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7호] ‘여기’ 있어도 되나요?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배움이란 소박한 것이다. ‘학學’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배경만 봐도 알 수 있다. 학學은 원래 집을 짓는 일에서 유래했다. ‘짚이나 억새 등으로 덮은 초가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묶는’ 일을 상형한 게 학學이다. 지붕宀 위에서 새끼줄爻을 묶는 두 손의 모양을 보고 글자를 만든 것이다. ‘뚜껑 있는 집’에 살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가 학學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게 배움이어야 한다. 육조 혜능이 그러지 않았던가. 선불교의 여섯 번째 큰 스승이었던 혜능은 금강경 읽는 소리에 꽂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움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오조 홍인대사 밑에서 공부하던 천명이 넘는 제자들을 ‘재끼고’ 도道를 깨친다. 까막눈이었던 그가!

배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장’이다. 학學의 유래나 육조 혜능의 이야기 모두 이 ‘현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을 지어서 살아야하는 현장과 독송하는 현장에서 배움에 대한 ‘촉발’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배움이 ‘현장’을 떠났다. 배우는 일과 현장이 서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배우는 장소가 따로 있고 사는 현장이 따로 있다는 생각. 학교가 배움을 독점하고 삶에서는 그 어떤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태도들. 또 선생과 제자라는 경계가 점점 굳건해졌다.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스승도 제자들과 배울 수 있어야함에도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을 그 현장에 일방적으로 흘려보내기에 급급하다. 그러니 ‘난 선생이고 넌 제자’인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 배움의 현장이 계속해서 스승만이 열나게 썰을 풀어대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유너머 구로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보리학교>는 이 ‘배움과 현장’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멀어질 대로 멀어진 지식과 생활의 거리를 줄여보자는 취지였다. 이 공간에서 아이들과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깨닫는 게 있다. 바로 지적허영이다. 아이들을 가르쳐보면 금방 알 수 안다.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논어>의 문장을 가르치려면 그 문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어찌어찌 말을 한다 해도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이는 스승의 배움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니 논어니 하는 허영이 아니라 그것이 내 생활에 들어와 있어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아이들에게 맞게 요리할 줄 아는 것까지. 이건 순전히 현장이 가르쳐주는 것들이다.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을 들으면 참 난감하다. 뭐라 대답해야할지. 그런데 그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스승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열하일기>에도 나오지 않던가. 서당에 다니는 노인과 아이의 이야기. 서당훈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노인은 곧바로 아이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배운 걸 집에 돌아가서 손자들에게 가르쳐준다. 그것도 열과 성을 다해서 묻고 배우고 가르친다. 아이가 노인에게는 스승인 것이다. 아이들과 공부할 때도 이런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내가 모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묻고 배운다. 배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내가 모르는 걸 아이가 알고 있을 때 그걸 배우는 거다. 그리고 내가 아는 걸로 아이들의 생각을 해석하려고 들면 절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내려놓고 봐야 아이들이 보인다. 그러니 아이들이 나를 내려놓게 하는 스승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느 배움의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자기를 내려놓고 현장에서 뭐든 배우려는 마음이 기초다. 그러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든 같이 있으면 그 안에 배움이 있다. 혼자 아무리 궁리해 봐도 소용없던 것도 같이 있으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의 힘인 것이다. 또 내가 이미 알던 것도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하면 다르게 보이기 일쑤다. 각자 앎의 다양한 공명통을 가지고 현장에 들어오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가르치는 일, 여기서 배움은 계속해서 촉발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 텍스트를 만나고 글을 쓰는 와중에 생기는 유머가 장난 아니다.

게으른 내 동생들 | 이단영(초등학교 6학년)

채영이는 어찌하여 늦잠자고 유치원 지각하고
태훈이는 어찌하여 이제 다섯 살인데도 바지에 오줌 싸는가
니들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나의 창작 모놀로그 : 햄릿 | 심어진(초등학교 5학년)

집행자: 반역자? 말을 하게 해주지 누구인가?

햄릿: 이 나라의 왕자이다.

집행자: 장난하지 마!

햄릿: 신분증을 보여 주지.

집행자: (신분증을 보자마자) 오! 왕자님, 여기에 왜?

햄릿: 급한 일이 있네.

집행자: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아이들과 공부하다보면 곳곳에서 이런 유머를 마주친다. 서당에서 <논어>를 배우고 있는 어진이 같은 경우는 서당에서 배운 걸 적극 써먹는다. 이 모놀로그에 의하면(!) 거트루드 왕비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한다. 그러나 황당한 건 햄릿이 어머니의 3년상을 치룬 후에 왕이 된다는 설정이다. 서양고전과 동양고전의 퓨전인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건 이거다. 배운 걸 재치 있게 자기 식대로 해석해보고 글에 자기 생활을 담아보라는 것. 배움과 생활을 적극적으로 이어보라는 요구. 이런 요구를 어른들에게 하면 어떻게 써야할지 당황해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이들은 일단 쓴다. 글을 잘 써야한다는 자의식도 없고 글에 몰입해서 쓰고 거기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런 예기치 않은 유머들이 곳곳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텍스트가 있고 배움의 공간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으면 거기가 현장이다. 이 현장에서 어른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도 중요하다. 인문학이 삶에서 얻은 지혜로 삶이 부딪히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학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각자 삶이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최근 개봉한 영화 <공자>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기 있어도 되나요?” 순장풍습이 있던 춘추시대에 순장을 거부하고 도망친 칠사궁이라는 소년이 한 말이다. 칠사궁은 병사들에게 쫓기다 팔에 독화살을 맞고 공자의 집으로 숨어든다. 칠사궁을 뒤쫓아온 병사들이 소년을 내줄 것을 요구하자 공자는 거절한다. 그리고는 조정에서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결국은 성공한다. 칠사궁이 이런 공자에게 감사의 절을 하며 하는 말이 바로 “여기 있어도 되나요?”다. 배우고 같이 생활하는 공동체였던 공자학파에 남아도 되냐는 말. 물론이다. 이 ‘현장’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곳이니까.

– 류시성(수유너머 구로)

응답 2개

  1. 느림말하길

    저도 여기 있고 싶습니다.

  2. 쿠카라차말하길

    음, 아이들의 현장 속에서 단단해진 글, 잘 읽었습니다. “여기 있어도 되나요”라는 말이, 참, 뭉클하게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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