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9호] 낙원을 만드는 사람들

- 편집자


달맞이의 책꽂이
낙원을 만드는 사람들
– <낙원섬에서 생긴 일> 찰스 키핑 글, 그림 / 서애경 옮김 / 사계절

오랜 망설임 끝에 ‘수유 너머’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그때, ‘수유 너머’는 원남동에 있었어. 전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면 탑골공원이 나오고, 탑골공원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수유 너머’가 나왔지. 아마 여름이었을 거야. 전철역에 내리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온 몸을 에워쌌어. 공원이 가까워질수록 냄새는 점점 짙어졌어. 세월이 남긴 향취가 ‘퀴퀴함’ 뿐이라는 게 어찌나 허허롭던지! 그나마 실망감을 희석시켜준 건 ‘첫’이라는 설레임이었을 거야. 반찬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서둘러 세팅을 하고 모여 앉으면, 좁은 식당 안에 모기들은 왜 그렇지 윙윙거리던지. 그런데 참 이상해. 원남동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 생전 처음 니체를 만난 곳, 내게 앎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 되물어 보게 한 곳, 내 삶에 배짱이라는 쌈짓돈을 건네준 곳…….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가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 대낮부터 돗자리를 펴고 술타령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들이 딱하기도 하고 때론 보기 싫기도 했지만, ‘樂園’을 찾아가는 내 기쁨을 막지는 못했어.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탑골공원도 그 분들의 낙원 이었지 뭐야. 내 낙원에만 미쳐, 그들의 낙원엔 관심도 없었던 거지.

그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 낙원이라는 게 뭘까? 낙원이든, 유토피아든, 파라다이스든, 에덴동산이든 결국 이 세상에 없는 곳을 지칭하는 거잖아. 아무런 고통이 없이 안락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은 결국 저 세상에나 있다는 것. 그러기에 우린 끊임없이 갈 수 없는 그 곳을 동경하는 것일 테고. 어찌 보면 낙원이란 지금-여기에서 실패한 자들이 꾸는 몽상일지도 몰라. 낙원을 찾아 떠나는 그 힘으로, 지금-여기를 낙원으로 만들면 되는 것을. 소박하게 낙원이란 그냥 ‘즐겁게 살 수 있는 곳’ 인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다 헛꿈을 꾸기만 하는 건 아닐까? 아무런 고통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애당초 가능한 일이기나 한 걸까? 고통이 있기에, 즐거움도 느끼는 건 아닐까?

찰스 키핑의 <낙원섬에서 생긴 일>은 도시 개발 중인 런던의 모습을 잘 드러낸 그림책이야. 지금 우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시의원들의 ‘낙원 허물기’ 공사를 통해 ‘개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시의원들의 행태를 어찌나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지, 아주 흥미로워.

육지에 사는 시의원들의 눈엔 흙탕물이 흐르는 샛강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야말로 무질서한 난장판이야. 그래서 멋진 계획을 세워. 섬을 가로지르는 유료 고속도로를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해.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도 있고, 통행료를 받아 수익도 챙길 수 있고, 일한다는 폼도 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추진력도 끝내줘. 오래된 가게와 창고들을 강제로 사들이는 법안을 재빨리 통과시키고, 불도저를 보내 건물들을 싹 밀어버리고, 가게 주인들에겐 육지에 새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거든. 이주 대책까지 마련해 주었으니, ‘강제로 사들이는’ 강도 같은 짓을 ‘재빨리’ 해치운 약삭빠름이야 슬쩍 넘어갈 수밖에. 공사현장을 지켜보기만 하고선, 섬의 경관이 완전히 바뀐 것이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라면서 감탄까지 한다니까! 개통식이 엉망진창이 되어 실망을 하면서도, ‘큰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은 버리지 않아. 누구를 위한 큰일인지. 누구를 위한 ‘뿌듯함’인지. 뿌듯함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나 하는 건지! 우리네 위정자들과 완전 판박이지.

하나 다른 건 습지에서 모종의 꿍꿍이가 생긴다는 걸 알지만, 그냥 눈감아 주는 센스가 있다는 거야. 그 센스라는 게 물론 상대방을 위한 건 아니야.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을 막고, 자비를 베푸는 일로 비치리라는 치밀한 전략이지. 그런데 이 제스추어가 뒤에 기막힌 반전으로 다가와. 암튼 공사는 완결되고 시의원들은 자부심에 가득 차서 사람들을 초대해. 하지만 몰려온 군중들은 테이프를 자르러 온 스타에게만 관심을 보여.

시의원들이 한 대단한 일이란 게 결국 스타 한 사람의 등장만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거야. 사람들이 ‘눈꼽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을, 사람들의 대표인 그들은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고 자부심에 차서 했던 거지. 개발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 아닌가.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진행되지만, 결국은 특정인의 배만 불리는 거.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게 대중스타가 주는 만큼의 위로도 건네지 못하는 정치인. 자신들이 뽑은, 자신들의 대표가 하는 일에 철저히 무관심한 군중들. 찰스 키핑은 인간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위선적이고 허풍선이 같은 시의원들과 대칭되는 지점에, 낙원섬에 사는 사람들이 있어. ‘낙원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닌 데도, 낙원섬이라고 불리는 곳.’

찰스 키핑은 이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낙원에 대해 사유할 것을 강제하고 있는 것 같아. 낙원섬이라는 공간은 사람들에 따라 제각기 달리 인식되고 있거든. 애덤이라는 소년에게 낙원섬은 고향이며, 행복을 느끼는 곳이고, 시의원들에게 낙원섬은 무질서한 난장판(없애야 할 곳)이고, 자동차와 트럭운전자들에게 낙원섬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관심 밖의 대상’이야.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무질서한 난장판이기도 하다는 거. 그런데도 그 둘이 같은 명칭으로 불린다는 게 참 재미있지?

그런데 낙원섬은 이름만이 아닌, 실제적인 낙원섬이야.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이웃들이 살고, 조랑말과 염소와 닭을 식구처럼 여기는 바르다 할아버지가 살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가 함께 어울려 살거든.

낙원섬에 도로가 생기자 노인과 아이들은 버려진 목재와 벽돌을 모아 낙원섬의 일부인 습지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구조물들을 세워. 건물터로 쓰기에 마땅치 않아 개발에서 제외된 습지에 또 다른 낙원을 만든 거야. 낙원이란 원래부터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걸, 만들어 가는 거라는 걸, 온갖 목숨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 바로 낙원이라는 걸 개발과 대비해서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어. 멋지고 실용적인(설명까지 붙어있는) 주택들 그림 옆에 소시지와 감자를 구워먹는 아이들과 노인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진짜 낙원’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찰스 키핑의 그림은 참 독특해. 처음엔 괴기하고 우울한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어두운 색조는 습지의 느낌을 잘 살려주고, 시의원들의 다양한 표정은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보는 재미를 주거든. 가게 주인들의 모습은 가게가 사라지고 슈퍼마켓에 새 일자리를 얻었음에도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 아니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느낌이 들어. 박제된 동물, 혹은 진열된 상품.

뒷부분, 반전도 기막혀. 결과를 놓고 보면 낙원섬에서 일어난 변화로 인해 뭔가 하나씩은 얻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치 개발이 좋은 것인 양 시치미를 떼거든. 시의원들은 지역을 위해 큰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얻었고, 가게 주인들은 새 일자리와 집을 얻었고, 운전자들은 잘 닦인 평탄한 길을 달릴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생겼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나이에 걸 맞는 일을 할 기회가 생겼으니, 공평하게 하나씩 얻었으니 된 거 아니냐는 거야. 허울뿐인 자부심, 행복하지 않은 새 일자리와 집, 속도를 낼 수 있게 된 것. 고작 그것이 ‘낙원섬(아니 진짜 낙원)’을 허물어서 챙긴 대가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나! 놀이터와 나이에 맞는 일을 할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잖아. 그들의 낙원을 잃은 대가니까. 개발(문명)이란 새로움과 편리함을 취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정말 소중한 것을 잃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셈이지.

마지막 장이 정말 멋져. ‘낙원섬은 관계된 사람들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하거든. 그런데 두 사람만 거기서 제외되어 있어. 낙원섬에 도로를 놓은 일을 논의할 때 기권한 베니와 위니. 베니는 Black, 위니는 White라는 뜻이래. 흑과 백으로 나뉘어 싸우느라 자기 몫의 일을 하지 못하고(‘늘 그렇듯이’ 라는 표현이 정말 죽이지 않니! 싸움이 일인 족속들) 그래서 모두가 갖게 된 각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종들.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관계된 자들의 몫이라는 일침, 제일 무서운 것은 방관자로 겉도는 것.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예리한 지적.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으로 정치적인 것 같아.

참, 개통식 때 스타의 광팬들과 다양한 주장을 펼치는 시위대가 등장했는데, 시위대가 든 푯말 중에 가슴을 두드리는 내용이 있어.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들이 왜 가난한지 묻는 것은 혁명이다.”

성스러운 일에 취해, 혁명을 도외시하는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더라. 아니지, 정작 성스러운 일에 제대로 취하지도 못하셨지.

– 달맞이

응답 5개

  1. 아기새말하길

    이 책 저도 읽었는데… 저의 낙원섬은 어디일지 아직 찾지 못했어요. 휴!!

  2. 둥근머리말하길

    ‘뭔가 하나씩은 얻고 있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사는 삶… 이 쭈욱 이어질까 겁납니다. 매번,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 박혜숙말하길

      둥근머리님, 나도 고마워요. 매번 격려해줘서. 아까 낮에 누가 그러는 데 ‘똑똑하게 사는 법’이라는 어린이책이 있다고 하네요. 그 책이라도 사서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외려 ‘미련하게 사는 법’ 뭐 이런 책을 써야하는 건 아닐까? 그런 책 어디 없나? 그런 생각이 두서 없이 들더라고요.

  3. 그저물처럼말하길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들이 왜 가난한지 묻는 것은 혁명이다.”

    요즘 자본주의의 ‘복지사회’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요. 준다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혜숙말하길

      감사합니다. ‘그저 물처럼’님. 이름을 보니 문득 노자를 읽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저 물처럼 살면 참 좋은 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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