 말이다. 이런 글쓰기 형식은 누군가(직접적인 비판 대상 뿐만 아니라 독자까지)를 찌르는 데 특히 적합하다. 문체, 즉 ‘스타일’이라는 말이 ‘스틸로스(stylus)’, 즉 ‘단검’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포리즘은 ‘문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교도소에 강의를 다녀왔는데 내 안에 뭔가 불편한 것이 생겨났다. 강의 내용도, 재소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들도 나쁘지 않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거북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가 엊그제 읽은 루쉰의 <소잡감&gt Buy Cialis Online;에서 단서를 잡았다. 나를 찌른 아포리즘은 이것이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은 현인은 누구나 마치 어제 죽은 것과 같다. 호주머니가 빈 어리석은 자는 누구나 진짜로 어제 죽어 있다.”

 

<<노신문집>>(일월서각)을 편찬한 다케우치 요시미의 역주에 따르면, 이 말은 청말의 정치가 증국번(曾國藩)의 말을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증국번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의 것은 무엇이든 어제 죽은 것 같고, 이후의 것은 무엇이든 오늘 태어난 것 같다.” 그리고 괄호친 문장에는 다케우치가 단 것인지 한국 옮긴이가 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됨이 일변하여 딴 사람이 됨”이라는 말이 더해져 있다. 몇 가지 짐작해 본 바는 있지만,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루쉰의 문장에서 내 눈에 쏙 들어온 것은 ‘마치’와 ‘진짜’의 대비였다. ‘호주머니 사정’도 대비를 이루고, ‘현인’과 ‘어리석은 자’도 대비를 이루지만, 내가 볼 때 첫 문장과 다음 문장의 진정한 격차는 ‘마치’와 ‘진짜’ 사이에 있다.

딱 떨어지는 해석은 아니겠지만, 엊그제의 내 기분에 비추어 그 문장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만약 현인이 ‘지혜의 길’ 대신 ‘재물의 길’을 걸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 그런데 못 배운 이에게 재물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었다. 호주머니가 두둑한 현인은 현인으로써 죽은 자와 같지만, 호주머니가 빈 어리석은 자는 그냥 죽은 자이다.

‘마치’와 ‘진짜’의 차이. ‘마치’라는 말은 현인에게 어떤 여지를 준다. 즉 재물을 모은 현인은 진짜로 죽지는 않고 죽은 것과 ‘같을’ 뿐이다. ‘비유’는 최악의 순간에도 현인에게 숨을 쉴 여지를 준다(그렇게 숨 쉬느니 차라리 숨을 멎는 게 더 낫다고 말할지라도). 그런데 가난한 이에게는 ‘비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여지’ 없이 그냥 죽는다. 도망칠 곳이 없다. ‘단검’은 부자 현인에게는 비유이지만 어리석은 가난뱅이에게는 사실이다. 단검에 찔린 현인은 상징적 피를 흘리지만 단검에 찔린 가난뱅이는 실재의 피를 흘린다. 현인은 상징적 죽음을 맞지만 가난뱅이는 실재적 죽음을 맞는다.

지난주 교도소에서 나는 우리 어리석음의 감옥에 대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지독한 감옥이라고. 거기에는 형기도 없다고. 지혜로운 이는 감옥 안에서도 자유로우며 어리석은 이는 감옥 바깥에서도 갇혀 있다고. 무슨 목사님 설교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내 입에서 떨어져나가자마자 무언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와 쿵하고 틀어박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리석음’을 비유해서 ‘감옥’이라는 말을 던진 곳은 비유적 감옥이 아니라 실제의 감옥이었다. “이곳은 정말 답답한 곳이에요. 사방이 막혀 있어요.” 한 재소자가 인문학 프로그램을 많이 열어달라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런데 이때 ‘사방이 막혀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대략 십년 전 쯤, 지금은 유명한 필자가 된 어느 후배의 글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으며 ‘정서 과잉’이라고 질타했다. ‘우주가 내 어깨에 올라탄 것 같다’는 식의 표현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책상 하나도 어깨에 올리지 못하는 너한테 우주가 어떻게 올라타냐’고 힐난했다. 그 후배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을 담은 비유가 조롱받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진심이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여러 번 느끼지만, 현실에는 정말로 삶의 무게 때문에 등이 휜 사람들이 있다. 논밭을 매며 땅을 기어가는 노인들도 있고, 서재에 몇 십 년을 틀어박혀 꾸부정해진 허리를 가진 문헌학자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비유’란 추방되어야 할 거짓말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리얼리즘도 하나의 ‘이즘’인 한에서 이데올로기이고, 현실이라는 것도 따지고 들면 ‘현실로 간주된 이미지’일 것이다(언젠가 오시이 마모루의 <아바론>을 보며, ‘리얼’이라는 이름이 게임의 특정한 스테이지, 즉 다양한 단계 중의 하나에 붙은 이름이라는 착상에 크게 공감했다). ‘비유’는 우리가 놓치는 어떤 것에 확대경을 들이밀어 그것을 부각시키고, 우리 눈을 가릴 정도로 부푼 어떤 것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리는, 일종의 조각술이다. 문체, 즉 ‘단검’으로 우리는 조각을 한다. 이때 우리의 ‘비유’는, 사실들로는 말하지 못하는, 어떤 진실 -그런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의 성실한 대변인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하지만, 내 안의 ‘다이몬’은 나에게 충고한다. 글쓰고 말할 때 ‘마치’와 ‘진짜’ 사이에서 몸조심하라고. 글쓰기의 최대 가능성은 ‘마치’와 ‘진짜’ 사이에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최대의 위험이 있다고.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응답 1개

  1. 이경희말하길

    이 글에 차암 공감이 되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수유너머 소식도 이멜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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