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9호] 생각의 서랍을 열다(안나푸르나, 네팔)

- 윤여일(수유너머R)

1.

눈앞에 둔 사물과 머릿속 생각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 큰 생각은 때로 거대한 광경을 요구한다. 깎여져 내려가는 절벽을 마주하노라면 품위 없다고 느껴지는 근심이 있다. 반면 어떤 착상들은 그 광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자연의 웅장함은 산란한 마음을 차분하게 덮어준다. 압도적인 규모는 뇌를 포화시켜 소소한 것들을 걷어낸다.

혹은 이런 원리일지 모른다. 인간 두뇌의 탁월함은 세계의 다양한 요소들에 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 있다. 정신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사물들을 통일된 이미지와 개념으로 결합해낸다. 각기 떨어진 요소들 사이에 더욱 긴밀한 상호관계가 성립할수록 한층 충만한 것으로 감각된다. 히말라야가 내보이는 압도적 크기는 거대한 조화 속으로 잡다하고 소소한 것들을 끌어들인다.

이게 숭고미일 것이다. 일상 감각의 임계치를 넘어선 외부의 광경을 목도할 때 초경험적인 힘을 느끼고 정신은 고양된다. 나라는 존재는 그 앞에서 하잘 것 없지만 위대한 힘에 감사하며 주변의 모든 존재와 지복을 나누고 싶은 감흥이 차오른다. 자연의 거대함은 내게 단순한 진실 하나를 가르쳐주며, 나는 거기서 위로를 얻는다. 마음에 남은 상처와 아픈 기억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의 정신적 품이 무한으로 커진다면 그 상처는 내 안에서 극소가 된다.

2.

니체의 <사실주의 화가>라는 시다.

“자연에 완전히 진실하라!” –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자연을 어떻게 속박하여 그림 속에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자연 가운데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한하다! 따라서 화가는 자연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린다. 화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기가 그릴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헉하고 고개를 쳐들게 만드는 풍경을 마주하면 카메라를 꺼내지만 바인더는 비좁고 이것저것 다 담으려고 하니 사진은 초점을 잃고 만다. 트래킹하는 동안 하는 일이란 사진 찍고 떠오르는 단상들을 메모하는 것뿐이다. 내 배낭을 포터에게 맡겨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가설만을 세워둔 어떤 일본사상가에 관한 글, 미뤄둔 번역일, 떠나온 연구실 생활을 떠올리고 좋지 않은 기억들도 억압 없이 오랜만에 꺼내본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반복적인 걸음은 내적인 대화로 들어가는 알맞은 리듬감을 형성한다. 오로지 해야 할 게 생각뿐이라면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곤 한다. 몸은 책상 앞에 있지만 머리는 공회전하고 작업에는 진척이 없다. 하지만 정신의 일부가 다른 곳을 향하고 한 눈을 팔면 집중력은 흐트러지지만 동시에 사고의 관성도 멈춘다. 줄지어선 나무들을 눈으로 쫓고 있으면 기묘한 연상을 타고 착상과 표현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순간이다. 달아나기 전에 메모를 해둬야 한다.

걷는 동안 어떤 관념만이 아니라 불안, 권태, 떠돌아다니는 슬픔 등의 감정도 관(觀)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감정은 선입관, 신경반응, 습(習), 자기교정, 과장의 뒤엉킴 속에서 투명하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일어난다. 시간들도 뒤섞여 있다. 현재의 괴로움은 과거의 기억마저 자신의 나락으로 끌어들인다. 관하는 것은 어쩌다가 그런 감정의 형태로 응고되었는지 감정의 성분들을 확인하고 그것들의 일렁임과 뒤섥임의 양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혼자 힘으로는 버겁지만 시선을 훔쳐가는 바깥 풍경이 있으면 좀 더 쉽게 이뤄진다. 감정의 서랍을 열어 서로 얽혀있던 응어리들을 다시 분류하고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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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2개

  1. 평강말하길

    작년 좀솜트렉을 걸었습니다~
    언젠가는 또다른 트렉을 걷게되길 간절히 꿈꾸며
    글, 고맙습니다…

  2. 인호말하길

    글 잘 읽고, 사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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