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8호] 막시몽, 종교와 세속성 사이(안티구아, 과테말라)

- 윤여일(수유너머R)

안티구아의 풍경이다. 가까이의 아구아 화산이 도시의 모습과 어우러져 있다.

안티구아는 걷기 좋은 도시다. 오래 걷자니 발의 피로보다는 배의 허기가 먼저 찾아왔다. 마침 한국음식점을 발견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얼마만의 한국음식인지. 메뉴를 물을 것도 없었다. 김치찌개를 시켰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허기를 달래니 이제 힘이 붙어 잠시 도시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게 주인께 여쭤보니 커피 박물관과 안티구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동산을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커피 박물관은 이제 자리를 떠서 도착할 무렵이면 문이 닫힐 것이고, 동산은 도둑이 있을지 모르니 웬만하면 해질 무렵에는 피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막시몽(Maximón)의 신당(Cofradía)이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귀가 솔깃했다. 실은 파나하첼에서도 내가 묵었던 옆 마을로 배를 타고가면 막시몽의 박물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 서점에서는 표지가 심상치 않아 들춰보니 막시몽에 관한 책이었다. 자꾸 그 이름을 접했다. 안티구아에서라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중교통 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거나 게스트 하우스에 비치된 책을 읽거나 인터넷으로 알아보며 그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파나하첼의 한 서점에서 발견한 책의 표지다.

막시몽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는 첫째 기괴하게 생겨서다. 막시몽은 성자인데 하고 있는 모습이란 게 영락없이 사기꾼이다. 약간 치켜뜬 눈에 매부리코와 뾰족한 턱, 거기에 콧수염과 비딱한 중절모까지 더해지면, 후덕한 인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옷차림은 대개 검거나 현란한 슈츠, 거기에 파이프마저 물고 있다. 딱 보면 토속 캐릭터 상품인데, 과테말라에서는 위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게 흥미를 갖게 된 두 번째 이유다. 막시몽은 현세에서 이익을 안겨다주는 신으로 추앙받아 국가적인 종교행사에도 참여한다. 가톨릭에 버금가는 자리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기원이란 게 영 모호하다. 자료조사를 하다가 막시몽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세 번째 이유인데, 막시몽이 누군지 어떻게 출현했는지 그 설은 몹시 분분하다. 먼저 마야 수뚜일(Tzutuhil) 부족의 수호자라는 설이 있다. 그 수호자는 아띠틀란 호수 근처의 생명들을 돌보아주던 존재였다. 이런 설과는 격이 안 맞게 원래는 스페인 출신의 부자였거나, 뜻밖에도 스페인의 정복자 뻬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또 있을 법한 설로 막시몽은 원래 스페인에 대항한 마술상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성별을 바꾸며 상대를 달콤한 사랑의 속임수로 상대를 꾀어내 우롱하는 큐피드와 같은 존재라는 설도 곁들어진다.

이밖에도 알아보지 못한 여러 설이 있겠지만, 딱히 어떤 정설이 있다기보다 여러 설이 한데 섞여 막시몽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그리고 막시몽이 그리스도교(내지 스페인적인 요소)와 토착신앙의 혼합, 즉 신크레티즘(Syncretism)의 산물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막시몽 말고도 이번 여행길에서는 여러 곳에서 혼합종교의 흔적을 보거나 들을 수 있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과달루페 성모가 그러하며, 멕시코의 에스끼뿔라스(Esquipulas)에 있는 검은 그리스도상도 그러하다. 신들을 위해서 기꺼이 인간이 목숨을 바치던 인디오 세계에서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신은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과달루페 성모와 검은 그리스도상은 그 만남이 수백년의 시간을 거쳐 발효되어 나온 산물 가운데 한 가지다.



검은 그리스도상 / 과달루페 성모상

거기에는 또 이런 장면도 포함된다. 멕시코의 토난친틀라(Tonantzintla)에는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다. 황금이 입혀진 흰색 건물이다. 성당의 내부에는 열대과일과 꽃이 장식되어 돔 지붕의 정상을 향해 무한한 풍요의 꿈을 갈구하듯 뻗어 올라간다. 그리고 벽화에는 천사와 악마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인디오들은 천국을 향하는 순진무구한 천사로, 스페인 정복자들은 두 개의 혀를 지니고 붉은 털로 뒤덮인 악마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정복자는 정복당해 인디오들의 낙원은 최후의 심판에서 회복된다.



산타마리아 성당의 내부 장식이다.

막시몽도 혼합종교의 색채가 짙다. 가령 막시몽의 축제일은 카톨릭의 부활절 주간과 겹친다. 그래서 과테말라에서는 성금요일에 그리스도의 성상의 뒤를 따라 막시몽의 성상도 함께 행렬에 나선다. 그런데 막시몽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이유는 막시몽에게는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란다. 왜 하필이면 열 두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상상해보는 일로 족했다. 아마도 그 내력을 좀 더 자세히 추적해보아도 과거 누군가의 흥미로운 상상력과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과테말라에는 막시몽의 신당이 무려 3만개소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테말라인만 오는 것은 아니어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나 니카라과 등 이웃나라와 멀리서는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온다. 신당은 밖에서 보면 평범한 가정집인데, 문 대신 출입이 자유롭도록 대개 거적이 달려있다. 신당 안으로 들어가면 창이 따로 없어 어두컴컴하다. 듣고 읽은 이야기이지만 이미지가 그려진다. 천장에는 요란한 종이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실내는 향연기로 자욱한 가운데 막시몽 상이 중앙의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이따금 곁에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가시면류관을 쓴 채 무덤 속에 안치된 그리스도의 상이나 가롯 유다 상, 과달루페 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한 쪽에 신도단들이 앉아 있다. 간혹 3인조 밴드가 대기하기도 한다.



보통 선물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막시몽의 나무조각이다.

물론 신당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목욕재계가 아니라 입장료가 필요하다. 보통 10깨찰, 그리고 제사를 지내면 20께찰이 추가되고, 무당(Sacertode mayan)에게는 사례비로 25께찰이다. 전에는 무당이 꽤 많은 수입을 올렸는데, 요즘에는 경쟁이 심해져 전만 못하다는 후문이다. 자, 이제 신자는 막시몽에게 다가가 엽궐련이나 담배를 물린다. 기도를 드리는 동안 자기도 태울 수 있다. 이제 준비해온 술을 꺼내 무당에게 주면 무당은 그 술을 신자의 온 몸에 뿌린다. 성스러움을 값으로 따지랴. 성수, 아니 성주(聖酒)는 동네슈퍼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리고 신자는 새전(賽錢)을 막시몽의 가슴에 묻고 기도를 올린다. 그 동안 무당은 신자의 몸 구석구석과 막시몽의 무릎에 깔린 타월에도 술을 뿌려댄다. 타월이 흥건히 젖으면 타월을 다시 신자의 머리 위에서 짠다.

그리고 이제 초에 불을 붙인다. 초는 여러 색깔이 있다. 아무 색깔에나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 색깔마다 의미가 다르다. 빨강색은 연애, 파랑색은 일, 하늘색은 공부, 흰색은 사업, 장밋빛은 건강이다. 그리고 검은색은 상대에게 재앙을 안기는 저주의 색깔이다. 여기까지 자료를 조사하다가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설퍼서도 엉뚱해서도 아니었다. 차라리 수긍이 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목사님들이 맥락 없는 “인류 평화” 운운이나 수능이 끝나고 나서 “모든 수험생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앵커의 빈 소리보다 저 몸부림과 저주는 얼마나 더 현실적이며 또 인간적인가.

–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2개

  1. 평강말하길

    안티구아~
    날마다 광장에서 물건팔러온 인디오 아주머니와 그 아이들과 놀았는데…
    에스뚜와르도 그립고, 물처럼 마시던 커피도…
    사진을 보니 너무나도 그립네요~

  2. 북극곰말하길

    우왕 사진 진짜 대땅 짱이당. 저도 가보고 싶어지는 여행기 넘 잘 봐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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