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8호] 스승이 필요없는 자와 스스로가 스승인 자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루쉰과 이광수
스승이 필요없는 자와 스스로가 스승인 자

1909년 일본에서 귀국한 루쉰은 항주와 절강에 있는 두 사범학교에서 생리학과 화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이듬해 고향인 소흥부 중학교의 교사로 취임했다가 중화민국정부가 수립되던 해 산회초급사범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12년부터 17년까지 잠시 공백이 있었지만 교육부 직원으로 일하다가 1920년부터 베이징대와 베이징여자고등학범학교에 출강했고, 1926년에는 하문대에서 1927년에는 중산대 문과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년 가까이 그는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죽기 직전까지 잡지와 신문을 통해 사회를 계몽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며 젊은이들과 일반인들의 선생노릇을 해왔다. 나이 서른 이후 루쉰에게는 계속 ‘선생’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다. 그의 시대는 많은 선생을 필요로 했지만, 제대로 된 선생은 오히려 드물었고, 누구보다도 루쉰 스스로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진하려는 청년들은 대체로 스승을 구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앞으로 영원히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불민하다고 사양하는데,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은 과연 정말 길을 알고 있는가? 대개 스스로 길을 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립(而立)’의 나이를 넘겼을 것이므로 어지간히 회색적이고 어지간히 늙은 티를 내며 원만할 뿐인데도 스스로는 오히려 길을 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령 정말 길을 안다면 스스로가 벌써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 테니 어찌 스승노릇이나 하고 있겠는가….청년들은 또 어째서 하필 황금 글씨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스승을 찾는단 말인가? 친구를 찾아서 연합하여 함께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대들은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깊은 숲을 만나도 평지로 일굴 수 있고, 광야를 만나도 나무를 심어 재배할 수 있고, 사막을 만나도 우물과 샘을 팔 수 있다. 가시덤불이 꽉 들어찬 낡은 길을 물어 무얼 하겠으며, 암담한 빌어먹을 스승을 구해 무얼 하겠는가!(<스승>)

중국에는 대개 청년들의 ‘선배’와 ‘스승’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아니며 나도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문제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달려 있다.(<무덤후기>)

선생은 배우는 자, 혹은 후대의 사람들의 모범으로, 삶의 길을 앞에서 열어가는 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와 윤리를 제안하고 앞에서 실천하는 자들이다. 루쉰에게 있어 스승이란 적어도 중국에 새로운 종류의 지식과 문명을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근대적 인간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단순히 지적 능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에게 있어 근대적 인간이란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실질적 능력과 새로운 윤리감각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신문물을 경험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여 청년들 앞에서 선생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출세욕에 청년들을 이용하려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 역시 알량한 것으로 청년들을 분발케 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간판’에 눈이 멀어 있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루쉰은 말한다. 스승을 찾으려하지 말고 차라리 친구를 찾아서 연합하라고.

춘원(春園)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났다. 열 살 즈음에 조실부모하고 박찬명 대령과의 인연으로 동학에 들어갔다가 1905년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을 다녔다. 1910년 일시 귀국,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했다.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가 된 시기의 심경을 이광수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도쿄서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를 그만두고 돌아온 이유는, 공부는 더 해서 무엇 하느냐, 나는 벌써 최고 지식에 달한 것이 아니냐, 나는 벌써 인생관과 우주관을 완전히 가진 것이 아니냐 하는 시건방진 생각 때문이었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인생을 다 알고 난 사람과 같이 초연한 듯, 인생에 피곤한 듯한 그러한 태도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제는 내가 무엇을 배울 때가 아니요, 남을 가르칠 때라고 자임하였다.”(<그의 자서전>)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하다가,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했고,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처음 선생노릇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생하던 소년 이광수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주위의 도움만으로 이른 나이에 당시 조선의 선생이 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1908년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잡지를 통해 소년들을 계몽하는 글을 쓰고, 유학생 잡지에 논문을 발표했을 때 이광수는 이미 조선의 ‘어린 선생’이었다. 새로운 근대적 지식과 문명을 경험한 신지식인들이 많지 않았던 당시 상황 속에서 이광수의 수려한 용모와 달필은 그 자체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쉰과 마찬가지로 이광수에게도 한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고독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자기 시대를 새롭게 보고 규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전시대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달라진 세상에 적합한 인간형을 창조하는 일이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였고,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자로서의 스승 역할을 스스로 자임했다.

우리들 청년은 피교육자 되는 동시에 교육자 되어야 할지며 학생 되는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할지라. 상언컨대, 우리들은 학교나 선각자에게서 배우는 동시에 자기가 자기를 교도하여야 할지요, 학교나 기타 교육기관에 통어함이 되는 동시에 차등 기관을 운존하는 자기 되어야 할지라. 인격 수양 상에도 그러하고 학예 학습상에도 그러하고, 무엇이든지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나니….이를 잊지 말아서 소극적으론 반성으로 자기의 정신을 타락하지 않게 주의하며, 적극적으론 수양으로 우리의 정신을 향상 발전케 주의하여, 자기가 수양하여서 신대한 건설자 될 제1세대 국민이 될 만한 자격을 양성케 할지라.(<금일아한청년의 경우>)

그런데, 이광수가 자기 스스로를 조선의 선생으로 자임하게 된 것과는 별개로 당시 조선의 상황은 학생도 선생도 태부족이었다. 어른들은 믿을 만하지 못했고, 결국 청년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주체가 되기 위해 선생노릇도 하고 학생노릇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신대한의 건설자 될 제1세대 국민이 될 만한 자격을 양성’하기 위해서이다. 이광수의 이러한 ‘학생 즉 스승’론은 한일합방 이후 내용상 굴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창되는 일본 청년들과 많이 다릅니다. 그들은 정돈된 사회, 구비된 사회에서 났어요. 그네들에게도 파괴할 것이 있고 창설할 것이 있지만 수성할 것이 더 많아요. 그러나 우리는 어떠하오? 우리는 만사만물을 다 창조해야 할 것이외다. 우리의 자손이 수성케 할 모든 것을 다 창조해야 할 것이외다. 그러므로 일본 청년은 학자가 되고 사업가가 되면 그만이로되 우리는 선지자가 되어야 하고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외다(<네책임>, <학지광>15호)

일본 유학생 학회지에 실렸던 글이다. 합방 이후에 쓰여진 것이고, 일정한 열패감 속에서 도 청년의 임무를 강조하는 것인 만큼, 교사로서의 임무가 강조되어 있다. 당시 유학생들 중 비교적 깨어있는 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자각의식이었다.

이광수의 ‘교사론’의 핵심은 <무정> 속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광수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교사의식으로 무장해 있는 이형식은 모슨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생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에게는 연애도, 사업도, 직업도 모두 교육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형식과 두 연적이 둘러 앉아 조선을 위해서 일하자고 다짐하는 장면은 백미이다.

루쉰은 청년들에게 스승을 구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청년들의 스승이었다. 북경여사대사건을 접하며 학생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루쉰은 학생들을 위해 앞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기만적인 교사들과 권력자들을 향해 예리한 필봉을 휘둘렀다. 당시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현실에 대한 불평은 털어놓되 현실을 비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항전을 계속해나가더라도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루쉰의 편지> 1925.3.18)

한 사회의 스승의 자리를 자처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던 루쉰은 청년들이 자신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

기로에 서 있으면 발을 내딛기가 어려울 것이며, 네거리에 서 있으면 갈 수 있는 길이 너무 많습니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은 나 자신의 것이니까 나는 큰 걸음으로 스스로 걸어갈 만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도 무방합니다. 설령 앞에 심연이 있고, 가시밭길이 있고, 협곡이 있고, 불구덩이가 있어도 내 스스로 짊어지면 됩니다. 그렇지만 청년들에게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그래서, 나는 끝내 청년들에게 내가 가는 길을 함께 가자고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와 처지가 서로 다르고, 사상의 귀착점도 아마 일치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만일 나에게 청년들이 반드시 어떤 목표를 향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마련해놓은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첫째 생존하는 것이요, 둘째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것이요, 셋째 발전하는 것입니다….이른바 생존이란 결코 구차한 생활이 아니며, 이른바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며, 이른바 발전도 방종이 아닙니다.(<북경통신>)

삶에 대한 루쉰의 태도는 구체적이다. 그는 청년들에게 꿈과 이상을 먹고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가장 구체적인 생존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는 그것을 둘러싼 온갖 비리와 불의로부터 청년을 보호하고자 한다. 물론 루쉰은 청년들을 양육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들 스스로가 목표를 정하고 생존하면서 발전해 나가야한다고 말한다. 청년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일관된 것이다. 그는 섣불리 가르치려하지 않으며 자신의 지식이나 삶의 방식을 강요하려 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당시의 많은 청년들은 루쉰을 존경했고 그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권용선(수유너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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