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7호] <500일의 썸머> 실연당하고도 왜 당했는지 모르는 남자들이여~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씨네꼼

<500일의 썸머> 실연당하고도 왜 당했는지 모르는 남자들이여~

“자기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이런 말에 가볍게 한숨이 쉬어지면 여자, 머리가 뽀개질 것처럼 아파지면 남자이다. 물론 여기서 남·녀는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이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감성적 의미의 젠더이다.

<500일의 썸머>는 이러한 남녀의 정서적 차이가 담겨있는 로맨틱 실연극이다. 그 이름도 평범한 ‘톰’이라는 남자가 ‘썸머’라는 여자에게 반해 300일간의 행복한 연애를 즐기다가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고 200일 가량 폐인생활을 겪다가, 정신줄 챙기고나서 ‘오텀’이라는 여자와 새 연애에 돌입한다는, 흡사 ‘곤충의 한살이’ 같은 생태스토리를 <메멘토>식 시간뒤섞기 편집으로 진부함을 벗은 영화 <500일의 썸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실연당한 남자들을 위한 로맨스 영화, ‘나쁜 년’에게 당한 기억이 있는 남자들이 공감할 만한 영화 등등. 영화는 철저하게 남자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두에는 ‘나쁜 년’의 실명도 등장하니, 이런 감상은 당연한 것이리라. 평단도 비슷했다. <씨네21>의 이현경은 썸머를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에 빗대면서, 이 영화를 남성성장극으로 보았다. 그러나 썸머는 이영애가 아니고, 톰은 ‘아주 조금’ 성장한 것에 그쳤으니, 그 이유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1. 왜 썸머는 이영애가 아닌가?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명대사로 한참 연하의 숫총각을 꼬신 이혼녀, 이영애. 한 계절이 지난 후 그녀는 “나 김치 못 담궈”라며 결혼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힌다. 유지태는 “내가 담궈 줄께”라며 붙잡았지만, 사실 그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영애는 ‘인스턴트한 관계’를 원할 뿐 궁극적으로 결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콩달콩 결혼을 꿈꾸었던 유지태와는 ‘갈 길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썸머는 다르다. 그녀는 “깊은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결혼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가구매장에서 벌이는 신혼 퍼포먼스나 웨딩 드레스 입은 신부 손을 잡고 뛰쳐나오는 영화 <졸업>을 보고 눈물을 쏟는 것 등은 이를 짐작케한다. 이별 통보를 받고 괴로와 하던 톰은 다른 사람의 결혼 피로연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춤을 추며 일말의 기대를 품지만, 얼마 후 결혼 반지를 낀 그녀로부터 결혼통보를 받는다. “왜 그때 나와 춤을 추었지? 그때 이미 새 애인이 생겼을 때 아니야?”라고 묻는 톰에게 썸머는 대답한다. 아직 청혼을 받기 전이었다고. 그녀에게 청혼이 의미있는 분기점이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가 아니라, 오히려 <광식이 동생 광태>의 이요원을 닮았다. 광식의 7년에 걸친 짝사랑을 알면서도 어떻게 일웅의 청혼을 받아들였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답한다.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거든요.”

썸머는 어떤 인간인가? 영화는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지만, 실은 꽤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녀는 겉보기엔 밝지만, 속으론 우울함, 외로움, 공허감 등이 있는 여자이다. 물론 이런 어두운 이면이 남자들에겐 뻔해보이지 않게 만드는 ‘모호한 매력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더 많은 남자들이 꼬이게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정확히 보고 이를 채워줄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다. 즉 일찍 이혼한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basic trust)’를 채워줄 타자를 기다렸던 것이다. 여자는 가면을 쓴(masking) 애정결핍증 상태로, 자신의 매력만 보고 달려드는 남자들 중 적당히 마음에 드는 남자와 단기적인 관계만 맺으며, ‘더 깊은 관계’라는 ‘진실로 원하지만 사실은 두려워하는’ 사랑을 애써 회피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이를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며, ‘더 깊은 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였다.

그녀에 대한 초반의 설명에 ‘긴머리에 대한 애착을 보이다가 무덤덤하게 싹뚝 자르는 것을 즐긴다’는 말이 노골적으로 나온다. 이게 무슨 뜻일까? 흔히 이별 후 여자들이 머리를 자른다는 속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에게 머리는 관계나 애착의 페티쉬이다. 애써 기른 머리를 무덤덤하게 싹뚝 자르는 걸 즐긴다는 뜻은 진실로 애착하고 싶은 대상물을 애착하지 않겠다는 상태, 즉 애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을 수 있다. 잘 사귀던 관계를 뭉텅 잘라내고 다시금 공허감을 맛보고서야 익숙한 느낌에 오히려 안도하는 상태, 이는 자신에게 내리는 잔혹한 벌(罰)이기도 하다. 그녀는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처럼 ‘(진실로) 원하는 것’을 ‘(진실로) 원하는 것’이라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너와는 가벼운 관계만 가질래’ 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규정한 한계를 톰이 박차고 나가주기를, 그래서 신경증적인 자기형벌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졸업>의 그 남자처럼.

2. 톰은 무엇을 잘못하였나?

둘의 관계가 살짝 매너리즘으로 빠지려는 즈음, 하필 본 게 <졸업>이다. 그녀는 <졸업>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는다. 자신이 늘 회피해왔던 ‘진짜 원하는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졸업>은 모호한 욕망의 청춘이 타성적이고 충동적인 관계와 절연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를 얻기위해 비상한 용기로 탈주하는 영화이다. 그녀 역시 단기연애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얻기 위해 내달리고 싶다. 혹은 누군가 진정으로 그녀를 욕망하여 그녀 손을 잡고 내달려주기를 원한다. <졸업>을 보자 평소 억눌러 왔던 진짜 사랑에 대한 욕구가 솟구쳐올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매력만 보았지 어두운 이면은 보지 못했으며, 자신이 원하는 스킨쉽 진도를 먼저 뽑는 그녀에게 고마와 할 줄이나 알았지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몰랐던 톰은 당황한다. 톰은 그저 ‘여자가 막 우네, 왜 저러지? 괜찮나? 좀 민망하려나?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지? 차라리 못본 척 해야 하나?’ 하다가 어이없게도 팬케익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녀는 집에 가겠다고 한다. 그리곤 며칠 후 그녀는 톰과 팬케익을 먹다가 헤어지자는 말을 한다.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멍해져있는 남자 앞에서 ‘여기 팬케익이 맛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함으로써 남자를 더욱 기막히고 자존심 상하게 만든다. 톰은 ‘이 와중에 팬케익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하는 심정이었겠지만, 그건 그녀가 은연중에 ‘무심한 네가 그때 팬케익을 먹으러 가쟀지? 어때 맛있냐? 많이 먹어라. 난 그때 이미 너한테서 마음 정리했다’라고 암시하는, 일종의 조롱인 셈이다.

<졸업>을 보고 혼자 집에 간 그녀는 아마 방바닥을 뒹굴어 가며 엉엉 울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는 그 상황을 ‘혼자 두어야 할 민망한 상황’ ‘자아가 빨리 수습해야 할 비정상적인 국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체액을 주체할 수 없는 그 순간이 바로 매끈하게 봉합된 자아가 파열되는 순간이며, 파열된 틈새를 통해 ‘내가 너에게’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이다. 즉 존재가 열리는 순간이자, 관계가 재정립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독립된 개체성을 중시하는 남자들은 자아의 불연속 지점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 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도 나오듯이) 남자는 어떻게든 혼자 동굴에 들어가 멀쩡하게 된 후라야 누구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누군가 건드리면 화를 내거나 짜증스러워한다. 그러나 관계성을 중시하는 여자들은 바로 그때에 같이 있어 주는 사람이 진실한 관계라 생각한다. 그녀의 파편적인 상념들과 쏟아지는 하소연 등을 밤새워 들어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을 특별한 관계로 여긴다. 사실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하룻밤 만리장성’은 섹스가 아니라, 이런 ‘진상-수다-떨기’인 경우가 많다.

톰은 여자의 욕망을 너무 몰랐다. 썸머가 결혼할 남자는 톰보다 성숙한 인간이었을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그때 너무 외롭던 차에, 조금 진중하고 따뜻해 보이던 ‘지나가는 남자 1’ 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때 썸머가 원한 것을 해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저 먼저 와서 말걸기이든, 눈물 콧물 섞인 하소연 들어주기이든, 반지를 건네는 청혼이든 말이다.

톰 역시 썸머와의 연애를 통해 좀더 성숙해진 건 사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명의 상대를 꿈꾸어왔지만, 이제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이미 정해진 것은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용기’를 내어 오텀에게 말을 건다. 바로 이러한 ‘용기’가 흔히 말하는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의 그 ‘용기’이다. 사자를 때려잡는 용기가 아니고 말이다. 톰은 이제 오텀에게서 사랑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미안한 말이지만, 톰은 아직 연애의 뺑뺑이를 몇바퀴 더 돌아야 할 것 같다.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자신이 겪은 실연체험기로 이런 영화를 만들며, 서두에 ‘나쁜 년’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500일의 썸머>를 보고 ‘나쁜 년’에게 당했던 ‘실연의 추억’을 떠올리며 ‘공감백배’를 외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자기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소리만 들어도 돌아버릴 것 같은 남자들이여, 제발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혼자두지나 말게나.

– 황진미

응답 2개

  1. 강남자연말하길

    남자의 입장을 일편적으로 보는게 좀 걸리지만,
    여자의 입장에 대해 작은 견해를 갖게해주네요.
    용기라는 말에서 여자도 여자라는 것에 한정짓지말고 그런 마음을 품었으면

  2. 사루비아말하길

    와우!! 완전 공감입니다. 팬케익 장면은 남의 얘기가 아니어서 깜딱 놀랬어요.
    ㅋ옛 지나가던 남친2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로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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