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7호] 그곳에선 얼굴이 붉게 물든다(띠앙기스, 멕시코)

- 윤여일(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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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행서는 이렇게 권유한다. “떠나라!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꿈과 자유가 있을지니.” 하지만 그저 이국적이라면 외국의 장소는 일상의 감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차라리 내게 ‘마음의 장소’는 여행에서 일상을 만나고, 일상에 여행의 숨결이 입혀지도록 이끄는 곳이다. 나는 멕시코시티에 오면 띠앙기스를 기다린다.

띠앙기스는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띠앙기스는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서는 시장을 말한다. 그리고 나의 띠앙기스는 우암대학 소치밀코 캠퍼스 근처에 있다. 이곳 띠앙기스는 일요일에 선다. 어린 시절 만화동산을 기다리듯이 일요일은 들뜨는 날이다.

일요일이 되면 아침부터 천막이 세워지고 상점이 늘어서기 시작한다. 그 시간 나는 아침밥을 굶으며 띠앙기스를 기다리다가 정오 무렵에 나선다. 정신줄 놓으면 입 벌어지는 버릇이 띠앙기스에선 더욱 심해진다. 인파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다가 딱 봐도 불법복제품인 DVD에 저걸 사둘까 싶다가, 이것은 또 무슨 고기인가 싶어, 여기서도 똥집을 파는구나 싶어 기웃거리다가, 이런 자주빛 양파는 색깔이 곱기도 하여 발걸음을 멈춘다. 디자인이 맘에 드는 짝퉁 티셔츠를 몸에 갖다 대어본다. 아저씨 생선 다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다 작년에 넋 놓고 돌아다니던 나를 기억해주는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10페소를 주고 바나나를 한 다발 산다. 부산하고 풍성하고 따뜻하다. 어머니가 함께 오셨다면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언어의 제약을 무릅쓰고 여기서도 가격을 깎으려 하셨을까. 그렇다면 아들이 먼저 나서야지.

아시아계 동양인이 동네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노라면 나는 따뜻한 시선에 흠뻑 샤워를 한다. 웃음을 담아 상대는 묻는다. “치코(중국인)?” “노.” 여전히 웃음 담아 상대는 묻는다. “하포니스(일본인)?” 스무고개처럼 질질 끌려다가 내가 먼저 말해버린다. “노, 꼬레아노(한국인).” 그러면 또 묻는다. “델 노르테 오 델 수르?(북에서 왔느냐 남에서 왔느냐?)” 어떻게 용케 한반도가 두 나라로 갈라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사람들이 여기 오기가 좀처럼 힘들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마도 멕시코인에게는 남한보다 북한이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핵문제 등으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멕시코인들이 미국을 향해 갖고 있는 감정도 한 몫 할지 모른다. 반면 한국은 유명한 게 없다. 삼성, 엘지는 일본의 기업이라고 알고들 있다(외국자본의 것이긴 하다). 물론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2002년 월드컵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면 어떻고 한국이면 어떠랴. 북이면 어떻고 남이면 어떠랴. 그저 내게 보여주는 관심일 뿐인 것을. “약간은 멕시코 출신이기도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띠앙기스에 있으면 로사 멕시히노(rosa mexĭcana, 붉은색의 일종)의 천막이 하늘을 가린 탓에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붉게 물든다. 맞는 악센트인지 모르지만 ‘띠앙기스’라는 말을 꺼낼 때면 왠지 ‘띠’를 세게 발음하고 싶어진다. 그래야 제 맛이다.

–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3개

  1. 그저물처럼말하길

    갑자기 멕시코가 그립습니다. 저는 소치밀코에서 배를 타고 놀았는데…띠앙기스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야시장을 많이 다녔죠. 시장에서 가방도 사고 작대기를 중앙의 홈에 꽂아넣는 놀이기구도 사고 그랬는데….오랫만에 멕시코를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쿠카라차말하길

    정말, 여일이에게도 이런 섬세한 감성이 있구나, 있지! 나도 외국 여행가면 그 나라 시장이 제일 좋던데. ‘띠’앙스, 아, 함 가보고 싶다.

  3. 민지말하길

    글이 좀 말랑말랑해졌네. ^^
    근데 “약간은 멕시코 출신”이라는 말이 뭔뜻?
    다음에 보면 물어봐야지. ㅎㅎ;;
    여행 많이 다녔구나, 완전 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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