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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향해 소리를 질러야하는지

- 숨(수유너머R)

“지금 시국이 어느 땐데 이 난리야? 사람이 죽었는데!”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반포주공아파트 단지 입구를 빠져나오다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운전자석 창문을 내리고 아주머니 한 분이 당장에 쫓아 나와 누구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소리를 지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님과 한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며칠 째 소음에 시달리고 있으니 화가 단단히 난 것도 이해는 됩니다만,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은 집회에 참가하고 있던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실소를 터뜨리게 만들었지요.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주머니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매일 밤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바로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기 위해서니까요. 장애등급제로 인해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한 고 송국현 님이 지난 4월 집에 혼자 있다가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누운 채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또 다시 한 사람이 죽었는데, 보건복지부장관은 유감이다, 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러니 아주머니의 훈계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 참 잘못 찾았습니다. 혹시, 아주머니는 사람들이 반포주공아파트 앞에 모인 이유가 한 사람의 죽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랬을까요? 한 장애인의 죽음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보다 가볍다거나 덜 슬프다거나 덜 아프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정말 끔찍합니다. 하지만 물어볼 새도 없이 아주머니는 차를 돌려나갔으니,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긴 어렵지요. 중요한 건, 고 송국현 님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는 것은 다른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는 것과 같다고 다음에 그 아주머니를 만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처음 생기던 1998년도부터 부양의무제는 악법적 요소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장애등급제 폐지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습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도 벌써 600일이 지났습니다. 부양의무제로 인해 장애인 아들이 수급자에서 탈락할까봐 목숨을 끊었던 아버지부터, 장애등급제로 인해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해 불붙은 집 안에서 죽은 고 송국현 님까지. 그 사이와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돈 때문입니다. 정부는 복지 예산을 늘릴 의지가 없기 때문에 장애등급제나 부양의무제 등으로 복지서비스의 필요를 제한합니다. 각종 제한과 규제가 사회적 약자의 삶을 옭아매고, 위협합니다.

반대로 세월호 침몰은 돈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각종 제한과 규제를 완화시킨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노후 선박의 수명 연장법안이 통과되면서 한 번, 선박 결함을 시정하지 않은 허술한 안전점검으로 한 번, 화물을 기준치 이상으로 선적하고 규격에 맞지 않는 고정 장치를 쓴 것에서 한 번, 선박직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뽑고 판공비에는 연간 6천만원을 썼지만 안전교육에는 고작 54 Online Casino만원만 쓰면서 한 번, 사고 직후 승객에게 선내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하면서 한 번, 정부가 갈팡질팡 시간을 허비하고 탑승자명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한 번, 사고 선박 인양 전문 업체 ‘언딘’에 인명 구조작업을 의뢰하면서 한 번. 대통령이 모두 책임지겠으니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라 명령하는 대신 책임자와 관련자 질책 타령만 하면서 한 번.  기타 등등의 무수한 한 번들. 수없이 되풀이된 한 번들은 사람의 목숨 대신 돈과 기업의 이익을 선택한 한 번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고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거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었겠지요.

사람을 죽이는 제도를 강화하고 사람을 살리는 규제는 완화한 결과가 고 송국현 님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입니다. 그 중심에는 돈과 기업의 이익이 먼저인 사람들이 있었지요. 살려내라고 외치는 소리에 귀 막는 보건복지부장관이나, 고속버스를 타러온 장애인들의 얼굴에 최루액을 분사하도록 명령한 서울지방경찰청이나, 분노하는 유족과 국민들을 미개하다고 말한 어느 정치인의 스무살 짜리 아들이나(그 정치인은 거듭 사과하고 있지만, 평소 아버지가 하는 말을 아들이 반복한 거 아니겠냐는 추론은 매우 정당해보입니다), 현장 의료진들이 구급의약품들을 올려놓은 테이블을 치우고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이나, 라면에 계란을 넣어먹은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냐라고 말하는 청와대 대변인이나, 자신이 입은 옷색을 보정한 사진을 언론에 뿌리게 한 대통령이 그들입니다. 열거하기에 숨차도록 너무 많네요. 이들에게는 법과 제도, 규칙과 규제 모두 사람의 삶 대신 돈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존재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의 삶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카드로 취급해온지 오래라는 사실이 매일 폭로되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의 울부짖음도 한 사람의 울부짖음보다 더 클 수 없다.

또한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 

지구 전체라도 한 영혼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비트겐슈타인

햇빛이 어제보다 밝고 따뜻해진 오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연초록으로 반짝입니다. 날씨가 아까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시장에서 장을 봐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쌈채소, 고추, 방울토마토, 호박 모종을 삽니다. 옥상 상자텃밭에 흙을 파고 거름주고 물뿌리고 모종을 심습니다.

고 송국현 님이 살아있었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생각해봅니다. 동료 학생, 선생님들과 산보삼아 야학근처를 돌아다니다, 제법 따가운 햇볕에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느라 땀을 흠뻑 흘려 투덜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어딘가 핀 꽃에 자기도 모르게 함뿍 웃었을 지도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오늘 하루를 생각해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의 귀한 삶인데요. 한 사람의 삶이 누렸을 매일을 빼앗아간 이들은 자기 책임을 느끼지도, 잘못을 고치려들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를 만나면 누구를 향해 소리를 질러야하는 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82호 동시대반시대는 창간편집진과 나눈 위클리 이야기입니다. 이번호가  마지막 <위클리 수유너머>입니다. 결정을 내린 후 마지막 인사를 하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어요. 웹페이지는 닫지 않습니다. 지난 호와 코너별 글 보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좋은 글 써주신 필진분들과 숨은 독자 여러분들, 그리고 편집진들 모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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