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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만필 필진 인터뷰] 그 사내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어 일흔이 넘은 지금에도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같이 배낭을 메고 오늘도 어김없이 해방촌에 방문하여 연천 우백당에 놀러오라고 권하는 것일까

- 숨(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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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이 IMF 였는데

 

1.

김융희 선생은 바다 건너편에 완도가 보이는 장흥 출신이다. 4형제와 아버지만 남겨두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갔다. 선생의 나이 17살이었다. 남자만 득실거리는 집안에서 혼자 여자라 힘드셨는지 라며 어머니 죽음의 이유를 추측한다. 이듬 해, 아버지가 살림을 꾸리기 위해 재혼을 하실 무렵 사춘기 반항심에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1958년, 한국전쟁 후 전국의 청춘 남녀들이 돈을 벌러, 바람이 나서, 무작정 상경하는 일이 빈번하던 때란다.

“고생이란 말 자체가 우습게 생각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어.”

고향을 떠나 막 상경한 청년의 고생은 막노동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고생은 그의 삶에 자꾸 엇박자를 내는 세상 그 자체였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징병제도의 개선이었다. 정당한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못 가거나 안 간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갑자기 입대자가 늘어나고, 입영순서가 미뤄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입대가 계속 미뤄지다 7,8년이 흘러 결혼까지 한 상태에서 징집 영장을 받았다. 바로 옆 동네 공군본부로 배속되어 도시락 싸서 출퇴근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방법이 없는 거야.” 병역을 기피했다. 그러니 변변한 직장에 취직을 할 수도 없어 장사를 시작했다. 고생길이 시작됐다.

 

“(장사가) 하도 안 되니까 앉아서 생각을 해본 거야. 자명해. 소질이 없는 사람이 억지 것을 가지고 하려니까.”

원가가 천원짜리인 물건을 떼다가 5백원, 천원을 남겨먹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때 기모 스웨터가 유행하던 시절, 보풀보풀 기모를 부풀리기 위해서는 스웨터를 솔로 긁어야 했다. 한 번 빨고 나면 털이 엉켜 붙어 다시 입지 못할 옷이 될 게 뻔했다. 선생은 옷의 실용성을 생각해서 다른 옷을 걸어놓았다. 결과는 참패. 책 외판원도 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차비 등 제반 비용을 빌려주었다. 책을 팔면 비용을 제하고 수익을 나누는 형식. 하지만 책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서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 당겨 받은 차비도 못 갚게 되었다.

나쁜 것이 나쁜 것을 창출하면서 더 나쁘게 되는 격이었다. 50대 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보니 세상에 알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말이 없던 사람이 참견이 많아지자 권위가 없어지고 안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개입을 하게 되어 언쟁이 발생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신용이 떨어지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남에게 우스운 사람이 되는 자신을 보았다.

“세상에 태어나 공부도 남처럼 하려고 하고 발버둥을 쳤는데, 내가 이런 삶을 살려고 그랬나 하면 얼마나 서글퍼지겠어.”

인생이 실패처럼 느껴져 죽는 게 낫지 싶었다. 곤궁해진 살림 끝에 집에는 쌀도 떨어졌다.

 

2.

생활이 어려울 때마다 친구놈들에게 책 한 권씩 앵겨주며 용돈을 타곤 했는데 그 때는 그게 별일이 아니었단다. 쌀이 떨어지자 집에 있던 그림을 가지고 일전에 신세를 졌던 친구 중 만만한 놈 하나를 찾아갔다. 일하는 친구의 사무실에 들러 기다리면서 한 켠에 그림을 슬그머니 놓고는 점심시간에 같이 나가 점심을 얻어먹고 용돈을 받아왔다. 다음번에 만난 친구의 얼굴 표정이 썩 나쁘지 않고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 길로 그림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80년대 초부터 사람들이 부동산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 개발 붐이 이어졌다. 졸부들이 그림을 사들이자 그림값이 요동쳤다. 미술계에 인맥도, 화랑을 열 자본도 없던 선생은 조그만 사무실과 연락처만 가지고 화가들과 직접 교섭을 했다. 화이트칼라 은행원들이 대리가 되면 아파트를 사고, 새집에 가구를 채우고 빈 벽면을 장식할 그림을 사는 게 수순이었다. 시청 주위 은행 본점 직원들을 주 고객으로 삼았다. 지하에 작은 공간도 마련해서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미니 화랑을 만들었다. 인사동에서 4,50만원에 팔리는 그림을 선생의 미니 화랑에서는 20만원에 팔았다.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팔았지만 실패했다. 인사동 화랑에 있는 으리으리한 소파와 예쁜 아가씨의 미소, VIP 서비스가 선생의 화랑에는 없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고 쌓여만 갔다. 1년이 지나자 그림은 그대로 빚이 되었다.

 

“하느님한테 맹세를 했어. 나는 이때까지 정말 거지같은 생활을 했고 개 같은 생활을 했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아시잖아요. 나는 정말로 한 가지라도 1년만 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걸 못했습니다. 그러니 늙어서 내가 저 세상에 가도록까지 할 수 있도록 이 짓만 하게 나를 도와주세요.”

선생은 지성을 다해 그림 장사를 계속 했다. 그림을 모르던 그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7,80년대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없었고, 이론서도 묘한 것들 밖에 없었단다. 전시관 소개 브로셔를 다 스크랩해서 읽고 손님들과 나누는 이야기에서 배웠다. 미(美)자가 들어가는 책이라면 미용관련 서적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사서 읽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은행가의 사람들이었다. 은행에 걸려있는 그림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수입도 꽤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화랑을 하면서 생긴 빚은 이자와 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매달 가져오는 수입이 이자로 고스란히 나갔다. 부도 직전까지 몰리자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그림을 처분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다. 그날 저녁 IMF 사태가 뉴스에 발표됐다.

“나 그때는 그랬다니까. 누가 IMF얘기하면 야, 나는 평생이 IMF인데, 나한테 그 얘기하지마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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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멜 자유와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건강

 

3.

선생의 고생담을 듣던 나는 평생이 IMF라는 말에 크게 웃었다. 청소년 시절 IMF를 맞은 내게 그 시절은 집에 빨간 딱지가 붙고, 급식비를 못 내는 비극적 상황으로 기억된다. “평생이 IMF”라는 말 한 마디 앞에 나의 기억이 조금 가벼워졌다. 고생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만, 모질고 건조하고 딱딱하게도 만드는데 선생이 지켜온 단단함 속에 깃든 부드러움이 반가웠다.

궁금했다. 70 초로의 사내 김융희 선생이 건조하거나 모질어지지 않고 단단해진 이유가.

“나의 유전인자가 말이야, 무엇이 있기에, 나를 그렇게 유지시켜줬느냐.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책이 좋았어. 그 어려운 시절 책이 나를 이렇게 붙들어줬고. 그 인자가 내게 있었다면 우리 부모님들하고 조상님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하지 않겠나.”

그의 유전인자가 6,70년대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경동교회를 만나게 한 것일까. 그곳에서 선생은 청년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노동, 인권, 여성 등 사회 의제를 두루 교육했지만, 배움을 이끈 강원영 목사는 대화를 가장 강조했다. 3박4일, 4박5일 숙박을 같이 하며 공부하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란 것은 그냥 간단히 말 한마디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서로 심층으로 마음이 통해야 한다, 이거에요. 나는 그 교회를 가서 많이 성장했어요. 아주 전형적인 촌놈이고, 떼를 못 벗을 그런 사람인데, 그때 그 양반이 너무 세련되게 교육을 시켜줘서.”

노년에 접어든 김융희 선생은 수유너머를 만난다. 민예총 아카데미에서 고미숙 선생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대학에서 주는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수유너머를 찾아갔다. 왔다갔다 공부도 하고, 직접 키운 푸성귀며 묵은지며 선물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선물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생은 수유너머가 있다는 사실이 신나고 고맙고 반가웠다.

그래서 수유너머가 갈라질 때 마음이 몹시 아팠다고 한다. “나는 능력은 없지만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서. 이걸 그냥 지켜봐야하느냐, 아니면 중재를 주선을 해봐야하느냐. 얘기를 해보니까 다 일리도 있고, 또 자기들의 주장이 뚜렷한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전히 발걸음을 한다. 규모가 지니던 좋은 점이 사라진 것은 단점이지만, 서로의 개성이 드러나서 좋은 장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 속에 서운함과 애틋함이 섞여있다.

 

4.

“나는 행운이에요.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쓸 기회도 없었고.”

위클리에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고추장의 우연한 제안에 민망하고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험을 한 번 해보자고 시작한 글쓰기는 나날이 재미졌다. 선생은 두렵고 민망하고 조심스럽던 초심이 변해 당신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이 생기더라며 멋쩍게 웃는다.

어려운 과제가 즐거운 실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코너 제목의 덕이 컸다. ‘여강만필’의 ‘만’이라는 글자. 나는 지금까지 늦다, 황혼녘이라는 뜻의 ‘만(晩)’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만화(漫畵)’할 때 ‘만’자였다. 만필. 고급잡지에도 만화 페이지가 있으니 여강만필이 위클리의 만화 같은 역할을 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글쟁이의 수준을 넘보면 진짜 우스워지지만 만화같은 글을 쓰자 생각하니 생활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용기가 생겼다.

여강만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위클리의 마지막까지 같이 하고 있다. 진솔하고 소박한 생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가까이 접하는 문제 중심으로 소재를 잡고 어려운 낱말을 피했다. 너무 기분 내키는 대로 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과 당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 사이 어디쯤에서 글이 나왔다. 생활이 바쁘게 꽉 짜인 틈에서 매주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게 어려웠지만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저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면 얼마나 재미없겠나, 응? 그런데 이거 말야 시골 농사꾼이 쓴 글을 말야, 서울 젊은 사람들이 읽어준단 말야. 그것이 신나는 일이지. 나를 인터뷰하겠다는데 내가 인터뷰를 자청해서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다. 왜 그만 두나(웃음)”

선생의 일격에 잠시 휘청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서운함이 가득 담긴 항의다. 위클리 최장수 코너 필진 여강 김융희 선생은 누구보다 위클리의 마무리가 아쉬우리라. 위클리의 모든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선생의 글을 읽은 사람들 중에 불쾌한 분들이 있었다면 시골 노인을 위로해준 것으로 잘 생각해달라, 초기 목표 100호를 달성하고 이만큼 연장해서 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가리고, 좋은 점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진짜 대안이지 않겠느냐, 옛날 시대에 잡지해서 안 망한 사람들이 없었다, 요즘이 인터넷 시대라 쉽다고는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그 경험을 잘 살려 새로운 방향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 선생의 은근한 조언과 격려, 위로, 감사의 말에 아쉬움과 애정이 그득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일어나는 데 덧붙여 말씀한다.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어요, 내 주위에도. 옛날에는 같이 앉아있을 수도 없는 신분차이 나는 사람들이 지금은 나를 부러워해요. 내가 뭐하는 것이 있어, 돈이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 건강과 자유가 있지.”

선생은 자유를 말하며 옆에 있던 배낭을 가리킨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강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선생은 배낭을 척 메고, 함박 웃으며 말한다.

“내가 하면 또 멋있잖아.”

 

 

수유맨을 자청하는 김융희 선생을 보며 나는 속으로만 조심스레, 수유너머 할배라고 불러본다. 연천에 놀러오라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연천에 왔다가 가기 바쁜 연구실 멤버들에게 초기 정신을 잃었다고 웃으며 잔소리 하는 할배. 잔소리를 듣는데도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유와 진심과 배움을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낄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 초로의 어른, 김융희 선생의 마음속에도 그런 긍지가 보인다.

선생의 마음속에 있는 그 긍지가 평생이 IMF이던 시절을 헤쳐 나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구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위클리와 여강만필은 이제 문을 닫지만,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여강 김융희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두 번 쯤 해방촌에 오셔서 도시 생활에 정신이 나간 요즘 젊은 것들에게 잔소리 해주기를 그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죄송한 편집자는 중얼거려본다.

김융희 선생의 초대로 수유너머R 특강 의 종강MT를 연천 우백당에서 진행했다

김융희 선생의 초대로 수유너머R 특강 <그리스도교 사유의 역사>의 종강MT를 연천 우백당에서 진행했다

 

 

응답 1개

  1. 고추장말하길

    인터뷰 내용이 선생님 목소리로 직접 듣는 것처럼 실감이 나네요. 초점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 배경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르치는 자리보다 배움의 자리에 먼저 앉으셨던 분, 김융희 선생님의 글을 위클리에서 더 읽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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