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창간호] 문인300명, 우리시대 슬픈 자화상 그리다

- 편집자

작가선언6·9 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문인300명, 우리시대 슬픈 자화상 그리다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는 ‘작가선언 6·9’의 두 번째 책이다. 지난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을 접한 후 우리는 한동안 충격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충격의 정체와 기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총체적으로 상실된 시대를 살아야 하는 황량함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87년 체제가 상징하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개발의 논리를 앞세운 국가권력과 자본의 대공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황량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우리들 대부분이 그 시간을 끔찍한 불행의 시간으로 경험해야 했고, 그 경험의 기원에는 지난 20년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국가권력이 있었다. 그렇게 긴 시련의 시대가 예고되고 있을 즈음 몇몇 작가들이 시국선언을 제안했다. ‘선언’이라는 낡은 형식의 적실성을 떠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발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선언’이 투쟁의 종착지가 되어버리는 관행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몇몇 작가들의 발의로 시작된 모임에는 불과 십여 일만에 300명이 넘는 작가들이 동참했다. 이제까지 문학계의 선언 대부분은 작가회의 같은 조직과 단체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념이나 작품 경향의 동질성은 물론, 상부에서 하부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행해지기가 일쑤였다.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시국선언의 대다수는 이념의 공유가 특징이며, 선언의 주체인 ‘단체’가 각각의 문인들을 대의하는 형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선언 6·9’의 이름으로 모인 작가들의 이념과 경향은 선명한 구호 몇 개로는 봉합하기 어려울 만큼 제각각이었고, 실제로 우리는 대의적인 방식을 피해서 개별 작가들 모두가 선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시국선언을 기획했다.

문학이 법과도 싸워야 하는 시대

‘작가선언 6·9’가 시국선언을 할 무렵, 사회 곳곳에서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법’의 이름을 빌려 자행되고 있었다. 참여정권에서 임명되었던 여러 문화단체의 수장들이 연달아 해임되었고, 곧이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파면과 폐과 이야기가 들려왔으며, 2009년 1월에는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강제철거에 항의해 농성을 하던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불에 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작가선언 6·9’는 여러 방향으로 진로를 모색하던 중 용산참사 소식을 접하고 이 사건에 대해서 개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합법적인 법 집행과 공권력 행사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이 폭력적인 죽음 앞에서, 성장과 개발의 욕망만 있을 뿐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는 이 정권의 파렴치함 앞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글을 쓰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싸움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몇몇 온라인 매체에 용산에 관해서 릴레이 기고를 했고, 용사참사의 현장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했으며, 홍대 앞 북카페에서 우리들 문학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용산참사와 관련한 북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모든 일들에 참여한 작가들의 속내가 정확하게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용산이라는 비극의 현장이 요란한 가십거리들에 파묻혀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기를 원하지 않고, 재개발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난민적 상황이 용인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며, 정당한 생존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법의 이름으로 짓밟는 법의 폭력을 좌시할 수 없다는 데에 뜻을 함께 했다. 이 싸움을 시민 의식의 발로 정도로 기억해도 좋다. 또한 용산 철거 현장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용산’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자 이른바 중산층의 욕망의 맨얼굴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산참사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가난한 자들의 삶과 그들의 불행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망각된다는 것, 다시 말해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말이 되지 못하는 목소리, 바쁜 걸음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에 그들의 삶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의 최대 불행이다. 누가 그들을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은 여백이 많은 책이다. 시, 산문, 칼럼, 만화, 목판화, 그림, 사진처럼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 다양한 방식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시인, 소설가, 평론가, 사진작가, 만화가, 가수 등이 용산참사와 관련한 저마다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균질성보다는 이질성이, 조직적인 면보다는 우발적인 성격이 훨씬 강한 이 책은, 그러나 ‘작가선언6·9’의 실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오늘날 ‘문단’이라는 문학적 제도는 크고 작은 매체를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고, 작가들 또한 인간적인 유대관계에 의해 나뉘어 있다. 문학적 경향과 이념이 다르고, 친소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작가선언6·9’는 이 제도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느슨한 문턱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이외의 어떤 조건도 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조직적인 일체감을 강요하지 않았고, 모임 자체를 민주적인 과정으로 꾸려나감으로써 기존의 문인단체들과 차별성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이 모임에는 대표성을 띠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이 취재를 위해서 대표를 찾을 때마다 우리는 얼마다 당황해야 했던가.

우리는 동일성의 맹목이 아니라 이질성의 힘을 실험하고 싶었다. ‘우리’라는 말 속에 ‘우리’라는 집합적 호명이 무색해지는 순간까지 다수의 ‘나’를 집어넣는 일, 그럼에도 ‘나’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성하는 일, 무수한 ‘나’들이 모두 ‘우리’의 대표가 되게 하는 일, 이를 위해서 우리는 너무 가까울 필요도 없었고, 서로의 동질성을 매순간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수의 별들이 제 고유의 빛을 잃지 않는 성좌처럼 책을 쓰고 모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목표이다.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에 이 이외의 어떤 말이 필요할까.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문학과 정치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 고봉준 (문학평론가)

응답 1개

  1. 온고지신말하길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예전에 조세희 작가가 난쏘공 100쇄 출판 기념 인터뷰에서 ‘아직도 이 책이 읽힌다는 것은 아직도 난장이들이 이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거 같은데, 이 책 또한 그런 암울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쪼록 문학을 통해 소외된 분들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