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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끝에서 시작을 묻다’-초기 편집진과의 만남

- 지안

 

“니가 원한대로 다 했어. 그런데도 헤어진다고?” 지난 181호 글의 제목이다. 확실히, 우리는 천천히 헤어지고 있다. 한때 불나게 카톡을 하고, 모여서 술 먹던 관성에서 벗어나 각자의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지난 181호 ‘편집자의 말’ 제목은 사뭇 섬뜩하게 다가온다. “잘못된 낙원은 불타버려야 했죠.” 과연 우리의 ‘낙원’은 어떤 것이었을까? 가치판단을 하기에는 아직 속이 쓰려서 우리는 일단 ‘낙원’의 뿌리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위클리 수유너머’의 창립 편집진들과 그 역사 말이다. 그들은 유령처럼 우리 옆에 존재했었는데, 가령 “예전 선배들 이렇게 했다더라.” 뭐 이런 식의 죽은 소문으로 말이다. 혹자는 선배들 이야기를 하며 ‘유령’이니 ‘죽은 소문’ 따위의 말을 붙이다니!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클리 수유너머는 그동안 계속 구성원이 변해왔고, 따라서 단일한 포맷이나 흐름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바뀌어왔다. 즉 우리의 ‘위클리 수유너머’와 그들의 ‘위클리 수유너머’란 다른 매체라고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클리의 빛나던 초창 시절의 이야기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흔하게 들려오는 것이었고, 무거운 것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매혹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위클리를 끝내기 전에 그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봄쯤에 해방촌에 자리잡은 수유너머R에서 ‘위클리 끝에서 시작을 묻다’란 컨셉으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위클리 수유너머 창간호가 2010년 1월 20일이니 위클리를 창간하던 시절은 벌써 4~5년은 지난 이야기이다. 나는 어려운 자리에서도 대체로 담담한 편인데 한명씩, 한명씩 들어오는 그들을 보니 현 편집진으로써 어쩔 수 없는 긴장이 느껴졌다. 서로 인사를 하고, 서로의 위클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위클리 편집진을 하던 시절은 꽤 옛일이라 다들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얘기들이 천천히 하나씩 툭툭 나오기 시작했다. 어쨌든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이거다. 이들, 위클리 왜 만들었나. 그리고 왜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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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대해서

숨: 모이기 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다들 긴장하신 표정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위클리가 처음에는 어떻게 탄생한 건지 초기 기획과 계획들이 궁금합니다.

박정수: 수유 너머가 코뮨들의 코뮨이라는 분화실험을 하게 되고, 여러 이름을 갖게 되면서 공유하던 주소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각 코뮨들의 소식을 웹상으로 한군데 모아보자 했었지. 그런데 그걸 누가 보느냐 해서 자체 컨텐츠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은유: 어떤 구체적인 전례가 없어서, 정말 무라는 상태에서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가 생각을 했었죠. 기술적인 인프라나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단 말이죠. 일단은 코뮨이 분화 되었으니까 접속이 자유로운 장에 함께 모였으면 좋겠다 싶었던 마음도 있었죠.

박정수: 그러면 어떤 컨텐츠가 있으면 좋겠느냐 해서 만들어졌어. 자연히 코너는 뭐가 있으면 좋을까 라는 고민이 시작됐고, 코너 제목 짓고 하느라 한 달이 걸렸어.

은유: 기와님은 디자이너로 하자고 고추장이 제안을 했고. 그러고 보니 그때 기와님은 그냥 공부하러 오는 학인이었네.

박정수: 그때 편집진이 또 있었나? 동욱이?

은유: 동욱이는 나중에

숨: 융희쌤도 거진 처음부터 했어요.

은유: 씨네꼼이 있었고.

박정수: 사상가특집이 있었고

은유: 맑스 있고..

숨: 그때면 4,5년 전이니까 다들…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숨: 위클리 수유너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마음은 어땠어요?

박정수: 몇 명이나 볼까? 그게 얼마나 갈지 생각도 했고. 100호나 갈까? (웃음)

은유: 긴장 이런 거 전혀 없었지… (위클리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실패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어. 어떤 펀딩이나 자본이 있었다면 부담이 되었겠지. 그런데 소박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큰 긴장이나 부담이 없었던 거 같아.

이스트: 그래서 위클리 였나요?

은유: 응 데일리는 무리고. 위클리가 적당하겠다 싶었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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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흐릿한 언어들에서 사라진 코너들, 사라진 이름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그런데 뭐야 이 사람들? 뚜껑을 열어보니 초기의 위클리를 만든 동력은 준비된 능력자들이라기보다 무대뽀 정신에 가까웠다. 위클리는 신기한 매체다. 일단 자본으로 굴러가는 매체가 아니다. 편집진이 돈을 받는 것도 아니며 필진이 돈을 받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본이 있었다면 부담 되었”을 거란다. 특히나 최근에는 편집진들 간에 가시적인 직책이나 위계도 없었다. 대개 일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돈과 명령인데,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적어도 돈과 명령이 주는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제적인 긴장이 없다고 할 때 문제는 다른 질의 긴장감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편집장도, 나이가 아주 차이나는 선배도 없었다. 이때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겼다. 먼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발행할 때마다 일을 나눌 것인가? 그보다 먼저 일을 분업화해서 운영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다. 우리가 각자의 분야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위클리’가 강제와 결부된 책임의 기제가 아니라 자발성과 결부된 자기-책임의 기제로 굴러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나선다고 했을 때 발행 주기마다 자연스럽게 일이 나누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행이란 철저하게 ‘일’이라서, 어떤 종류의 긴장감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굴러가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했다. 아마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서로를 동료로써 긴장하게 만드는 것일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런 긴장감을 만드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모두가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을 테지만 하고 싶은 것 역시 해야 하는 것이 되는 순간 아리송해지는 순간들이 덮쳐왔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편집장을 만들거나 각자의 일을 나누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위클리를 운영하려 했다면 지금의 종간은 조금은 더 먼 이야기가 되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위클리가 효율적으로 가장 빠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배 편집진들은 도대체 어떻게 위클리를 꾸려온걸까?

 

공동작업의 험난함

고추장: 위클 리가 묘한 게 한편으로는 부담도 없고 등등, 그래서 백호까지 쭉 갈 수 있었고. 재밌었고. 긴장도 있고. 매주 발행할 수 있을까하는 압박도 있었고. 원래 시작을 할 때도 좀 쉽게 생각했는데.

고추장: 아무튼 가볍게, 가볍게 했기 때문에 쭉 왔던 거 같아. 오히려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편하게 왔던 거 같아. 그런데 글 쓰고 하는 것들은 가볍게 갔는데 업데이트는 긴장과 압박이 많았지. 뭔가 큰 약속을 어긴 거 같고 말야. 그런 양가성이… 일하는 사람은 아마 제일 쪼였을꺼야.

광호: 위클리는 협업인거잖아요. 분업이 되지 않았을 때. 아마 저희 경우가 그랬었던 것 같은데 발행이 밀리지는 않았는지.

은유: 밀리지는 않았어요. (웃음)

숨: 저희도 사실 편집장이 있어야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어떤 책임을 지는 게 각자에게 다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해야 하나? 발행이 밀리지 않는 동력이 뭐였을지 궁금해요.

박카스: 저는 중간에 들어왔는데, 정수쌤이랑 연구실에서 매번 보기 때문에… (웃음) 제 생각에는 그 때 긴장이 있었어요. 하루 지나면 발행 왜 안하냐는 말이 있었고. 저는 처음에 기술진으로 있었어요. 아 이게 내 할 일 같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하면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근데 그걸 또 말하는 타입은 아니어서 좀 힘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던 거 같아요. 제 기억에는 연구실에서 보니까 히스테리를 부렸던 거 같아요.

은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거냐.

박카스: (기술진이라는 게) 해도 딱 드러나지는 않고. 근데 들리는 거는 사진이 빠졌다, 뭐 이런. 뭐가 잘못됐는지 나도 보여 그래서 싫은데. (일동 웃음) 아무튼 그때 막 히스테리를 부리고 하긴 했죠. 저는 대부분 연구실에서 혼자 공부하며 지냈는데 위클리 하면서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게 처음이었어요.

박정수: 일이 되게 하는 요소가, 회의도 어떻게 해야 다이나믹 하게 할까 생각하고. 서로 기분전환하면서 회의도하고 간간히 어디 한번 갈까? 현장에 놀러가 듯이 하고. 또 아니면 소풍도 가고 뭐 이런 게 있어야지. “아 또 회의해!” 이런 게 아니라 각자 내 생활리듬이 위클리 일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내 바이오리듬이 곧바로 위클리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주기도 하는 상태였지. 위클리 편집위원으로서의 내 활동력이 내 생활과 공부에 상호작용하고. 그냥 일거리가 아닌 거지. 내가 얼만큼 공부를 하고, 어떤 공부, 어떤 활동을 하는가가 위클리에 얼마나 좋은 글이 나오는지 영향을 주는 그게 있더라고.

박정수: 그게 (위클리가) 에너지가 연구실에서 에너지가…!

고추장: 뿐만 아니고 삼천 명이 방문했다고..

박정수: 우리끼리 이게 허수가 아니냐 하다가, 용산 이후에 기자들한테 연락도 오고. 기자들이 다 본다고 소식이 들려서. 아 그래 위클리는 오피니언 매체다, 대중매체가 아니다! (일동 웃음)

 

 2

 

헤어지기 좋은 날

숨: 그래서 저희 위클리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잖아요. 사실은 끝까지 잘하고 싶은데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고. 사실 그 시점을 모르겠어서 지금 끝을 맺는 거잖아요. 그래서 끝에 대한 경험을 들어보고 싶어요. 항상, 끝을 낸다는 거 그 자체가 찝찝해요.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는 거고. 기존에 끝을 냈던 그때의 어떤 노하우나, 잘 끝내는 방법. 끝에 무슨 의미를 두어야 좋을지 그런 것들이 있을까요?

박정수: 관계를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고. 아름다운 헤어짐을 기대하면 안돼. 그런거없어. 모든 관계가 만들어질 때도 그렇지만 헤어질 때도 매끄럽고 그런 건 없는 거 같아. 넓은 의미에서 헤어짐에는 폭력이 다 있어. 그렇다고 그거에 대해 중압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같이 한 사람들이 의욕만큼, 할 수 있는 만큼, 감당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하면서 끝내는 거에 만족해야지. 아쉽겠지만 그게 제일 만족하는 걸 꺼예요. 그러니까 당사자들 아쉬워할 필요 없어요.

숨: 그런데 왜 100회에서 안 끝냈어요? (일동 웃음)

박정수: 그때 너무 잘 나갔단 말야. 방법도 알겠고. 그때 피크를 찍었는데. 

고추장: 잡지경험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잡지가 뭐 별건가, 하면서 쉽게 쉽게 갔던 거 같고 그런데 거기에 의미를 붙이고 하면서 가기 시작하면 진짜 힘들어지는 거지. 우리도 그렇게 했던 적이 있지. 112호 쯤 가면서 그랬던 거 같아. 디자이너 구하기도 힘들고. 차라리 필자는 쉬운데 이거는 정말 노가다, ‘일’인데 그냥 봉사하라고 말하기가 되게 부담스러웠는데. 그런데 어쨌든 재밌어. 우리는 언젠가 위클리 또 다시 하자고 하는데 그 정도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요새 위클리와 전혀 무관한 검색들을 할 때, ‘위클리 수유너머’가 검색엔진에 가장 위에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웹에 있는 글이란 오묘한 거였다. 책은 덮으면 되는데, 위클리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자꾸 튀어나온다.  ‘위클리 수유너머’의 역사에서 유효한 명제가 딱 하나 있었는 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주류 매체가 담지 못하는 소수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위클리는 짬밥처럼 이것 저것 뒤섞인 공간이었다. 각 잡고 책상 앞에 앉아 정독해야 할 것만 같은 인문학 글부터, 스마트폰으로 만만하게 휘적일 수 있는 단편적인 글도 있었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 있어 소수성이란 가장 중요한 테마였다. 그래서  위클리는 이제 종간하지만, 위클리 안의 글들이 장롱 속의 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곳의 글은 쓴 사람의 것도 아니고, 편집진의 것도 아니다. 시작부터 “공동의 자산”을 표방했으니 여기서 생산된 모든 것들이 공동의 것으로서 읽기도, 퍼가기도, 재사용되기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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