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9호] 유혹의 출판, 매력의 출판

- 편집자

유혹의 출판, 매력의 출판

지난 3월 8일, 각 언론사들은 네 군데 출판사의 사재기 문제를 이슈로 다뤘다. 기사를 인용해 보자.

“자사 책을 사재기한 네 군데 출판사가 ‘출판물 유통 신고센터’의 감시망에 걸렸다. 신고센터에 따르면 ㅁ책의 경우 ID가 다른 회원들이 같은 주소지에서 집중적으로 주문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ㅇ책의 경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문을 했는데 동일 주소지로 책이 배송됐다. 신고센터 쪽은 ‘인터넷 서평카페와 공조해 책 구매를 유도하는 방식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중복구매를 한 회원 주소가 사람이 살만한 집이 없는 산골짜기 주소로 나오기도 한다’고 밝혔다. 사재기로 인해 ‘유령 독자’가 출현한 셈이다. 이 밖에 특정인이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처를 달리해 동일 도서를 대량 주문하거나, 저자 사인회용 도서를 독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뒤 서점 판매량으로 집계하는 것 등의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서가

사재기란 교보문고, 예스24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기 위해 자기 출판사가 펴낸 책을, 자기 돈을 들여, 되사들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많은 서점 중에 하필이면 왜 교보와 예스24냐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이들 서점은 서점 중의 서점, 서점의 왕으로서 출판사와 서점들 위에 군림한다. 이 두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책은 졸지에 VIB(Very Important Book)가 되고, 전국 서점 매장 진열의 정언명령이 된다. 당장, 아무 서점이고 가보라. 어느 서점이고 매장의 중심을 차지하는 책, 잘 팔리는 책은 이들 책이다. 서점들은 단기적인 매출의 유혹 때문에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드러내 놓고 반기진 않지만 굳이 문제 삼지도 않는다. 또 1년에 5만종 넘게 쏟아져 나오는 신간의 홍수 속에서 독자들은 이들 베스트셀러를 가이드 삼아 비교적 쉽게 살 책을 선택한다. 이렇게 해서 사재기를 둘러싸고 출판사-서점-독자의 검은 커넥션이 만들어진다.

출판계에 사재기가 등장한 건 1990년대 들어서인데, 공교롭게도 출판계에 밀리언셀러가 등장한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밀리언셀러가 출현함에 따라 사재기가 등장한 것인지, 사재기로 인해 밀리언셀러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밀리언셀러가 등장하고 시장이 커지면서 사재기가 왜곡된 마케팅 방법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사재기가 널리 퍼진 데는 광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것도 한몫했다. 1만원짜리 자기 책을 되사는 데 드는 비용은 2,000원이다. 서점 유통마진 20%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이다. 2천만원이면 1만권의 자사책을 되살 수 있는 것이다. 2천만원으로 광고를 하더라도 그 효과는 미미하다. 이에 반해 2천만원으로 사재기를 하면 광고보다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자금력이 있어 광고와 사재기를 병행하면 시너지로 인해 그 효과는 폭발적으로 커진다. 이래서 사재기는 달콤한 ‘유혹’이 된다.

사재기는 이제 출판계의 관행처럼 굳어졌다. 언론의 기사를 탄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잊을 만하면 한번씩 기사화되었으니까. 다만 온라인으로 출판유통환경이 바뀌면서 방법이 좀더 세련되어졌다고나 할까. 1990년대까지 사재기는 오프라인 서점 위주로 이뤄졌다. 출판사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서울시내 대형 서점을 돌며 자사의 책을 사도록 했다. 배낭을 맨 아르바이트생들은 특정 도서를 하루에 30∼60권씩 여러 번에 나눠 구매하기도 했다. 지금 온라인 서점에서 치밀하고 은밀하게 행해지는 사재기에 비하면 차라리 순진하고 귀여운 구석까지 보였다고 해야 하나.

사재기에 대해 비난을 퍼붓거나 분노하는 건 쉽다. 그러나 허망하다. 현실은 비난이나 분노를 조롱한다. 사재기로 적발되더라도 과태료 300만원이면 면죄부를 얻기 때문이다. 두 눈 질끈 감으면 쪽팔림은 순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부끄러움이 설 자리는 없다. 부끄러움 따위야 개에게나 줘버린다 해도(에고, 개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사재기는 출판계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불신을 가져온다. 사재기 사실을 안 독자들은 더 이상 지식에 대해 믿음을 갖지 않는다. 출판사들은 출판사들대로 서로를 의심한다.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누구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다. “저거, 사재기 한 거 아냐?” 이때 출판사는 엉거주춤해지고 어정쩡해진다. 묻지도 않았는데, 제입으로 사재기 안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가만있자니 사재기를 시인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재수 없는 곳만 걸렸다”는 수군거림이 횡행하는 가운데, 최악은 적발된 당사자가 “남들 다하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항변하는 경우다. 좋다, 좋다, 다 좋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사재기, 그까이꺼 할 수도 있다 치자. 그럼 하다못해 시장이라도 넓혀 놓든가. 시장이 커진다는 건 그만큼 독자가 늘어난다는 얘기고,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책을 많이 접하게 된다는 얘기니까. 그러나 사재기는 그마저도 못한다. 사재기의 잡음이 그치지 않은 지난 10년 동안, 출판시장의 규모는 2조 5천억원 내외에서 큰 변동이 없었다. 사재기란 놈은 정말 쓰잘 데가 한 군데도 없는 놈이다.

사재기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끼어드는 ‘말 같지 않은 말’이 있으니, 바로 마케팅과 사재기는 구분이 모호하다는 주장이다. 인식이 흐리면 모든 게 흐릿해 보이는 법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나는 마케팅은 매력이고, 사재기는 유혹이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매력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을 말하고, 유혹은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빨아먹을 단물이 없으면 미련없이 떠나는 태도가 유혹이라면, 매력은 달콤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과정을 함께 하는 태도다. 유혹이 일방향의 성격을 띤다면, 매력은 서로를 잡아끄는 쌍방향의 성격을 띤다. 책을 사서 본 독자가 만족하든 말든 무조건 많이 팔고 보자는 태도가 유혹이라면, 책을 팔고 난 이후에도 독자가 만족했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태도는 매력에 속한다.

지식을 다루는 출판이라고 하는 업은 그 어떤 업종보다 매력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지식을 매개로, 저자와 편집자와 독자가 새로운 삶을 촉발하고, 감정과 사유를 나누고, 서로에게 격려와 위안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케팅과 사재기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다. 책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이질적인 것으로 변이시키는 것이 마케팅이라면, 오로지 책의 판매에만 눈길과 관심을 쏟는 게 사재기다. 독자의 욕망에서 출발해 독자의 만족으로 끝나는 일련의 기나긴 과정을 마케팅이라고 할 때, 마케팅은 시작과 끝, 목표와 결과가 서로 꼬리를 물면서 선순환하는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재기는 목표와 결과가 따로 논다. 오로지 결과만이, 그것도 돈으로 환산된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케팅이 공공연하고 당당한 태도라면, 사재기는 은밀하고, 음흉하고, 비겁하고, 표리부동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태도다.

매력의 관점에 서면, 즉 마케팅 관점에 서면, 많이 팔리는 것도 때론 두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대개 베스트셀러는 과대평가의 산물이기 십상이다. 과대평가는 자칫 실망한 독자를 양산해 낼 수도 있다. 나쁜 소문이 더 빨리 퍼지는 법, 실망한 독자는 가만있지 않고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고 다닌다.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건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판은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매스미디어(mass media)가 아니다. 출판은 접촉면이 좁고 깊고 뜨거운 개인 매체(private media)로, 소비의 매체가 아니라 사유의 매체며, 광고가 아니라 콘텐츠의 질로 먹고사는 매체다. 출판업의 성공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저자-출판사-독자’의 좁고 끈끈한 소셜 네트워크 속에서 콘텐츠를 갖고 얼마나 다양한 활동을 구성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베스트셀러를 좇는 한 출판업은 ‘매력의 지식산업’이 아니라 ‘유혹의 투기산업’이 된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집착에는 무능력과 초과이윤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가 좇아야 할 것은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창조적 능력이고, 그에 따른 적정이윤이다.

책들의 네트워크 = 지식의 네트워크

디지털과 웹으로 촉발된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의 미디어환경에서 베스트셀러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의미없는 짓이다. 베스트셀러는 다양성을 잡아먹고 큰다. 책이 유일한 상품이었던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는 나름 매력있는 전략이었을지 모르지만, 책 말고도 다양한 지식 콘텐츠를 생산 유통시킬 조건이 갖춰져 가고 있는 지금, 베스트셀러는 낡은 전략일 뿐이다. 단기성과의 유혹에 넘어가 베스트셀러를 출판 전략으로 삼았다가는 사업을 접어야 하는 비극에 처할 수도 있다. 실제로 밀리언셀러를 내고도 사라져간 출판사를 우리는 꽤 여럿 알고 있지 않은가. 한 권의 책을 백만명이 사서 읽는 것보다는 일만 권의 책을 일만 명이 사서 보는 것이 출판계를 위해서는 더 좋다. 사유는 사유를 낳는 법이어서, 사유가 깊은 책은 독자를 출판의 세계로 잡아끄는 매력을 발산한다. 이런 매력이 발산되는 환경에서 출판은 존재의 이유와 성장의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우리에게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책이 수십만 부 팔려야만 사업이 확장되는 그런 낡은 ‘유혹의 모델’ 말고, 몇 백부, 몇 천부만 팔려도 사업이 날로 확장되는 그런 ‘매력적인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 유재건(그린비)

응답 3개

  1. 비포선셋말하길

    유혹과 매력의 차이..와닿네요. 출판에서 나아가 삶의 방식에서도 곱씹어볼 문제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2. 선완규말하길

    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1만부까지는 깊고 넓은 소통이자 새로운 ‘의미’ 창조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하더라구요. 감사^^

  3. 여이루말하길

    루쉰의 [무덤] 후기의 일부입니다.

    “나의 번역물과 저서의 인쇄 부수가 처음에는 1판 1천이던 것이 후에는 5백이 더 늘어나고 근래에는 2천 내지 4천이다. 늘어날 때마다 나는 물론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돈이 들어오니까. 하지만 그와 함께 애수도 느낀다. 독자에게 해를 주지 않을까 여겨져서. 따라서 글을 쓸 때는 자칫 조심하게도 되고 주저하게도 된다. 내가 붓이 가는 대로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고, 내가 스스러워하는 바는 결코 조금도 적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필경 전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듯 많은 스스러움과 회억이 있어서는 선구자라고도 할 수 없다. 분명히 3-4년 전, 한 학생이 나의 책을 사러 와서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나의 손바닥에 놓은 일이 있었다. 그 돈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 체온은 나의 마음에 낙인을 찍었다. 지금도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이런 청년들에게 해독을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따라다닌다. …”

    편집하는 입장에서 꺼내신 고민이 제게는 루쉰이 쓰고 번역하며 토로했던 불안과 겹쳐서 읽힙니다.
    공개하기로 한 글이라면 팔려야 합니다. 팔려야 한다는, 읽혀야 한다는 긴장감은 쓰는 이에게 분명 자극을 안깁니다. 하지만 루쉰의 글이 긴 생명력을 갖는 것은 저러한 동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집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동요와 불안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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