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풍부한 물질적 경험을 위하여!

- 신광호

최근에 자그마한 그림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벌써 대여섯 점의 그림, 혹은 비슷한 무엇을 만들어 내었어요. 이전 만화 학원에 다니며 배웠던 기억들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는데,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더군요. 그림을 조금 그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보이는’ 대로 그려지지 않고 ‘아는’ 대로 그려지는 터라 아무리 보고 따라 그리려 해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뭐, 그런 문제도 있었고. 게다가 모사의 수준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그려야 마땅한가. 선으로 형태만 따고 대충 음영을 넣는 선에서 마무리해야 하는가. 아니면 슈퍼리얼리즘을 지향하며 되든 안 되든 그림을 하나 붙들고 덩어리감을 주어 가며 장기간 그려 나가야 하는가 등등. 갈팡질팡하며 모임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미술 선생님을 한 분 초빙하여 그분께 저희들의 작품(!)을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 왈.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길을 잡지 못하여 헤매고 있구나……!” (얼추 이러한 뉘앙스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임은 선생님의 든든한 특별 지도를 다음 주부터 받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4주 완성 커리큘럼을 직접 짜 오셔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브리핑을 하셨는데, 저희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지요. 계획에 대해 간단히 옮겨 보자면 이렇습니다. “풍부한 물질적 경험을 위하여! 자신의 내면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 또는 형성되려 하기 전에 우리에겐 ‘물질적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선과 종이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어 보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질료의 흐름으로서 충만한 ‘선-되기’, 그러한 선들을 싣는 ‘종이-되기’라는 두 가지 테마를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선-되기’란 우리 시야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크기의 전지에 갖은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여 선을 그려 나갈 때에 가능합니다. 손목이 아닌 팔을, 팔이 아닌 몸을 사용하여 그야말로 ‘선’이 되어 보는 거지요. ‘종이-되기’란 또한 이렇습니다. 전지에 몸을 밀착하여, 선들이 지나갈 때의 종이의 느낌이란 어떠할지, 지면에 흔적을 남기며 나아가는 선들을 온몸으로 체감하여 보는 거지요. 선들은 나를 부드럽게 간질이기도 하고, 거칠게 휘저으며 뻗어 가기도 하고, 콩콩 찌르듯이 자극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이 되고 종이가 되는 물질적 경험을 하여 보았을 때에, 종이와 연필이 만나 만들어질 수많은 가능성으로서의 선들을 현행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멋지지 않은가요? 저는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선생님이 아니라 계획에 말이에요!). 지금까지 개인 스케치북을 마련하지 않을 정도로 모임에 불성실하게 임했는데, 앞으로 4주간 선과 종이의 세계에 깊이 빠져 보려 합니다. 그날 모임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재료 등을 넣어 가지고 다닐 화구통을 다 함께 마련하면 어떨까? 미대 근처이니까 무언가 있어 보일지도 몰라. 화구통이 아니라 차라리 기타케이스가 어때? 등등.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고. ‘물질적 경험’이란 것이 최근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 듯해서 이렇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흔히 정신적 활동으로 여겨지기 마련인데, 실제로는 강한 신체적 활동 자체이기도 하지요. 후자의 경우를 경시하고서 ‘제대로 됐다’ 싶은 무언가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철학이라고 무엇이 다를까요. 니체는 책상에 앉은 채로 하는 철학하기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지요.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일상이라고 또한 무엇이 다를까요. 다른 것이 되는 정도의 강한 물리적 경험은 우리네 하루하루에서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현재화 하는 변곡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고민이야 여기에서 말할 거리가 아니지만 그에 대해 생각할 지점을 던져 주었던 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편집실에서>를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풍부한 물질적 경험을 위해 우리 다른 것이 한번 되어 보자구요! 그러면 분명 지금까지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요?

 

최근에 자그마한 그림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벌써 대여섯 점의 그림, 혹은 비슷한 무엇을 만들어 내었어요. 이전 만화 학원에 다니며 배웠던 기억들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는데,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더군요. 그림을 조금 그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보이는’ 대로 그려지지 않고 ‘아는’ 대로 그려지는 터라 아무리 보고 따라 그리려 해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뭐, 그런 문제도 있었고. 게다가 모사의 수준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그려야 마땅한가. 선으로 형태만 따고 대충 음영을 넣는 선에서 마무리해야 하는가. 아니면 슈퍼리얼리즘을 지향하며 되든 안 되든 그림을 하나 붙들고 덩어리감을 주어 가며 장기간 그려 나가야 하는가 등등. 갈팡질팡하며 모임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미술 선생님을 한 분 초빙하여 그분께 저희들의 작품(!)을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 왈.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길을 잡지 못하여 헤매고 있구나……!” (얼추 이러한 뉘앙스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임은 선생님의 든든한 특별 지도를 다음 주부터 받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4주 완성 커리큘럼을 직접 짜 오셔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브리핑을 하셨는데, 저희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지요. 계획에 대해 간단히 옮겨 보자면 이렇습니다. “풍부한 물질적 경험을 위하여! 자신의 내면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 또는 형성되려 하기 전에 우리에겐 ‘물질적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선과 종이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어 보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질료의 흐름으로서 충만한 ‘선-되기’, 그러한 선들을 싣는 ‘종이-되기’라는 두 가지 테마를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선-되기’란 우리 시야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크기의 전지에 갖은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여 선을 그려 나갈 때에 가능합니다. 손목이 아닌 팔을, 팔이 아닌 몸을 사용하여 그야말로 ‘선’이 되어 보는 거지요. ‘종이-되기’란 또한 이렇습니다. 전지에 몸을 밀착하여, 선들이 지나갈 때의 종이의 느낌이란 어떠할지, 지면에 흔적을 남기며 나아가는 선들을 온몸으로 체감하여 보는 거지요. 선들은 나를 부드럽게 간질이기도 하고, 거칠게 휘저으며 뻗어 가기도 하고, 콩콩 찌르듯이 자극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이 되고 종이가 되는 물질적 경험을 하여 보았을 때에, 종이와 연필이 만나 만들어질 수많은 가능성으로서의 선들을 현행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멋지지 않은가요? 저는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선생님이 아니라 계획에 말이에요!). 지금까지 개인 스케치북을 마련하지 않을 정도로 모임에 불성실하게 임했는데, 앞으로 4주간 선과 종이의 세계에 깊이 빠져 보려 합니다. 그날 모임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재료 등을 넣어 가지고 다닐 화구통을 다 함께 마련하면 어떨까? 미대 근처이니까 무언가 있어 보일지도 몰라. 화구통이 아니라 차라리 기타케이스가 어때? 등등.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고. ‘물질적 경험’이란 것이 최근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 듯해서 이렇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흔히 정신적 활동으로 여겨지기 마련인데, 실제로는 강한 신체적 활동 자체이기도 하지요. 후자의 경우를 경시하고서 ‘제대로 됐다’ 싶은 무언가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철학이라고 무엇이 다를까요. 니체는 책상에 앉은 채로 하는 철학하기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지요.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일상이라고 또한 무엇이 다를까요. 다른 것이 되는 정도의 강한 물리적 경험은 우리네 하루하루에서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현재화 하는 변곡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고민이야 여기에서 말할 거리가 아니지만 그에 대해 생각할 지점을 던져 주었던 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편집실에서>를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풍부한 물질적 경험을 위해 우리 다른 것이 한번 되어 보자구요! 그러면 분명 지금까지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요?

 

  * 위클리 수유너머는 이제 매체를 마무리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흐지부지 끝나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180 Pay Day Loans호는 ‘마무리 특집 기획’으로 그간 위클리가 들여다보았던 장기 농성장(밀양, 콜트콜텍, 강정마을, 광화문 공동행동)을 다시금 돌아보았습니다. 이곳에서의 투쟁일을 모두 합치면 6250일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하지요. 6250일의 투쟁.  멀리 떨어져서 헤아려 보아도 아득하기만 한 나날. 그런 기간을 투쟁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들은 과거와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감정을 과연 지니고 있을까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