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8호] 나에게 투창이 되어 날아온 문장 – 최윤영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요즘에는 청년이 유행어다. 입을 열면 청년,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하지만 청년이라고 해도 일률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수상태에 있는 자, 엎드려 있는 자, 놀고 있는 자와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을 지향하는 자도 있다.

전진을 지향하는 청년들의 대부분은 지도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라고. 오히려 찾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 자기 스스로 지도자입네 하고 금간판을 달고 다니는 지도자를 왜 청년들이 찾을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내 이것이야말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좋다. 제군에게는 넘치는 힘이 있다. 밀림에 부닥치면 밀림을 채벌하고, 광야에 부닥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에 부딪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무엇을 찾지 못해 가시덩굴에 막혀버린 낡은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냄새가 분분한 속물 지도자를 찾으려고 하는가!” (<지도자> 중에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근본 사상은 사람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루쉰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특히 그는 꽉 막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들어내지 못하는 ‘낡은 길’을 걷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넘치는 힘으로 한 걸음씩 스스로 내딛어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위의 글을 쓰는 당시 루쉰은 전진을 지향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졌다. 그들은 어떤 상황과 부딪쳐도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예를 들어 “밀림과 부닥치면 밀림을 채벌하고, 광야와 부닥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에 부딪치면 사막에 우물을” 팔 수 있는 자들. 루쉰은 자신이 희망을 품었던 그 청년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자신들을 지도자에 종속시켜서 노예가 되지 말라고. 자신의 힘을 낡은 길을 추종하는 데 낭비하지 말라고.

루쉰이 생각할 때 구습의 굴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지닌 자,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자야말로 진정한 삶의 주인이다. 루쉰은 이런 자를 ‘전사(戰士)’라고 말했다. <전사와 파리>라는 글에서 보면 루쉰은 전사와 파리를 구분한다. 결점이 있더라도 전자는 전사이며 완전하더라도 파리는 그냥 파리이다. 이유는 전사는 불완전하고 결점과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가지만 파리는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금간판’을 추종하며 남들의 삶을 잘 따라하는 노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루쉰이 살아 있었다면 21세기 청년에게도 이런 질문을 했을 것 같다. 당신은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당신은 벗과 함께 길이 없던 곳을 밟고 지나가며 자신이 만든 길을 갈 것인가,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잘 닦인 낡은 길을 걸어갈 것인가?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린다.”(<隨感錄 抄> “작은 자에게” 중에서) 머물지 말고 나아가라. 가는 곳에 길이 있나니!

선택은 본인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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