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이야기

[7호] ‘부동심(不動心)’,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다.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부동심(不動心)’,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다.

<부동심(不動心)> 香山刻

死時不動心 須生時事物看得破.(사시부동심 수생시사물간득파) 죽을 때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려면 모름지기 살아 있을 때에 사물의 참모습을 간파해야 하느니라. – <채근담(菜根譚)> 후집(後集) 26.

‘부동심(不動心)’에 관해 돌에 새긴 이야기를 마감해야 하는 날부터 그만 며칠 앓아눕고 말았다. 물 한모금도 마실 수 없고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나날은 정말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화장실 정도는 오갈 수 있었지만, 계획된 일정 모두를 아이들의 입을 통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병이 아니란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통스런 시간을 잘 견디기만 하면 다시 일어나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인지 내 자신을 돌아보건대 마음의 큰 동요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임종(臨終)을 앞두고 있는 경우라면 매우 달랐을 것이다.

임종(臨終)을 당하여 마음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경우에는 전혀 죽음을 생각지도 못한 어린 나이에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죽음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고자 살아생전에 생사(生死)의 진리를 철저히 깨닫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 올까. 더군다나 안심입명(安心立命)해 두어야 한다는 옛 선인들의 말을 따르자면, 천명(天命)을 깨닫고 생사(生死)ㆍ이해(理解)를 초월(超越)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재지변이 그러하듯, 어떠한 예측의 방식을 동원한다 해도 사람이 나고 죽는 것만큼은 되어가는 바 순리에 맡겨야 한다. 물론 아이를 출산하기에 놓은 시간을 받아서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옛날 같으면 숨을 거뒀을 사람을 인공호흡으로 살아 있는 시간을 연장하기도 하지 않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열심히 내세의 편안을 위하여 재물을 축적한다. ‘헌금’, ‘봉헌’이라는 이름으로 죽어서도 다시 살 하늘나라에 미리 부를 모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안전한 내세를 보장받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또는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 큰 고통 없이 살기 위하여 갖가지 보험을 든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자신을 간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는 비용 등이 포함된 노후자금을 준비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마음의 평안(平安)을 얻을 정도가 되려면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아 두거나 갖가지 보험 상품을 구매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사물의 참모습을 간파할 수 있는 통찰력을 혼탁하게 하는 절대적인 의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에 의지하면 할수록,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야 할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를 놓칠 것이기 때문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내세의 안심을 꾀한다는 것은, 사후의 자신만의 편안을 구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죽은 후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아끼고 사랑하던 누군가의 죽음을 담담하고 초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정도는, 운명을 달리한 사람의 살아생전의 언행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육신을 한 모습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죽음의 이별 앞에서 그리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온기가 도는 신체를 마주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맑스와 니체처럼, 구양순과 왕희지처럼,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전 그들이 살아생전에 이루어 놓은 세상의 이치와 높은 지혜,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은 현재 우리들의 주변의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생생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우리를 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수 천 년, 수 백 년을 살고 또 살아 지금 현재 우리와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아름답고 고귀하고 명예롭게 산다면, 그만큼 아름답고 고귀하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이 아니겠는가?

篆刻 돋보기

‘자인(字印)’은 사인의 한 종류로서, 그 사람의 ‘덕의(德義)’ 즉 그 사람의 덕을 나타내므로 표자(表字)라고도 한다. 한대인(漢代人)은 거의가 이름은 1자였다. 3자인의 경우는 2자가 성(性)이 아니고 1자가 성이고 2자가 자(字)인 것이다. 또 끝에 ‘印’자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은 ‘명(名)’을 나타낸 인은 아니다. 자인에는 ‘인’자를 붙이고 있지 않으므로 자인과 성명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마옹▢(司馬翁▢)> / <전궁마소공(田宮馬少公)>

<장의마(張宜馬)> / <자장경(字長卿)>

자인에는 그 위에 성을 넣어서 ‘▢◯◯’로 하거나 위에 ‘字’자를 넣어서 ‘字◯◯’라고 한 것이 있는데 거의가 양면인(兩面印)이다. 당대와 송대에는 자인에서 주문(朱文) 2자가 올바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의 아래에 ‘氏’자를 넣어서 ‘▢氏◯◯’, 예를 들어 ‘趙氏子昻(조씨자앙)’과 같이 한 것이 있다. 보통 이러한 것은 회문(回文)으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자의 아래에 ‘氏’나 ‘父(보)’자를 넣어서 ‘◯◯氏’라든가 ‘◯◯父’라고 한 것이 있으나 이것은 모두 명대나 청대에 위조한 것이라고 한다. ‘父’(보)는 ‘甫’아 같은 발음으로 같은 뜻이며 남자의 미칭(美稱)이다. 자의 아래에 ‘父’자를 넣으면 자신이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호칭을 붙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인에서는 ‘◯◯氏’라고 하는 것은 좋으나 ‘◯◯父’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응답 3개

  1. 향산말하길

    앗.. 부끄럽습니다.
    이미 다 나아서 오늘 관악산에도 거뜬하게 다녀왔습니다.

  2. 쿠라카라말하길

    많이 아프시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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