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6호]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 4

- 편집자

씨네꼼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4/4)

“미친 소 먹고 죽기 싫어요.”라고 거리로 나온 2008년의 ‘촛불 소녀’들은 이성과 의지로 무장한 운동가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의 감각’으로 해로운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히스테리적 반응’이라 매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히스테리(자궁)’는 진실을 폭로하는 입이자, 권력자의 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다. ‘촛불 소녀’ 이후 소녀들은 공포영화라는 환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발화하는 주체로 출현하고 있다. 2009년 경기도교육감선거를 앞두고 열린 ‘청소년 정책제안 및 선거참여 캠페인’, ‘6. 10 청소년 시국선언’이나 노무현대통령서거정국의 자원봉사활동, 광주도청보전서명운동을 비롯한 각 지역운동의 현장에서 ‘촛불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오직 자신들의 소망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현실정치의 장(場)안에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2008년에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진 ‘일제고사 폐지 청소년 문화제’에서는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죽어간 친구들을 추모하는 묵념과 빈소가 있었다. 그동안 자살 청소년들은 낙오자이자 불효자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학교망신이자 아파트값 떨어뜨린다며 죽음이 은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촛불 소녀’에 의해 이들의 죽음이 공개적으로 애도됨으로써, 개인적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 되고, 입시스트레스는 개인의 심리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 즉 ‘미친 교육’이라는 정치적 이슈가 된다. 안티고네의 애도의 정치학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이제 소녀들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객체에서 ‘히스테리적 신탁’의 주체가 되려한다. 그러나 신탁은 카산드라의 예화에서 보듯이 듣는 자들의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탄생과 이들의 잠재적 역능에 주목하고, 영화 <반두비>와 같이 ‘촛불 소녀’의 정치적 감수성을 촉발 ․ 재현하는 작업들이 이어질 때 마침내 소녀들의 외침은 신탁으로 기능할 것이다.

4. 계급 : 중산층에서 탈락되거나 중산층을 욕망한다는 것

두 영화에는 대단히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불신지옥>에서 옆집여자가 복도 측 창문을 두드려 희진에게 횡설수설하다가 뜬금없이 “한 달에 88만원이면 뭐…”하고 웅얼거린다. <독>에서는 어항을 설치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옛날부터 있는 집엔 이런 거 하나씩 있었어” 라 말한다. 이는 일종의 잉여이자 징후적 독해가 가능한 대사들로, 인물들이 상황과 욕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불신지옥>은 시작 5분 동안 희진의 일과를 빠르게 스케치한다. 그녀는 기침을 하며 겨우 시험지를 제출하고 약국에 가서 더 쎈 감기약을 달라고 한다. 버스에서 졸다 정류장을 지나쳐 뛰어가 중학생 과외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편의점 계산원으로 밤늦도록 일한다. 자정을 넘겨 골목 계단을 올라 자취방으로 돌아와선 옷도 벗지 못한 채 쓰러져 잠든다. 그녀는 형사에게 짧게 ‘지난 줄거리’를 들려준다.

“2년 전 교통사고로….아빠 장례 치르고 빚쟁이들이 찾아오고…그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었지요….” 그녀는 또 ‘지옥 간다’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지금이 바로 지옥이야”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지옥’은 삶의 안정성이 깨지고 경제적 불안에 내몰리는 현실을 이른다. ‘신앙이 없으면, 지옥에 간다’는 ‘불신지옥’의 의미가 그녀에겐 ‘신용(credit)이 없으니, 지옥에 산다’의 의미가 된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고도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할 수 없을 터이고, 학자금 융자는 불어날 테고, 졸업을 해도 취직이되지 않으니 몇 년 후 신용불량자가 될 확률이 높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변제능력)이 없는 그녀의 삶이 바로 ‘88만원 세대’의 ‘지옥도’이다. 그녀의 가정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중간계급으로서의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전장치는 없었고, 희진은 경제적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어머니는 변화된 상황에 자신을 굴절시키지 못하고 현실 도피적 종말론에 몰두하고, 동생은 그나마 독립적인 생계를 꾸리는 언니를 부러워하며 때로 기갈이 든 듯 배고파한다. 허기는 경제적 몰락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체화한 증상이다. 부모는 자식을 건사하지 못하고, 자식은 부모를 신임하지 않는다. 희진은 상경후 왕래가 적었고, 모처럼 함께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방 안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또한 동생은 이웃의 침입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을 만큼, 신뢰를 나누지 못하였다. 하루아침에 중산층에서 탈락한 집안의 음울한 분위기와 어머니와 딸의 세계가 격리되어 상호불신 하는 공기가 이미 ‘불신지옥’이다.

그런데 이는 가족 내부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다. 희진은 이웃(사회)이나 형사(국가)등 누구로부터도 위안이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녀와 이웃과 형사는 서로를 의심하며 폭력적으로 대한다. 이는 사회 안의 기성세대와 20대와의 관계 역시 그러함을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와 사회는 젊은이들을 건사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은 국가와 사회를 신임하지 않는 ‘불신지옥’다. 영화는 중산층 가정의 경제적 몰락과 그에 따른 정서적 붕괴의 광경을 처연하게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적 연대감이 폐절된 한국사회의 척박한 풍경이 여실히 드러난다.

<독>의 가족은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의 아파트로 이주한다. 그들의 상경 이유는 곧 태어날 아이와 도시 중산층 가정으로서의 삶 (이를테면 아빠는 사장으로 출근을 하고, 엄마는 아파트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은 사교육 버스에 태워 보내는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땅을 팔고, 어머니의 피를 묻히면서까지 실현해보고자 했던 그 꿈 앞에서, 그는 다시금 피범벅이 되어 미끄러진다. 사실 그가 실현하려던 꿈은 아버지의 땅을 팔고 어머니를 죽이기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즉 자본(죽은 노동)을 획득하기만 하면 자본가가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산)노동과 결합시켜야만 자본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장으로 있는 내내 골머리를 앓는다. 공장이 잘 되어도 문제였다. 큰 주문이 들어오자 밤샘작업이라도 할 요량으로 덥석 물지만, 결제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자금난에 봉착한다. 무리한 작업으로 기계와 노동자가 나가떨어지지만, 부품을 수리할 돈조차 없다.

이는 우연한 사태의 기술이 아니다. 자본가의 곤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초과착취를 통해서라도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시장상황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박장로도 경고하였듯이 돌발변수는 한 둘이 아니다. 즉 자본가의 결정은 이윤을 향해 치닫는 ‘자본의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떨어야 한다. 자본의 욕망과 시장의 불안정성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 자본가의 운명이다.

영화가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들은 계속 불안을 느낀다. 박장로는 잠적을 한 것인가, 선배가 사기를 친 것인가 등등. 박장로의 돈은 늦게나마 입금되었고, 선배 역시 완전히 사기를 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보았을 때, 모든 주변 인물들이 사기꾼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의 불안이자 중간계급의 불안이다. 단란해 보이기만 했던 중간계급의 삶이란, (상시적으로 자금의 회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기꾼으로 보이는) 불안을 함입한 행복이다. 그는 불안을 매끈하게 함입시키질 못했고, 그의 불안이 증오와 좌절의 모습으로 폭발하자 피칠갑의 살귀(殺鬼)가 된다. 개인적 불안이 사회적 공포로 화하는 순간이다.

마치며


공포영화 중 가장 무서운 장면으로 꼽히는 장면은 아마도 <링>에서 TV 속의 귀신이 화면을 뚫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일 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영화라도 그것이 영화인 이상 비명을 질러가며 팝콘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세계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가 되어버릴 때, 진짜 공포는 시작된다. 2009년 여름 도착한 쌍생아 같은 두 영화 <불신지옥>과 <독>은 바로 그러한 공포를 안긴다. 영화를 구성하는 네 가지 공포의 키워드-개신교, 아파트, 소녀, 계급-은 2009년 한국사회의 가장 첨예한 정치적 화두와 겹쳐진다. 네 개의 화두는 현실과 환상의 누빔점이자, ‘촛불소녀’의 예에서 보듯 현실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화면에서 기어 나온 귀신이 묻는다. “네 눈엔 아직도 내가 영화로 보여?”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 이름으로 답하자. “SAY NO!”

– 황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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