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박도영 설치미술가 ‘나는 용산투쟁 재개발 잡부다’

- 편집자

전선인터뷰 – 박도영 설치미술가

” 나는 용산투쟁 재개발 잡부다 “

‘용산역’이 ‘용산참사역’으로 변한지 1년이 흘렀다. 삶을 통째로 빼앗긴 그들은 삶이 와해된 바로 그 자리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냈다. 시커먼 연기 머금은 남일당 건물은 분향소로, 고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레아호프는 커피향 그윽한 카페이자 갤러리와 미디어센터가 들어선 복합문화공간으로, 고 양회성씨 가게였던 삼호복집은 유가족 살림집으로, 그리고 좁은 골목길은 매일 저녁 미사가 열리는 남일당 성당으로 변했다. ‘남일당 마을’이 된 이곳에서 유가족은 삼시세끼 밥을 먹고 등 붙이고 잠을 자고 까만 상복 빨아 널며 네 번의 계절을 보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감으로써 365일 투쟁의 역사를 쓰기까지, 그의 역할이 컸다.

스스로를 ‘잡부’라 부르는 박도영 씨. 그는 남일당 마을에서 전기 배선공사와 수도공사, 목공일, 컴퓨터 세팅 등을 도맡은 전천후 기능공이다. 또한 레아카페를 만든 절대미각의 바리스타이자, 외국인활동가 친구들에게 용산참사를 알린 국제연대담당으로 활약했다. 본업은 설치미술가에 별명은 게으른 천재. 힘이 장사인 네 얼굴의 사나이는 스산하고 썰렁한 이곳을 복닥복닥 정이 엉키고 삶이 자라는 공간으로 가꾸었다. 철거현장에서 대안적 삶을 만들어낸 진정한 ‘삶의 기술자’와 남일당 마을, 1년을 추억했다.

전기, 수도, 목공 ‘망치 든 미디어활동가’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뒤편 레아호프 앞. 저쪽에서 뿔테 안경의 그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혹한의 날씨이건만 등산 양말에 샌들을 신었다. 번호 키를 눌러 레아카페 문을 열자 입구 벽면에 ‘1월 25일까지만 영업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난로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커피물을 올리는 그의 뒷등이 어쩐지 쓸쓸하다. 우리가 여기서 커피를 마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용산에 어떻게 합류했나.
= 지난 3월에 용산참사 현장에 촛불미디어센터가 들어 설 때 미디어활동가로 왔다. 주류매체에서 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리고 기록으로 남길 목적이었다.

– 처음 용산에 왔을 때 상황이 많이 어지러웠을 텐데.
= 여기 레아호프 건물 4층이 이상림 씨가 살던 주거공간이었다. 그런데 참사가 발생하고는 유가족조차 접근을 못했다. 이 앞을 전경차를 막아놓고 못 들어가게 했다.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날마다 싸우면서 조금씩 길을 트고 진입을 시도해서 건물을 되찾았다. 건물 안에 집기가 부서지고 물이 차고 아수라장이었다. 여럿이 힘 모아 같이 치웠다.

– 미디어활동가라지만 카메라를 들기 전에 목장갑부터 끼고 기반시설을 닦은 셈이다. 어떤 일들을 해나갔나.
= 건물내부에 불필요한 것들 드러내고 쓸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필요한 곳에 전기와 수도를 깔았다. 유가족 살림집은 넓은 공간 사이에 벽을 만들어 방을 만들고 좁은 곳은 텄다. 낡은 컴퓨터를 고쳐서 세팅하고 그런 일이다. 레아호프 건물 지하실은 무릎까지 물이 차고 엉망이었다. 거기 들어가서 물을 퍼내고 술을 찾아냈다. 보물찾기 하는 것 같았다. 지하실에 좋은 게 많더라.(웃음)

– 거의 막일이다. 힘들지 않았나?
= 재밌었다. 나한텐 공간이 중요하다. 삭막한 공간이 조금씩 변해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 철거현장에 카페 만들 생각을 한 이유가 있는가.
= 빡빡하게 살면 재미없지 않나. 차도 한 잔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재밌게 놀아야지.

– 레아카페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왔나.
= 철거민들, 사회운동 활동가, 문화예술가들, 일반 시민들도 많이 왔다. 대추리랑 달리 용산은 도심이라 시민들이 밤낮으로 많이 왔다. 새벽에 찾아와서 분향소가 어딘지 묻기도 하고 술 한 잔을 걸치고서 시국토론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 레아호프는 1층은 카페와 갤러리, 2층은 미디어센터, 3층은 범대위 사무실, 4층은 생활공간으로 거듭났다. 레아갤러리에서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레아카페는 유가족과 활동가들, 시민들이 쉬어 가는 사랑방이 되었다. ‘길 위의 신부님’ 문정현 신부도 레아카페 단골이었다. 그는 신부님을 친구처럼 대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신부님에게 커피를 내면서도 “여기, 먹어~”, 컵을 두고 그냥 갈라치면 “그릇 씻어놔~”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놓았다고 한다. 그걸 신부님도 좋아했다니 그가 내린 커피에 무슨 사랑의 묘약이라도 들어있었던 걸까. 실제로 그는 커피전문가로 통한다. 생원두를 사다가 직접 볶는다. 커피 볶는 기계도 손수 만들었다. 이 세상 모든 커피를 감별하고 하루에 서른 잔 이상을 마시는 커피애호가다. 석 잔이 아니고 서른 잔이 맞다. 단, 이틀을 몰아서 사는 그의 하루는 48시간이다.

기술과 예술의 통섭 ‘우월한 잡부’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그의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도교육에서 훈육된 대한민국 성인의 척도를 버려야 한다. 일단, 그는 공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기능영재다. 국제기능대회 수상 외 다수의 수상경력 덕분이다. 세계로봇축구대회 준우승 자격으로 카이스트에 입학한 것을 비롯해 대학을 네 군데나 다녔다. 어떤 대학은 너무 쉬워서 어떤 대학은 너무 어려워서 관뒀다. 재미없는 일은 제치고 아침에 눈 뜨면 가장 먼저 ‘오늘은 뭐하고 놀지’ 궁리한다. 전공은 기술공학이지만 노가다와 설치미술 작품으로 돈을 벌고, 특정 단체 소속은 아니지만 싸움 현장을 접수해 변화를 일구는 ‘잡부’활동가로 산다.

–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나.
= 고등학생 때 선생님 영향을 받았다. 선생님이 시위현장을 다니면서 찍은 장면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편집을 도우면서 영상제작에 관심을 갖게 됐고 세상일도 알게 됐다.

– 그럼 설치미술은 언제 배운 건가.
=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과 친했다. (선생님 친구가 두 명이다.) 역시 작업을 도와드리면서 같이 하다 보니 재밌었다. 그러면서 배웠다. 사당동과 잠실 재건축 현장 작업을 비롯해서 ‘성스러운 다이어트’ 등 많은 작업을 했다.

– 재개발 현장이 중요한 삶의 무대였던 것 같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으로 용산참사 현장에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가.
= 도움이 됐다. 재개발 현장이 친숙하다. 딱 보면 안다. 중3때부터 노가다를 했는데 재건축 현장에서 주로 일했다. 일이 힘드니까 일당이 세다.

– 설치미술가로서 프랑스에 초청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 프랑스문화청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주변의 권유로 신청했는데 어떻게 운이 좋아 뽑혔다. 2년 과정인데 4개월 하다가 왔다. 말도 안통하고 해서.

– 능력자다. 손재주와 감각이 뛰어난가 보다. 설치미술가로서 본인의 경쟁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 (그런 거 없는데……) 음, 여러 가지 재료나 컴퓨터 같은 기기를 잘 다루는 점? 그런 것들을 잘 하는 이유는, 돈 있으면 다른 사람을 시킬 텐데 돈 없어서 내가 직접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다. 하하.

기술과 예술의 통섭을 이뤄낸 ‘우월한 잡부’ 박도영. 그는 용산참사 해외로 알리기에도 앞장섰다. 중고생 시절 배낭여행에서 만난 일본 미디어활동가 친구들이 용산참사 현장에 다녀갔다. 도쿄에서 열린 국제 워크샵에 참가해 촛불미디어센터의 사례를 알리기도 했다. 가난한 활동가인 그는 일본 체류 중 돈이 없어 밥을 굶을지언정 모금액을 한 푼도 안 쓰고 그대로 가져왔다고 전한다. 그의 지나친 우직함에 대해 문화기획자 신유아씨는 “어떻게 보면 천재 어떻게 보면 바보”라고 말했다.

“망루, 디자인 구리다…깨끗이 치우고 재밌게 싸우자”

용산참사는 망루의 비극이었다. 예전엔 바리케이트를 치고 탄압에 맞섰다면 싸움의 기술이 달라졌다. 마치 피난민처럼 쌀, 이불, 생수 들고 단절된 공간에서 성을 쌓고 ‘농성’ 함으로써 철거민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가 되었다. 소통과 저항의 수단으로 새롭게 등장한 망루를 어떻게 볼 것인가.

– 기술자가 볼 때 싸움 공간으로서 망루는 어땠나.
= 망루 싸움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래도 난 별로다. 디자인이 구리니까. 철거민 투쟁의 이미지가 과격하다. 화염병 던지고 그런 장면이 언론을 통해 전달됐을 때 자기와 달라 보인다. 이질감이 들지 않나. 요즘은 그런 시위가 안 통한다. 친근하고 재밌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싸움도 그렇고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다. 생활과 동떨어진 작업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오래 한다.

– 젊은 활동가로서 운동판의 문제점은 뭐라고 보나.
= 말로만 하는 거. 영상 보면 다 나온다.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만 하고 말하는 사람은 말만 하고 성명서 쓰는 사람은 성명서만 쓴다. 성명서 쓰는 사람도 자기가 먹은 컵은 씻고 머문 자리는 치워야 한다.

– 레아카페 파업도 그래서 하게 된 건가. (제보자에 따르면, 그는 11월에 수도와 전기를 끊고 카페문을 닫아버렸다. 직장폐쇄형 파업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남일당 마을 사람들은 레아카페를 깨끗이 치워놓고 앞으로는 청결과 위생에 힘쓸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는 일주일 후 전기와 수도를 연결해주고 갔으며 2주만에 파업을 완전히 풀고 카페로 돌아왔다.)
= 사람들이 공간을 인식 못한다. 카페에서 컵을 가져가면 안 가져온다. 치우지도 않는다. 물과 전기를 다 끊은 이유는 그래야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줄 알기 때문이다. 직접 청소하다보면 공간이 보인다. 몸소 느껴볼 기회를 준 것이다.

– 레아카페 안이 정돈이 잘 돼 있다. 장기투쟁 현장에서 더러운 것쯤은 예사로 넘기는데 더러움에 대한 특별한 적대감이라도 있는 건가.
= 아니다. 사람들이 더러워서 피하는 지하실, 화장실은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다. 화장실에 있는 똥이 더러운가? 더럽다고 생각하니까 더러운 거다. 그런데 일상생활 공간에 너저분하게 널린 상태는 싫다. 철거촌인데 정리라도 돼 있어야 눈이 편안하다. 치우면서 마음도 정리된다.

근 1년을 사용한 레아카페 주전자는 갓 배송된 신상(품)의 광택을 자랑한다. 소다 세제로 닦았단다. 내공 9단의 주부 맞먹는 살림꾼인 그에게서, 광장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치고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는 운동권 마초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투쟁의 현장에는 늘 있지만 빨간 머리띠 두른 비장한 전사의 이미지도 아니다. 그저 깨끗이 치우고 재밌게 싸우자는 신조로 사는 성실한 생활인의 모습에 가깝다.

‘복합문화 투쟁공간’ 레아는 부활한다

–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는가.
=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자전거 타고 다니고 웬만한 거리는 걷고 밥은 대충 있는 거 먹었다. 돈은 필요한 만큼만 번다. 노가다도 하고 작품도 판다. 3년 쓸 돈을 한 번에 벌어 놓는다. 이제 여기 정리하면 또 3년 치 벌어 놓을 작정이다.

– 그 낙관적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건가. 부럽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나.
= 글쎄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고, 없는 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는 나에게 내일은 없다. 어제도 없고. 오늘만 있다.

– 돈을 벌긴 벌고 싶은 건가.
= 당연하다. 1조원쯤 있었으면 좋겠다. 비행기랑 활주로 사서 비행기 타고 놀 것이다. (그는 비행기조종사 자격증이 있다) 사실, 돈 있는 백수가 꿈이다.

– 그건 이건희도 못 이룬 꿈인데?
= 맞다. 하하.

– 용산참사 현장에서 꼭 하고 싶은데 못한 일이 있는가.
= 스키점프대를 만들고 싶었다. 눈이 많이 와서 푸대 자루로 눈썰매도 타고 재밌었을 텐데.

– 아쉽게도 광화문에 먼저 생겼다. 그나저나 싸움의 공간으로서 광화문 광장을 잃었는데, 공간에 대한 남다른 감각의 소유자로서 혹시 좋은 대안 없나?
= 글쎄다. 꽃이니 시설물이니 없다 생각하고 모이면 된다. 꼭 트인 공간에서 모야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한국의 집회형식은 큰 광장에 무대 있고 엠프를 설치한다. 무대가 있다는 것은 주최 측, 준비단체가 있다는 얘긴데 싸움 방식을 달리 도모해볼 필요가 있다.

– 대추리지킴이 출신으로 용산에 왔다. 용산지킴이로서 또 다른 현장에 올 가능성도 있나.
= 정해진 건 없다. 그 때 상황 봐서 재밌을 것 같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 용산이 정리되면 무엇을 할 계획인가.
= 용산에 함께 했던 활동가들과 다른 곳에 카페나 바 형태로 이런 공간을 열자고 얘기했다. 레아카페처럼 차도 마시고 예술과 미디어작업이 가능한 복합문화투쟁공간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6월에 뉴욕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한다.

일일연속극처럼 지난 일 년 함께 울고 웃던 남일당 마을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1월 25일이 이후, 용산 4구역은 본격적으로 재개발에 착수한다. 이 일대는 공원으로 조성되며 남일당 자리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다섯 그루의 나무가 심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핏빛 용산은 푸른 용산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나 용산은 사라져도 재개발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을 통째로 빼앗긴 이들은 계속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목장갑과 망치 들고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현장을 누비는 그를, 철거현장에 보일러 놓아주고 커피물 끓이며 삶을 통으로 복원하는 그를, 우리는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은유 (인터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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