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8호] 나에게 투창이 되어 날아온 문장 – 근영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풍상에 시달린 영혼은 사납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영혼을 사랑한다. 형태도 색도 없이 생생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사나움에 나는 입을 맞추고 싶다. 가엾는 이름난 정원에 진귀한 꽃과 풀이 만발하고, 두 뺨이 발그레한 숙녀는 뜬 세상 아랑곳없이 이리 저리 거니는데, 외마디 학 울음소리에 흰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물론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TV속 광고에 나오는 집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든다. 그렇게 곱고, 깨끗하고 이쁠 수가 없다. 어디에도 벌레 먹은 단풍잎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름이면 거추장스런 파리나 모기도 거기에는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한없이 비루해 보인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싶다.

노신은 아름다운 황홀경과 삶을 맞바꾸려 하지 않았다. 진귀한 꽃이 만발한 정원. 팔랑팔랑 옷깃을 흔들며 거니는 아리따운 여인. 아련한 구름 속을 나는 학. 그런 것들에서 쾌적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지친 자의 위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식의 삶은 없다. 모든 것들이 한결같이 아름다고 조화롭기만 한 삶이란 것은 없다. 누구보다 삶을 사는 당사자인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자꾸자꾸 그런 것에 기대게 된다. 희망이란 이름으로. 하지만 그런 희망은 환타지일 뿐이다. 잊어야 할 것이 있다면 차라리 희망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몹쓸 것이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은 환타지가 된 희망을 불러올 뿐이다. <나그네>에서 노신은 들백합과 들장미가 핀 무덤으로 가는 나그네를 그린다. 무덤에 꽃이 피었다고 무덤이 아름다운가? 그렇다고 무덤가의 꽃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걸어야 할 곳이 있다면, 길을 내야 할 곳이 있다면 여기다. 노신은 삶에 대한 어떤 환타지도 용납하지 않는다. 노신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인간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피흘리고 고통을 참아 가는 이 혼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인간 세계에 있음을, 인간 세계에 살고 있음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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