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꼰대와 미래세대

일베와 안녕세대(2)

- 김환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 교사)

 

첫 번째 사도, 촛불 주체

이러한 신인류가 정치사회학 지형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2년 촛불집회였다. 촛불집회는 전위들의 의식화교육과 지휘를 통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신인류의 자발적 각성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저항운동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수평적인 네트워크 공간이 이러한 운동이 출현할 수 있는 예시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인터넷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며 즐길 수 있는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 세계는 ‘너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라’는 명령을 개인들에게 끊임없이 내리게 되고, 이러한 자기표현의 욕구가 가상을 넘어 현실 사회로 넘쳐흐르게 된 것이 2002년의 월드컵과 촛불집회였다. 각각 개성 넘치는 붉은악마 스타일로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개인들의 정동은 이내 스포츠라는 매개물 없이 광장으로 직접 난입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촛불집회의 ‘기의’가 아니다. 신인류에게 촛불집회가 주는 유일하게 중요했던 메시지는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평등하게 내지를 수 있는 ‘수평 권력’적 카니발이 인터넷을 넘어 지금 이곳에 열렸다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직장이나 가정,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던 발언들을 인터넷과 광장에서 외치며” 해방감을 만끽했던 것이다.

사도2호

사도15호

사도들은 왜 반복해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인가?
사도(使徒, Angel)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공의 존재로, 사해문서의 예언에 따라 지구에 출몰하는 생명과 물질의 경계조차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각각의 사도의 이름은 사해문서에 근거해서 붙여졌으며 사도들끼리 연계를 하여 습격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단독으로 쳐들어온다. 사도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취한 존재라 불리며,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3화에서 등장한 제4사도 ‘샴셀’을 섬멸했을 때 사도의 신체가 그대로 남아 샘플을 채취할 수 있었는데, 극 중 과학자인 아카기 리츠코에 의하면 “인간의 유전자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 이는 사도가 또 다른 인류임을 증명한다. [위키백과 참조] 왼쪽 그림은 제2사도인 ‘릴리스’, 오른쪽 그림은 제15사도인 ‘아라엘’이다.

두 번째 사도, 일베

이른바 촛불 주체를 탄생하게 만드는 데 인터넷이 일종의 모태 역할을 했다면, 촛불 주체가 어떤 계기로 인해 체세포분열하면서 탄생한 것이 일베이다. 즉 일베는 촛불 주체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쌍생아이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촛불 주체와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 대해 박가분은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시한다.

여기서 어느 집회 풍경을 떠올려 보자. 광장에 모인 촛불 시위 인파들 중에서 조직 단위에서 동원된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SNS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나온 사람들이 더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촛불 시위는 처음에는 신선한 경험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동감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구호들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렇게 ‘군중 속의 고독한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할 때 어느 순간 촛불의 이상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앞서 다룬 바와 같이 신인류는 기의가 아닌 기표에 반응한다. 따라서 기표에만 반응해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운동권이 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주체들의 시사 상식 수준과 정치적 지향의 강도에 따라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의 층위가 나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발언권을 둘러싸고도 벌어진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실제로 목격한 장면인데, 한 남자가 연대 발언이 이어지고 있던 대중들의 자유 발언대 위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촛불집회 이거 축제의 장이지 않나요? 그러니 진지한 애기, 무거운 애기는 고만하고 이제 가볍고 재밌게 노는 애기를 해 봅시다!” 그 발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다소 쌀쌀했고 야유에 가까웠다. 나는 이 남자에게서 ‘개념 없음’을 본 게 아니라 어떤 진화의 징후를 발견했다. 촛불집회의 여러 요소들 중 축제라는 기표에만 선별적으로 반응하는 스타일리스트, 한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유희왕, ‘개념 있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감각화를 실현하는 게 중요한 나르시스트, 남들과 비슷한 류의 말을 하기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라는 신인류적 요소가 좀 더 명확하고 뻔뻔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진화한 존재(일베의 시초)들은 촛불 주체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품게 된다. 한편으론 유희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촛불집회의 카니발적 해방구를 맛보고 싶다. 그러나 시위 현장에서 이질감을 느낀 뒤 인터넷(디시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저장소)으로 다시 쫓겨난 이들은 촛불 주체에 대한 시기심을 일종의 트라우마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느꼈던 ‘이질감’이야말로 ‘실재계’와 ‘촛불 주체’가 괴리되어 있다는 감각적 증거라고 여긴다.

 

일베저장소 캡쳐

[사진] 일베라는 빨간약?
일베 홈페이지에 한 유저가 남긴 글을 캡쳐한 사진이다. 빨간약을 삼킨 이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비유는 지젝 등 좌파 진영에서 새로운 저항 주체의 각성을 암시하기 위해 많이 썼는데, 흥미롭게도 일베 유저들도 이를 전유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眞각성으로서의 2차 각성(촛불 주체로서의 1차 각성, 촛불 주체를 거부하는 2차 각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좌파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주입하는 빨간약은 진실을 호도하는 가짜 약이며, 그들의 속임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서 공격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적 주체들이 적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거울적 주체’로서 정립시켜 나가는 과정을 일베 또한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즉 일베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훼손하는 행위 이면에는 이러한 심리가 놓여 있다. 대중들이 좌파 전위들이 제공하는 가짜 약에 의해 ‘좌좀(좌파좀비)’으로 양산되고 있으며, 이를 진각성을 이룬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녕세대? 세 번째 사도

‘안녕 사태’는 모두가 예감하고 있듯이 촛불 주체 이후 다시 새로운 저항 주체가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 이제 이데올로그들은 사람들을 담론의 장에 직접적으로 인셉션시키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촛불 주체는 인셉션을 위해서 전위라는 매개자를 필요로 하진 않았지만 ‘광우병 파동’, ‘미선이, 효순이 사건’, ‘노무현 탄핵’ 등의 매개적 사건이 필요했다. 그러나 안녕 사태는 외부의 계기나 도화선 없이 저절로 발생했다. 이른바 자가 각성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과거에 몇몇 청춘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외침은 힐링 전문 강사들의 위로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꼰드롤로 잠잠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하다’는 한 청년의 외침에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고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진 메아리는 문제가 개인이 아닌 구조에 있다는 진실을 각성시켰다. 이제 이러한 대중의 각성들을 구조를 개편할 동력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안녕세대의 다음 행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다음 행보가 단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거나 특정 정권을 성토하는 수준에서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집회는 ‘反이명박,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와 같은 단일한 구호로 잡민들의 다채로운 목소리를 통일시킴으로써 운동의 주도권을 역설적으로 정권의 의지에 넘겨주고 말았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우리 내면의 권력화된 행동 양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미처 고민해 보지 못한 것이다. 막말로 철도 민영화만 막으면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가 전격적으로 사퇴한다면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 99퍼센트의 을을 핍박하는 1퍼센트의 갑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안녕해질 것인가? 이 사회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남아 있다면, 현재의 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한다 해도 새로운 권력자가 우리 중에서 나와 예전의 권좌에 연이어 앉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성토보다 내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현대적 용어로서 사유화는 관할권-재산-용역-철도-수도-경찰-교육 등의 권한을 민간 부문과 변덕스러운 시장에 맡기는 것을 뜻하는 경제 용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사유화는 ‘우리가 서로를 보살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욕망의 사유화, 상상력의 사유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본이 주입한 소유 욕망과 불안의 정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 욕망과 연대의 정동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가? 정말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성 주체’들아, 우리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외침을 서둘러 당신들의 메시지에 통일시키려 하지 말라. 또한 우리의 요구 사항을 몇몇 악인의 얼굴을 가진 권력자를 물러나게 한 이후로 유예시키지 말라. 먼저 우리의 목소리들이 당신 내면의 권력 지형과 닿아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지금 이곳에 만드는 시위 현장에 혁명 이후의 유토피아가 예시적으로 도래하게 하자. 안녕세대가 일베와 같은 어둠의 사도가 되어 다시 찾아오는 일만은 피해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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