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8호]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2009, 황철민)

- 편집자

씨네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2009, 황철민)

‘88만원 세대의 삶’,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최근의 한국독립영화에서 이 두 가지 삶의 모습은 빈번하게, 그리고 꾸준히 등장한다. 당연한 일이다. 동시대적 삶을 호흡하고 그 속에서 창작의 동력을 얻는 것이 ‘독립영화’의 존재 이유라면, 그 두 가지 삶의 모습은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그 두 삶의 모습은 더 이상 ‘예외적 개인’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900만, 전체 노동인구의 55%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고용유연화의 천국이라는 미국보다 고용불안정성이 더 높고, 근속연수는 훨씬 짧고, 고용불평등이 더 심한 나라, 어느 덧 한국은 전 세계적인 자본의 유연화 전략의 흐름 속에서 미국을 따라잡은 ‘선진국’이 되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만의 일이다. 정말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른 나라다. 이 현기증 나는 속도 속에서, 언제나 삶은 ‘불안’하다. 더욱이 그 흐름은 잠정적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갈수록 가속도가 붙을 것이 확실하다. 이 ‘불안 시대’에 성인으로서의 삶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존재, 그들이 바로 ‘88만원 세대’이다. 그래서 그들의 다른 이름은, ‘불안세대’이다. 그들 대다수는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의 형식과 불안한 삶을 정상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 영화’와 ‘비정규직 영화’가 정확하게 겹치는 것은 아니다(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88만원 세대의 대부분(적어도 독립영화의 대상이 되는 그들 중 대부분)이 ‘비정규직’ 범주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 영화’와 ‘비정규직 영화’는 범주적으로 구분된다. 우리에게 전형으로 다가오는 ‘비정규직 영화’는 최근에 빈발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을 다룬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이다(가령, <평촌의 언니들>, <외박> 등). 그 영화들을 보면, 그 저항과 투쟁의 중심에 있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아니라, 그보다 앞선 세대, 즉 그들의 ‘언니들’이나 ‘엄마들’이다. 반면 ‘88만원 세대 영화’ 속에서 그들은 저항하거나 투쟁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방황하거나 질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88만원 세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흔치 않은 영화다. 중학교 때부터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던 24살의 진희(성수정)는 ‘백화점에서 편의점으로’ 전전하다가 ‘생산직’ 비정규직 노동자(‘기웅전자’)로 일을 하게 된다.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비정규직 불법해고투쟁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투쟁 현장에서 이탈한다. 길거리를 방황하던 그녀의 발걸음은 자신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중학교 교정에 이르고, 결국 그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함께 배우의 꿈을 나눴던 예진(이혜진)을 찾아가게 한다. 예진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배우의 꿈을 접고 대기업 비서실에 취직하여 단조롭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중이다. 그녀의 일상은 삼성동에 있는 사무실, 군자동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지하철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의 유일한 외출은, 퇴근 후 찾아가는 동물원이다. 영화는 이렇게 ‘길 잃은 양 두 마리’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10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정말 꿈같은 며칠을 보낸다. 그녀들은 함께 중학시절의 정서와 몸짓을, 그 시절 함께 나누었던 연극적인 방식을 통해서, 되찾는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는 진희의 모습(잘 때마다 악몽을 꾸는 듯 이상한 잠꼬대를 하는 진희)에 예진이 불안을 느끼면서 그 달콤한 꿈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고, 끝내 진희가 예진이 선물로 준비한 ‘기웅전자’ MP3를 내던지면서 “넌 악덕기업과 공범”이라고 내뱉는 순간, 둘 사이에는 넘기 힘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영화는 남루한 천막농성 현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카메라로 시작해서, 눈 덮인 겨울 산의 어떤 계곡으로부터 서서히 뒤로 물러나는 카메라로 끝이 난다. 고단하고 절망적인 생존 현장에서 서정적인 겨울 산 풍경 속으로의 여정. 영화가 그 두 이질적인 공간의 매개로 선택한 것은 안톤 체홉의 희곡 ‘세 자매’이다. 이 매우 경제적이고 문학적인 설정은, 그런 만큼 매우 안이한 선택처럼 보인다. 세 자매가 꿈꾸던 ‘모스크바(이것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기도 하다)’가 단지 ‘과거의 이상향’이 아니라 ‘미래의 그것’일 수도 있다고 ‘선언’되는 순간, 영화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가 된다. 과연 이 익숙하고 상투적인 감정에 ‘위로’나 ‘희망’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 진희는 왜 갑자기 ‘배우의 꿈’을 포기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야”라는 예진의 현실적인 충고에 대한 뒤늦은 승인일 수 있다. 하지만 예진이 하는 충고의 진짜 현실성은 차라리 “검정고시를 보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라”는 그 다음 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희는 매우 비현실적이게도 ‘투쟁현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오디션을 볼 사람은 너야. 난 돌아가야 할 데가 있어”). 그녀는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 영화가 그녀에게 거는 바램이고, 더 심하게 말하자면, 영화가 그녀에게 내리는 일종의 심판이다. 아마도 그것은 386세대가 ‘불안세대’에 대해 품고 있는 어떤 ‘불안’의 징후일 것이다.

사실, ‘88만원 세대 영화’라는 것은 매우 모호하고 애매한 범주이다. 해마다 만들어지는 독립영화의 대다수는 바로 그 ‘88만원 세대’가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년이라는 생애 주기적 불안과, 시대가 강요하는 삶의 불안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는 ‘시절-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당연히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넓게 보면 ‘88만원 세대’라는 자의식을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이유 없는 방황(반항이 아니다)의 영화’조차 ‘88만원 세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대의 모습은 그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영화만큼이나 모호하고 애매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때로는 그들은 주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대한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분열증’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가령, <덤벼라 세상아>), 때로는 살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법의 부조리를 배우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가령, <다시, 삶으로>).

최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영화들 속에서 ‘88만원 세대’라는 자의식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이 경향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영화들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탐문의 과정과 영화 만들기 과정은 하나가 된다(가령, <알바당 선언>, <청춘을 돌려다오>, <개(開)청춘> 등).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진지하고 묵직하지만, 그 탐색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나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의 고전적인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보다는, 그 가볍고 경쾌한 탐색의 발걸음 쪽에 ‘내기’를 하고 싶다.

– 변성찬

응답 2개

  1. lumiere말하길

    ‘양’과 ‘꿈’. 그리고 ‘꿈’과 ‘꿈’.
    불안을 살고있는 88만원 세대라고 할 수 있는 한 청년입니다.
    영화에 대한 소개와 담론 잘 읽었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꼈으면 좋겠네요. 이제 더 이상 비정규직화와 실업 문제가 청년들의 눈높이나 능력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소수의 권력가와 자본에 의한 먹이사슬의 희생화라는 것을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노동’을 고통이 아닌, 결실과 기분좋은 노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2. 박혜숙말하길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감정에 위로나 희망을 부여할 수 없다.”는 표현이 맘에 확 다가오네요.
    멋진 평 잘 읽었습니다. 다음 번에 ‘가볍고 경쾌한 탐색의 발걸음’도 소개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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