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8호] 사상의 원점

- 기픈옹달(수유너머 R)

–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는다.
사상의 원점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은 이미 루쉰 연구자들에게 고전으로 읽히지만, 이 작품이 그저 연구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루쉰>을 읽으면 여러 곳에서 비약이 눈에 띄는데, 짙은 정서가 그런 비약마저 머금고 하나의 전체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 속에서 루쉰의 다양한 면모는 ‘문학가 루쉰’으로 응결된다. ‘문학가 루쉰’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다케우치가 루쉰의 사상적 장소를 ‘문학’에서 찾을 때 ‘문학’은 이미 그 의미가 바뀌고 있다.

1. 각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1943년에 써낸 <루쉰>을 ‘각서’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의 “처녀작”이다. 하지만 <루쉰>은 ‘유서’와도 같은 작품이다. 다케우치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1952년 창원문고판 발문에서 “<루쉰>은 내게 애착이 가는 책이다. 내몰리는 느낌으로, 내일의 생명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에서 이것만은 써서 남겨야지 생각한 것을 힘을 다해 토해낸 책이다. 유서라고 할 만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거의 그러한 심경이었다”고 적는다. 전쟁의 시기에 집필한 사정도 있지만, 조만간 징집되리라는 사실을 염두하며 써낸 작품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징집을 앞두고 이층에서 원고를 써내려가며 손님이 오면 잠시 아래층에 얼굴을 내밀고는 이층으로 올라와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루쉰>의 탈고일은 1943년 11월 9일이고, 12월 1일 그는 소집영장을 받아 12월 28일 중국의 후베이성으로 출정했다. 징집되기 전에 탈고할 수 있어서 그는 이를 “천우신조”라고 여겼다. 몸은 전쟁터로 떠나지만 말을 남기고 가니 ‘천우신조’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심경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기 대신 글이 살아주리라는 작가적 의식이나 기어이 마쳐야 할 것을 끝냈다는 해방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탈고하고 사흘 뒤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마쓰에다 쓰게오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고심 끝에 가까스로 <루쉰>을 손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입니다. 적어도 기쁘다는 감정은 생기지 않는군요. 후회(무엇에 대한 후회인지 모르겠으나) 같은 느낌, 적막의 감각만이 남습니다. 이런 것일지요. 그마저 루쉰의 영향 탓일까요. 어찌되었건 저는 처음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징집당하기 전에 탈고해 천우신조로 여겼다던 기쁨을 한 측에 두더라도, 이 적막 쪽이 더욱 진실하게 느껴진다. 진실하다기보다 그의 사상적 본질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는 루쉰의 작품을 읽고 <루쉰>을 써내며 그간 자신의 복잡한 내면세계와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루쉰>은 안에서 끓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바깥으로 토해내고 토해낸 내용물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작가에게 만족감과 해방감을 안겨주었다기보다 자기 안의 적막을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 다케우치는 ‘루쉰’에 자신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투사하였으며, ‘루쉰’을 매개로 삼아 잠재된 자신의 사고를 형상화하였다.

2. 응시

루쉰은 다케우치에게 그저 연구대상이 아니었으며, <루쉰> 역시 단지 연구서로 씌어지지 않았다. <루쉰>은 루쉰에 관한 지식으로 꾸려간 작품이 아니라, 다케우치 자기 생의 에너지로 떠받쳐졌다. 대상이 이끄는 강렬함과 그 대상에게 육박하겠다는 절실함이 맺어져 탄생한 작품이다.

패전 후 생환한 다케우치는 전후 사상계에서 활동할 때 <루쉰>을 자신의 사상적 길목으로 삼았다.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한다. “루쉰을 통해 생각하던 것을 조금씩 다른 대상 내지 분야에 적용하여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루쉰>을 다시 읽으면 잊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되살아난다.” 확실히 전후 1946년부터 다시 집필을 시작해 1949년에 이르기까지 써낸 60편 가까운 글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루쉰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루쉰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사상의 기축이었다. 하지만 삶의 기축이었기에 사상의 기축도 될 수 있었다.

<루쉰>은 여섯 장으로 이뤄져 있다. 순서대로 <서장-죽음과 삶에 관하여>, <전기에 관한 의문>, <사상의 형성>, <작품에 대하여>, <정치와 문학>, <결어-계몽가 루쉰>이다. 나는 다케우치가 <루쉰>에 자신을 담았다고 말했다. 저 여섯 장은 자신의 심경을 끌어내고 자신을 분석하는 여섯 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저 여섯 장은 언뜻 장제목만 훑어보아도 들쭉날쭉하다. 시기순도 아니며, 크게 소설·잡감이라는 장르로 구분하지도 않았으며, 문학가·사상가·계몽가·정치가라는 루쉰의 다양한 면모별로 구성하지도 않았다. 저렇듯 고르지 못한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저 여섯 장은 각기 다른 기능을 맡으면서도 루쉰에게 육박하겠다는 한 가지 의지로 수렴되고 있다. 동시에 그렇게 꾸려진 <루쉰>의 일관성은 표면에서 드러난 논리로는 좀처럼 설명되지 않고, 텍스트의 바닥에 어떤 감정과 감각의 형태로 감돌고 있다. 다케우치는 <루쉰>을 집필하며 글의 골격만이 아니라 작업의 진행방식, 논리, 어조의 모든 면에서 루쉰에 대한 자기 이해를 스스로 문제 삼았다. 그렇게 루쉰을 통해 자신을 응시했다.

3. 회심

다케우치는 먼저 <루쉰>에서 루쉰이 진보했다는 설을 거부한다. 사상의 발전 운운은 “인간에게서 사상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다케우치는 루쉰의 사상을 대하듯이 루쉰의 전기도 대했다. 가령 그는 환등기 사건을 두고도 사정은 잘 모르니 상상을 보태지는 않겠지만, 통설을 뒤엎고 그 사건으로 루쉰이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옮겨갔을 리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 극적인 사건을 전거로 삼아 루쉰이 변신했다고 말하거나 루쉰의 생애를 ‘뭣뭣에서 뭣뭣으로’라는 식으로 풀이해도 루쉰의 본질은 꿰찰 수 없다는 것이다.

루쉰처럼 살아간 자가 시대의 부침 속에서 변하지 않았다면 되레 이상한 노릇이지만, 다케우치는 발전도식을 세우기보다 루쉰의 결정적인 한 시기를 정하고자 결심했다. 루쉰 역시 시대에 부대끼고 시대와 함께 동요했지만, 다양한 루쉰의 현현을 낳는 문학가 루쉰을 낳았던 시기가 있으며, 다케우치는 이를 일러 회심回心의 시기라 하였다. 역시 그의 말을 직접 옮겨오는 편이 낫겠다. “모든 사람의 일생에는 어떤 결정적인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여러 요소가 요소로서의 기능적인 형태가 아니라, 일생을 돌면서 회귀하는 축으로 형성되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회심의 시기는 생애를 관통하는 기본사상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루쉰을 루쉰으로 만드는 시기이다. 다른 상황과 조건에 처하고 다른 문제를 맞닥뜨린다면 꺼내는 표현은 달라지겠지만, 그것들 모두는 같은 장소에서 발한다. 그리하여 다케우치는 개인에게서 사상을 뽑아내는 방법 대신 거꾸로 겉으로 표현된 복잡한 표상을 루쉰에게 되돌리며 하나의 인간상을 구축하려 했다.

이 경우 여러 소설, 그리고 그 소설의 다양한 등장인물, 여러 잡감, 그리고 잡감에 담긴 다양한 사색들, 그것들을 성립시킨 여러 문체, 그리고 잡지를 만들고 깨뜨리기를 거듭하며 숱한 논쟁을 일으키고 거기서 자신을 씻어낸 삶의 역정, 그리고 계몽가이며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며 교육자이며 결국 그렇게 문학가였다는 루쉰의 다양한 면모는 그저 다양함에 머물지 않고, 루쉰의 삶에서 “회귀하는 축”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유기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을 ‘회귀의 축’ 한 점으로 끌어모으면, 그 요소들은 쉽사리 섞이지 못하고 서로 첨예한 모순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이 드러난 자리에 루쉰의 삶과 사상으로 들어서는 진입로가 있다.

4. 모순

루쉰은 문학가다. 다케우치는 그래서 루쉰은 선각자일 수 없었다고 누차 말한다. <루쉰>은 루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루쉰은 중국의 문학혁명 이전부터 최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작가이며, 따라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역의 죽음이었다. 루쉰이라고 시종 바른 길을 제시하거나 중용을 지켰던 것은 아니다. 루쉰은 중국사회 그리고 중국문단과 함께 동요했다. 그러면서도 시대에 반보 뒤처져 있었다. 왜 뒤처졌던가. 자신이 지닌 모순의 무게 탓이었다. “사상가 루쉰은 항시 시대에 반보 뒤처져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그를 격렬한 전투 생활로 몰고 갔던 것은 그의 내심에 깃든 본질적인 모순이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루쉰의 문학은 긴 생명력을 얻었다. 그가 선각자일 수 없었던 까닭도 그가 현역으로서 오래 남았던 까닭도 자기 안에 줄곧 모순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이 출현했다고 이후 반드시 성숙하는 법이란 없다. 체계를 구축해 성을 쌓는 사상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 완성으로 향하지만, 사상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근원적인 모순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이 되고 따름이다. 그 모순을 철학적인 체계로 세운다면 선각자일 수 있겠으나 루쉰은 그리 하지 않았다. 적어도 다케우치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기성의 체계가 모순의 무게로 비틀려 터진 자리에 한 사상이 출현한다. 그러나 곧 그 사상을 간직한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평정되어 긴장을 잃는 때가 온다. 내면의 모순이 사그라들면 사상은 평면화된다. 근원적인 모순은 사라지고 안정이 도래한다. 이후로는 지속의 나날이다. 그러면 타락한다. 어둠 속에서 토해낸 사상이 빛 아래서 형상을 갖춰가다가는 이내 굳어버린다. 남들은 이를 두고 발전이니 진보니 떠들겠지만, 다케우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응고되지 않으려면 내부 모순을 간직하고 버티는 행위가 필요하다. 밝은 빛 아래로 나오고 나서도 그림자를 짊어져야 한다.

빛 아래로 나온 지금, 그림자는 이리하여 생긴다. 빛을 쏟아내는 자리를 향해 앞으로 걷는 동안에도 나의 존재로 인해 내 뒤로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빛에 의해 생기지만, 빛은 나의 존재에 가로막혀 그림자를 직접 비추지는 못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빛 아래로 나왔지만 여전히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겨 앞을 향해 걷는데도 뒤를 돌아보느라 엉거주춤이다. 이처럼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겨 빛을 향해 똑바로 걷지 못하는 자는 선각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루쉰의 문학은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루쉰은 뒤처졌으나 그런 루쉰의 후진성은 중국이 겪은 근대화의 후진성과 겹쳐지니 따라서 진실했던 것이다.

5. 문학

다케우치는 루쉰을 문학가라고 불렀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며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는 루쉰이 계몽가나 사상가이기 이전에 문학가라고 주장했다. 다케우치는 사상가 루쉰과 계몽가 루쉰을 현상으로, 말하자면 문학가 루쉰의 효용으로 보았다. 사상가이자 계몽가로서 루쉰의 현실적 효용은 문학가라는 보다 심연에서 발한다. 다케우치는 다름 아니라 문학가 루쉰에게 이르는 데에 자신의 결의를 두었다.

현상으로서의 루쉰은 어디까지나 혼돈이다. 이 혼돈은 그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계몽가 루쉰과 어린애 마냥 순수한 문학을 믿었던 루쉰, 이율배반적인 동시에 존재로서는 하나의 모순적 통일이다. 나는 여기서 그의 본질을 본다. 자신을 허용치 않을 뿐 아니라 남도 허용치 않는 격렬했던 그의 현실생활은 한쪽 극에 절대정지에 대한 희구를 두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듯이, 근대 중국의 빼어난 계몽가는 자신의 그림자마저 믿지 못할 만큼 소박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하고픈 것이다. 계몽가와 문학가. 그 양자는 아마 루쉰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부조화인 채로 서로 상처 입히지 않으며 공존하고 있었다.

다케우치는 계몽가 루쉰을 존경했다. 루쉰은 개척적인 정신을 지녔고 구습유제를 타파했으며 청년들을 이끌었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문학가 루쉰이, 계몽가로서의 자신을 반역한 루쉰이 더욱 위대하지 않을까. 차라리 문학가 루쉰이 있었기에 계몽가 루쉰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루쉰을 계몽가로 고정해버린다면 그가 죽음을 통해 속죄하려고 했던 그 한 가지를 망각하는 것이 아닐까. 내게는 그런 의문이 생겼다.”

다케우치가 공을 들여 해명하고자 한 그 회심의 시기가 낳은 것은 계몽가 루쉰이 아니라 문학가 루쉰이었다. 계몽가 루쉰은 문학가 루쉰의 한 면모이다. 그리고 다케우치는 문학가 루쉰을 설명할 수 있다면 계몽가 루쉰은 설명을 따로 보태지 않아도, 그 궁극의 장소에서 발하는 다채로운 풍모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계몽가의 이름도 여럿이다. 루쉰은 학자이고 정치가이고 교육자였다. 하지만 이는 심연에서 문학가 루쉰이 뿜어내는 효용성인 것이다.

확실히 다케우치는 <철방의 비유>를 독해하며 루쉰을 잠들어 있는 자들을 흔들어 깨워야 할지 고뇌하는 자가 아니라 가야할 길 없는 상황에서 깨어난 노예로 그 위치를 잡아두었다. 바로 계몽가와 문학가의 차이이다. 계몽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희망을 설파한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어떤 자명함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자신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과 목표의 자명함을 믿어야 한다.

문학가는 그러질 못한다. 자기 자신조차 믿기가 힘들다. 의미는 의심스럽고 말은 끊긴다. 그래서 문학가와 계몽가는 표현의 형식으로 가를 문제가 아니다. 문학가는 소설 창작을, 계몽가는 선언문 쓰기를 하는 게 아니다. 문학가는 논쟁에 참여할 때도 문학적이다. 다케우치 또한 루쉰의 문학가적 면모를 소설에서만 구하지 않았다. <루쉰>의 5장 <정치와 문학>은 대개가 소설이 아닌 잡감을 재료로 취하고 있다. 그리고 다케우치는 루쉰이 소설을 쓸 때조차 그 소설에 자신을 담지 않았다고 여겼다. “루쉰이 말하는 자기는 말하자면 과거형의 자기이지 현재형은 아니다. 현재형의 그는 많은 경우 작품의 바로 앞에 있다. 그는 작품으로 몸을 씻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어던지듯이 작품을 내던졌다.”

그리고 이제 계몽가가 아닌 사상가에 관해서이다. 다케우치는 루쉰이 사상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루쉰은 이른바 사상가는 아니다. 루쉰의 사상을 객체로 건져내기란 어렵다. 그에게 체계적인 것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그의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다.

루쉰은 문학가였다. 그것도 일의적인 문학가였다. 그것은 그의 문학이 다른 것을 떠받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의 규범과 과거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길을 꾸준히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을 부정적으로 형성했다. 중국 문화의 후진성 탓에 그의 문학은 새로운 가치를 풍부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었으나, 루쉰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루쉰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전통화되고 중국 문학이 근대 문학으로서의 자율성을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루쉰의 문학은 문학의 근원을 묻는 문학이며, 따라서 그 인간은 항상 그 작품보다 크다.

루쉰은 체계적인 사상가가 아니다. 그에게는 문학론도 문학사도 없다. 그의 소설은 시적이며, 평론은 감성적이다. 그는 개념적 사고와는 기질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유추는 하지만, 연역은 하지 못했다. 직관은 있으나, 구성은 하지 못했다. 목적과 방법을 갖고서 세계에 대립하는 것, 결국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 있던 위치가 애매모호해서는 아니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항상 일정하며, 그것은 그의 강렬한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단지 그가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치가 대상적으로 잡히지 않을 뿐이다. 그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가 누가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은 쉽다.

위의 인용은 <루쉰>의 부록으로 달린 <사상가 루쉰>에서 취했다(<루쉰>의 결어는 <계몽가 루쉰>이다). “이른바” 혹은 “체계적인”이라는 한정구를 달고는 있지만 다케우치는 루쉰이 사상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아닌가. 그가 이유로 꼽은 내용들을 정리해보자.

루쉰에게서는 사상을 객체로 떼어낼 수 없으며, 루쉰은 체계적인 사고를 지향하지 않았으며, 루쉰은 개념적인 사고와는 기질적으로 멀었고 연역에 취약했으며, 고정된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다. 루쉰은 사상가가 아니지만 이런 의미에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케우치는 사상이란 말을 필요로 했으며, <루쉰>의 한 장을 <사상의 형성>에 할애했다. 루쉰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어떤지를 밝히는 데에 사상이란 말을 사용했다. 결국 루쉰은 문학가이다.

문학가 루쉰에게서는 사상을 객체로 떼어낼 수 없으며, 문학가 루쉰은 세계를 개념적으로 사고하지도 체계로 세우지도 않았으며, 고정된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다. 루쉰은 계몽가이자 사상가였으나 문학적인 본질을 지키고 있었기에 계몽가이자 사상가일 수 있었다.

– 윤여일(수유너머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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