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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相反)의 양심 (2)

- 김융희

독일 바이체커 대통령의 국회 연설문(2)

광야의 40년-1945년 5월 8일과 그 후 40년

1945년 5월 8일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의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하면서 히틀러는 자살, 독일군은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유럽에서 2차대전이 끝나는 날이다. 이 날은 전쟁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우리의 광복절을 떠올리게 되지만, 유럽에서는 해방의 날이면서, 독일인들에게 5월 8일은 이를 경험한 개개인에 따라서 의미 해석이 전혀 다른 뜻의 날로 기억되는 날이다. 독일은 패망의 날이며, 새로운 굴종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같은 복잡하고 별다른 의미의 40주년을 기념하는 날을 맞아서,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참의원과 의장, 수상, 각국 대사, 그리고 임석하는 시민들 앞에서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1945년 5월 8일의 매우 중요한 역사적 뜻을 강조하며, “사실을 은폐하고 변명하거나 일방적이 되지 않고, 될 수 있는데로 진실을 그대로 직시하는 힘이 필요하다”며 잘못된 역사의 진정의 참회와 반성으로 새 출발의 결의를 다짐하는 연설을 했다. 이같은 역사에 대한 진솔함은 결국 이해와 협력의 계기로 오늘의 독일을 있게 했다는 평이다. 2차대전 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독일인 400만 명, 소련인 2000만 명, 폴란드인이 450만 명, 유대인 600만 명,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죽임을 당한 독일인 200만 명등을 포함하면 그 수가 약 5500만 명에 달하며, 전쟁 피난민만도 2500만명을 발생시켰고 전쟁이 끝났다. 상상을 초월한 그 전쟁의 상처투성이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었고, 천문학적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처럼 많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독일은 통일을 이뤘고, 경제대국의 선진 열강이 되었다. 오늘의 독일이 있게된 그 저력을 바이체카 대통령의 연설문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좀 길지만 바른 이해를 위해 많이 줄이지 않는 연설문을 앞으로 몇 차례로 나누어 싣기로 한다.

 

———–(이 전 179호에 이어)

5월 8일은 독일 역사뿐 아니라 유럽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내전은 끝났으며, 낡은 유럽 세계는 붕괘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역사학자 미카엘 쉬트르마(Michael Struemer)의 말대로 “유럽은 전쟁을 통하여 철저하게 정리된” 것입니다. 엘베 강가에서 있었던 미소 양국 군 병사들의 만남은 유럽의 한 시대가 끝난 데 대한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전부터 내려오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유럽인들은 세계에서 아주 크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쳐 왔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서로간에 평화롭게 살아갈 공존관계는 점차로 껄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럽에서는 1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민족주의가 성행하여 갈등을 빚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련의 평화조약이 채결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평화를 수립할 힘이 결려되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격정의 불길이 다시금 치솟아 올라와, 사회가 궁핍하여 어려운 상황들이 도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재앙으로 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대중을 광기로 몰아넣고 이것을 이용했습니다. 취약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민주주의는 히틀러를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서방 쪽 여러 나라들도 무력했으며, 그리하여 이 숙명과도 같은 사태의 진전에 유럽은 가담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의 수상 처칠은 이것을 가리켜 “악의는 없었으나 결백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고립주의 입장을 취하여 안으로 웅크리고 들어가 30년대에는 유럽에 대하여 행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유럽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했으며 그것도 전쟁을 통하여 실현코자 했습니다. 히틀러는 폴란드와 일으킬 구실을 찿으려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이것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39년 5월 23일,

히틀러는 독일군 장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엄명하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는 없다. …단치히(Danzig Viagra Online,독일 영토였다가

1차대전 이후 폴란드의 영토로)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 목표는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동쪽에서 우리의 생존권을 확대하고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폴란드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일 같은 것은 문제 밖의 일이다. 남아있는 문제는 최초의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여 폴란드에 공격을 가할 결심을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이 마당에 정의가 어떻고 부정이 어떻고 조약이 어떻고 하는 그따위 것은 일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소 상호불가침 조약과 폴란드 침공에 이어 2차대전의)……

그렇다고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데 대한 독일의 죄책이 털끝만큼이라도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련은 제 나라의 이익을 타민족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허지만 대전의 주도권을 쥔 것은 독일이었으며 독일은 아니었습니다.

폭력에 호소한 것은 히틀러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독일이라는 이름과 떼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전쟁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나치즘(민족사회주의)의 통치 하에서 오욕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통당하고 시달리며, 노예로 전락하여 오욕 속에 딩군 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일 민족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계속하여 히틀러는 이런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힘이 없다면 차라리 망해 버리는 것이 낫다. ….우리들 자신이 전쟁에 희생자가 되기 전에 우선 다른 여러 민족들이 독일을 발화점으로 하는 전쟁의 희생자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독일은 전승국들이 협의한 대로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이 동안에 소련은 전쟁중에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동유럽, 동남 유럽의 모든 나라들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를 예외로 모든 나라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히틀러가 시작한 전쟁 없이는 이같은 분열도 없었을 것입니다.  ……  자신의 국토가 분할당하고 독일의 영토가 크게 상실된(2차 대전으로 20%이상의 국토를 상실했고 나머지도 모두 미영불소로 분할 지배) 것을 볼 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사실인 것입니다. 5월 8일을 맞이함에 있어서 동베르린의 마이스너(Meissner) 추기경은 “죄가 가져다 준 경망스런 결과는 항상 분열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파괴의 자의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자의적으로 나누어지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죄 없이 박해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재주좋게 도망칠 수 있었던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살기에 익숙했던 환경 가운데서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쌓아 올리게 된 행운을 붙잡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상들의 땅에서 쫏겨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후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된 지역에서 사는 우리들은 자유라는 귀중한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쪽에는) 몇 백만의 동포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은혜를 혜택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 면에서 부흥이라는 과제와 더불어 정신면에서 요청된 최초의 과제는 여러 가지 조작된 운명을 견뎌내기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눈을 뜨고 항상 서로 힘을 합하여 더불어 이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을 잊지 않는, 그러한 인간으로써의 힘이 시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제 안에서 평화에 대한 능력 그리고 안과 밖으로 진심에서 울어난 화해의 마음자리가 자라나야 했던 것입니다.

과거 적 편에 섰던 사람들이 화목하려는 심정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했던가 -이 일을 잊고 5월 8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와르샤와의 게토(注: Ghetto,라는 말은 원래 1516년 베니스의 한 섬에 유대인 집단만이 사는 지역으로 규정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한 데서 유래되고 있다. 이것이 의미상의 변화를 가져와 소수 종교 집단이나 소수민족이 어떤 시의 특정한 지역에 국한하여 몰려 사는 곳을 뜻하게 되었다)에서 그리고 첵코슬로바키아의 리디체 마을(注: 체코의 리디체 마을에서 레지스탕스 요원이 보헤미아.모리비아 지방의 총감독을 1942년 6월 4일에 암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1942년 6월 10일 나치의 비밀경찰에 의해 이 마을은 완전 괴멸의 비운을 겪음)에서 학살된 희생자들- 우리들은 정말 그분들의 친족들 심정이 될 수 있을른지요?

로테르담이나 런던 시민들의 경우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비 쏟아지듯 폭탄을 퍼부어대던 독일의 재건을 돕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기 위하여는 독일이 두 번 다시 폭력으로 자신들의 패망을 극복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을 다시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에게 점차로 깊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생략)

 

고향을 내쫒긴 사람들은 일찍 모범적인 형태로 폭력 사용의 거부를 표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힘이 없던 초기의 그같은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얼버무림이 아니라 오늘에도 효력이 있는 고백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은 활력을 되찾는 후에도 독일이 이것을 지켜간다는 신뢰를 각 방면에서 쌓아 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들의 고향은 다른 사람들의 고향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쪽에 있는 많은 옛 공동묘지들은 오늘날 이미 독일인들보다는 폴란드 사람들이 더 많이 묻혀 있습니다. 몇 백만의 독일 사람들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을 강요당한 다음 몇 백만의 폴란드 사람들과 몇 백만의 소련 사람들이 이동해 왔습니다. 그 어느 경우에도 당사자들의 의향을 물어서 된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정치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부당한 조치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 정당한 주장을 펴보았자 부당한 대우만 가중됨을 두려워했던 보상없는 강제 이주자들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5월 8일 이후 운명에 떠밀려 내려가 그 후 몇 십 년의 세월 동안 그 땅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된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정치 바람을 타지 않는 지속적인 장래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무력행사 포기의 오늘의 의미인 것입니다. 법률상으로 확보된 정당성을 주장하여 다투기보다는 서로 이해해야 한다는 계명을 우선시하는 일입니다.(박수) 이것이 유럽의 평화적인 질서를 위하여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진정한 공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945년을 기점으로 하는 유럽의 새로운 출발은 자유와 자결(自決)이라는 사상에 승리와 패망이라는 두 가지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우월해야만 평화가 가능하며 지켜진다고 모든 나라들이 생각해 왔으며, 평화란 다음에 올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는- 이러한 시기가 유럽 역사상에 오래 지속되어 왔습니다만, 우리들은 여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확대해나가야 합니다.  유럽의 여러 민족은 자신들의 고향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독일인에게도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고향을 잊을 수 있는 민족이 평화에 대한 애정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향을 잊지 않고 바로 그것을 위하여 언제나 서로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결의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쫏겨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복수주의는 아닌 것입니다.(박수)

(40년 전에 끝난 유럽) 최후의 전쟁은 사람들 마음속에 읽찍이 전례가 없는 평화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화해를 위한 교회들의 노력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의 상호 이해를 위한 사업에도 많은 실례가 있습니다. 나는 아우스비츠와 이스라엘에서 그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사죄를 표시하는 행동”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니더라인 지방의 클레베 시의 한 교회는 화해와 연대의 표시로서 폴란드 교회들이 보내온 빵을 전달받았습니다. 클레베 교회는 이 빵 가운데 하나를 영국의 어떤 교사에게 보냈습니다.

이 교사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뜨리고 전쟁 당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는 공군의 폭격 요원으로서 클레베의 교회와 민간주택을 폭격했노라고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오면서 화해의 증표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손길이 자기에게 와 닿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처럼 먼저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평화를 위한 한량없는 큰 공헌이 되는 것입니다.(박수)

———————————-(생략)

독일연방공화국은 온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고도 산업국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우리의 경제력으로 세계의 굶주림과 빈궁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여러 민족들 사이의 불평등을 조정하는데 기여할 책무를 짊어지고 있음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우리는 평화로우며 또한 자유롭게 살고 있을뿐 아니라 북대서양동맹(나토)과 유럽 공동체의 일환으로서 우리의 정책을 통하여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공헌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우리 독일 땅에서 오늘만큼 시민의 자유권이 보장되던 때는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나라나 사회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충실한 사회복지의 네트워크가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오만과 독선의 길을 가야할 하등의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

 

● 제3제국의 통치하에서 정신질환자들이 살해된 사실을 마음에 세긴다면, 지금 정신질환에 걸려 있는 시민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일은 우리 자신의 과제라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 박해를 받고, 목전에 닥쳐온 죽음에 떨던 사람들에 대하여 때때로 다른 나라들이 국경에 닫혀 있었던 사람들을 마음에 기억한다면, 오늘날 부당하게 박해를 받으며 우리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문호를 닫아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박수)

● 독제 치하에서 자유로운 정신이 박해 받았던 일을 깊이 생각한다면, 어떠한 사상, 어떠한 비판이건 비록 그러한 것들이 준엄한 화살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일지라도 그 사상과 비판의 자유를 우리는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 중동 정세에 대해 판단을 내릴 경우, 독일인이 유대인 동포들에게 가져다 준 운명이 이스라엘 건국의 방아쇠가 되었다는 것, 그 경우의 여러 조건들이 오늘에도 아직 이 지역 사람들의 무거운 짐이 되어 있으며 사람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주시기 바람니다.

● 동구권의 이웃나라들이 전쟁으로 시달리던 일을 생각할 때, 이들 나라들과의 대립을 해소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평화로운 선린 관계를 수립하는 일이 독일 외교정책의 중심과제가 되고 있는 사실에 이해가 깊어지실 것입니다.

쌍방이 서로 마음에 세기며 서로 존경하도록 요구되고 있으며, 인간으로서나 문화면에서 그리고 구경(究竟)에 가서는 역사적인 견지에서도 그래야 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말하기를 소련 지도부에는 대전 종결 40년째를 맞이하는 이때에 반독일 감정을 부채질할 생각은 없노라고 언명한 바 있습니다. 소련은 여러 민족간의 우의를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동서간의 화해와 전 유럽의 인권존중 문제에 대하여 소련의 공헌이 요청된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때이니만큼, 바로 모스코바의 이러한 분위기는 간과될 수 없는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연방 여러 민족들과의 우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40년, 독일 민족은 아직도 분단된 채로 있습니다. 금년 2월, 드레스덴의 성십자교회에서 있었던 드레스덴 대공습 4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헴퍼(Hemper)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개의 독일국가의 형성이 독일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며,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심정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국경으로 가로막혀 갈라짐이 우리를 무겁게 하고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을 가지게 합니다. 무기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볼티모어 시에서 “독일의 유대인”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두 대사들이 각각 초대되었습니다. 초청자인 존스홉킨스대학 총장은 두 대사에게 동시에 인사하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독일 사람들은 똑같은 역사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공통의 과거가 모든 독일 사람들을 한 끈으로 묶어놓고 있으며, 이것은 기쁨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항상 변함없는 희망의 원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독일은 모든 지역에서 다른 나라들과 평화와 선린관계를 넓혀가야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독일인들이 평화에 대한 위협을 주게 되도록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독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민족의 정의와 인권을 포함하여 평화를 함께 누리게 되기를 희구하고 있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유럽이 국경 너머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화해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경이 서로를 갈라놓지 않는 그러한 대륙이 되어야 합니다. 제2차 새계대전의 종말은 바로 이 점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5월 8일이 모든 독일 사람들을 비끄러매는 역사상 최후의 날로 항상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박수)

최근 몇 달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물었습니다. 대전 후 4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이렇듯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25주년, 30주년 때보다 더 활발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활발하게 논쟁을 벌여온 내면의 필연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도 의심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전적으로 거기에만 그 이유를 구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합니다.

——————,40년의 세월,

우리에게는 새로운 젊은 세대가 정치의 책임을 질만큼 성장하였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일찍이 일어났던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허지만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발생한 그 뒤의 역사에 대하여는 그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들 연장자들은 그들 젊은이들에게 꿈을 실현할 의무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무는 솔직하고 정직함에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고 계속하여 마음에 새기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이것을 젊은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피안의 유토피아적인 구원론으로 도피하거나 도덕적인 오만불손에 빠지는 일 없이 역사의 진실을 냉정하고도 공평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이것을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조상들에 대하여 더 나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느 개인이나 어떤 나라에도 도덕에 구경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배워왔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계속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태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위험을 계속 극복해 나갈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항상 편견과 적의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부심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나는 간절히 부탁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의나 증오심에 선동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러시아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 유대 사람들이나 터키 사람들, 진보주의 노선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나 보수주의자들, 흑인들이나 백인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거나 증오하는 일에 빠지지 않기를 바람니다. 서로가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살아갈 것을 배우십시오.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리들 정치가들도 이것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존중하십시다. 평화를 위하여 진력하십시다.

공정을 우리들의 발판으로 삼으십시다. 우리 안에 있는 정의의 규범을 따르십시다.

오늘, 5월 8일 이 날에 가능한 한의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시렵니까?  (박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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