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8호] 루쉰과의 만남, 적막 혹은 진보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루쉰과의 만남, 적막 혹은 진보

“생각컨대, 나 자신은 아직까지도 간결함이 치밀어 저절로 말로 되어 나온다는 식의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무렵 내 적막의 슬픔을 잊을 수 없는 탓이어서인지 때로는 뜻하지 않은 납함이 입에서 나올 때가 있는데, 그나마라도 적막 가운데를 돌진하는 용사로 하여금 그가 안심하고 앞장서 달릴 수 있도록 다소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 납함의 자서 中

1. 적막의 한가운데

‘나도 젊었을 적에는 많은 꿈을 꾸었다.’

루쉰의 <납함> 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한 그것들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던 청년시절의 루쉰이 있다. 유년시절, 그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맹신하는 ‘속임수’ 전통 의학에 회의를 느끼고, 정말로 사람을 구할 요량으로 일본의학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의학으로는 “정말로”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장의 사진, 즉 무의미한 본보기와 그 구경꾼일 뿐인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그는 의학을 버리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루쉰은 또 다시 벽에 부딪혔다. 적막이라는 벽에. ‘낯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친 뜻이 상대방에게 아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경우, 찬성도 반대도 아닌 경우, 마치 끝없는 벌판에 놓여진 것과 같이 무슨 방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가 느낀 바를 적막이라 이름 하였다.’

그의 적막을 접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전태일이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더 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또 한 명의 인물. ‘나는 기업주들만이 아니라 근로감독관, 노동청 아니 그 이상까지도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 현실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기를 도대체 어떻게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저들 모두를 상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저 현실의 벽은 도대체 얼마나 두꺼우며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가?’ (전태일 평전, 183)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이 너무 화가나 한발씩 문제에 다가설 때마다, 전태일이 느낀 것은 더 높고 두꺼운 벽이었다. 결국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서야 할 상대는 아무리 소리쳐도 도무지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 사회 전체, 즉 적막이었다.

항상 열심히 공부했지만 언제나 공부에 목마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죽음까지도)를 다 사용해 외로이 ‘적막 가운데를 돌진한 용사’ – 전태일이 루쉰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적막임을 알면서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절망하거나 냉소하지 않으며 자신의 위치에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루쉰을 말이다. 아직 적막 앞까지 달려가 보지도 못한 나에게는 이 둘의 삶과 글을 들여다보는 것만도 벅찬 일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또 함께 할 친구들이 있으니 전태일과 루쉰을 디딤돌 삼아 적막까지도 뚫고 진동할 수 있기를 살짝 기대하며, ‘씩씩하거나 슬프거나 밉살스럽거나 괴상한’ 그의 납함을 들어보았다.

2. 참된 인간 얻기의 어려움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았다. 참된 인간 얻기가 어려움을.’

루쉰이 적막의 슬픔을 잊을 수 없어 뱉어낸 납함 속에는, 전통/관습/습관이라는 이름하에 권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불편함이 들어있다. 루쉰은 옛 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유로 현재에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 잘못된 것임에도 단절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 것들, 분명 이상한데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자기 이속을 차리는 자들에 대한 관찰과 조롱을 소설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광인일기>의 광인은 ‘인의도덕’이 잔득 언급된 역사책에서 ‘식인’을 찾아내고, 孝 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설화 속에서도 식인 풍습을 발견한다. ‘나는 역사를 뒤지며 조사해 보았다. 이 역사에는 연대가 없고, 어느 페이지에나 ‘인의도덕’ 따위의 글자만이 삐뚤삐뚤 적혀 있었다.… 그러자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겨우 글자가 나타났다. 책에는 가득히 ‘식인’ 두 자가 쓰여 있었다.’ (광인일기) ‘“부모가 앓아 누울 때는 자식은 자기 살을 한 조각 잘라 잘 삶아서 부모에게 먹이는 것이 훌륭한 인간이다”라고. 그때 어머니도 그게 나쁘다고 하지는 않았다. 한 조각을 먹을 수 있다면 물론 통째로도 먹을 수 있을 터이다.’(광인일기) <내일>에서는 은화를 40전씩이나 받고 단씨 아주머니 아이를 진료하는 하소선과 약방 점원의 길다란 손톱이 등장한다. ‘무식한’ 단씨 아주머니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병을 진료하는 하소선의 손과 약방 점원 손에는 더럽게도 손톱이 길게 자라있다. ‘하소선은 두 손가락으로 맥을 짚었다. 손톱이 실히 네 치 이상이나 되었다. 단씨나 아주머니는 마음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 약방 점원 역시 손톱이 길었는데, 처방전을 보고는 천천히 약을 쌌다.’(내일) 각 인물의 특성은 소설의 설정이겠지만, 루쉰의 깔끔하고 신중한 문체는 이들의 모습에서 당시 중국의 풍경과 전통의 이면을 까발려 보여준다.

<광인일기>와 <약>의 소재인 식인 풍습은 당시도 지속되고 있었다.(은유가 아니라) 과거처럼 노골적이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식인 풍습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과거 풍습에 전적으로 젖어 살던 당시 중국인들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기댈 곳은 하소선 같이 이 풍습을 이용해 이속을 차리는 인간 혹은 처형당한 인간의 고기뿐이었다. 소설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안심하며 일을 하고, 거리를 걷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그것은 불과 한 걸음, 한 고비를 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놈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사제, 원수, 게다가 보지도 못한 남남까지 한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며, 서로 견제하면서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광인일기)

그는 과거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습관처럼 당연한 듯 똑같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 걸음을 넘어서’는 삶, 즉 진보가 얼마나 낯설고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모두가 광인이 되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물과 사람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루쉰은 광인의 입을 빌려 참된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인간이 야만이었을 무렵에는 누구나 인간을 먹었었지요?…어떤 자는 인간을 먹지 않게 되어, 오로지 좋게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참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는 여전히 인간을 먹었지요. 버러지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것은 고기가 되고, 새가 되고, 원숭이가 되고, 마침내 인간이 되었습니다. 어떤 자는 좋게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버러지로 그냥 있습니다. 이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인간을 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버러지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보다도 훨씬 더 부끄럽겠지요?’(광인일기)

루쉰은 과거 풍습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그것에 찰싹 붙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이속을 차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약>의 강대숙이나 하씨네 셋째 아들, 그리고 <내일>의 하소선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내일>에서 당장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아이를 점잖게 문자나 읊으며 진료하는 손톱 긴 하소선이 무의식적으로 전통에 들러붙어 있는 인물이라면, <약>의 강대숙이나 하씨네 셋째 아들은 자신의 이속을 위해 풍습과 전통에 의식적으로 붙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육을 먹고도 여전히 기침을 하는 소전에게 ‘나을 거야’라고 말하는 강대숙을 향해 곱추 오소야가 ‘미쳤군’을 외치는 장면은,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띠게 한다. ‘가게 안의 손님들은 다시 활기를 찾고 유쾌히 담소하기 시작했다. 소전도 그 소란 못지않게 기침을 하였다. 강대숙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낫는다. 소전아, 그렇게 기침을 하면 못써. 꼭 나을 거야” “미쳤군” 곱추 오소야가 끄덕이며 말하였다.’ (약)

현실 비판과 조롱은 분명 루쉰의 특기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과거 풍습에 매달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루쉰에게 적막을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지이기도 했다.

3. 동지애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루쉰의 글은 절망에 빠져 있지 않다. <신생>편집자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나 설정은 담담한 듯 보여도 루쉰의 의도와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광인일기>에서 광인은 인간을 먹는 인간을 포기하지도, 경멸하지도, 또한 그 무리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키지도 않는다. 모두가 함께 딛어야 하는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후에 다시 광인이 아니게 되었다 할지라도, 광인인 순간 그는 끝까지 외친다. ‘진심으로 개심하는 게 좋다. 알았나,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거야.… 인간을 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구하라.’

<내일>은 고된 노동 후 함형주점에 와서 술을 마시는 노공들과 푸른 얼굴의 아오, 그리고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세 살짜리 사내아이와 사는 과부 단씨 아주머니의 이야기이다. 아들이 아프자, 노공들이 술을 마시는 늦은 시간까지 들려오던 단씨 아주머니의 무명실 짜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무식한’ 단씨 아주머니는 평소에 절약하여 모은 돈을 전부 모아 ‘유식한’ 의료진을 찾아가지만, 그들을 통해서는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도 준비할 수도 없었다. 결국 병에 지쳐 늘어진 무거운 아이를 들어 준 것은 함형주점 단골인 푸른 얼굴의 아오였고,(단씨 아주머니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후에 단씨 아주머니 아들의 널통(관) 사는 것을 도우려하다 왕구마 할머니에게 제지당한 아오가 삐져서 제사 당일 날 얼굴을 비치지 않은 에피소드는 참 귀엽다.) 널통을 마련해 주고 인부를 구해준 것은 함형주점 주인이었고, 장례식에서 단씨 아주머니를 도와 밥하는 것에서부터 세세한 것까지 챙겨준 것은 이웃에 사는 왕구마 할머니였다. 그리고 아이를 묻고 돌아와 앉은 적적한 방 너머로 단씨 아주머니가 들은 것은 벽 너머 함형주점에서 들려오는 빨간 코 노공의 노래 소리였다.

그렇게 로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단씨 아주머니는 자신의 희망이었던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단씨 아주머니는 무식하기는 하였으나, 혼을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아기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식한 의료진의 도움이 아닌, 무식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아들을 장사지내고 다시 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 <내일>은 이렇게 끝이 난다.
‘단씨 아주머니는 벌써 잠들어버렸다. 노공도 없어졌다. 술집은 문을 닫았다. 이때의 로진은 완전한 정적 속에 있었다. 다만 그 어두운 밤이 밝은 내일의 태양으로 바뀌려고 이 정적 속을 빨리 흐리고 있을 뿐, 그 밖에는 몇 마리의 개들이 어둠 속에서 웡웡 짖고 있을 뿐이었다.’

– 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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