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9호] 순수가 짓는 집

- 편집자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순수가 짓는 집
– <순수에게> 손석춘, 사계절

남녀공학인 학교로 옮겼다. 처음 발령받은 학교를 제외하면 남학교에서만 8년 동안 생활했다. 그런 나에게 여학생반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은 긴장감을 주었다. 첫 시간은 책과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수업을 준비했다. 먼저 책 제목, 저자, 출판사 이름이 적힌 제비를 만들었다. 같은 제비가 두 개씩 있어서 이를 뽑은 친구는 짝이 된다. 제비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 표정이 떠올라 마음이 설렜다. 교실로 들어섰다. 여학생들 표정에서 신입생 특유의 긴장감과 설렘이 느껴진다. 눈빛이 참 순수하고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을 소개한 후 이번 시간에는 같이 앉을 짝을 정할 거라고 얘기했다. 아이들은 신나는 표정이었다. 제비를 모두 뽑아 짝을 찾은 후 자리에 앉기까지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덧붙였다.

아이들이 수줍은 미소를 띄고 한명씩 제비를 뽑았다. 모든 아이들이 제비를 뽑자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말은 절대 하지 말고 교실 빈 공간들을 이용해서 걸어다니며 짝을 찾으라고 했다. 먼저 짝을 찾은 팀은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했다. 아이들이 미소를 가득 안고 교실 곳곳을 걸어다니며 자신의 제비를 보여주고 친구의 제비를 확인했다. 짝을 찾은 아이들은 미소로 인사한 후 자리를 잡았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이제 2분을 줄 테니 짝이랑 같이 자신들이 뽑은 제비에 적힌 책에 대해 상상해 보자. 2분이 지나면 발표를 시키겠다. 그리고 책 제목과 저자, 출판사는 외워서 칠판에 적어야 한다. 고요하던 교실이 갑자기 수다로 넘쳤다. 막막해하는 표정 너머에는 호기심어린 눈빛이 완연했다. 시간이 되자 두 팀을 불러 책 제목과 저자, 출판사를 칠판에 적게 한 후 어떤 내용이라 추측했는지 발표하게 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는 논어라는 물고기(논어가 붕어와 같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단다.)가 사람이 되는 내용을 담은 책일 것 같다는 이야기에 웃음보가 터졌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는 우리 전통 음식 고추장을 역사, 문화적으로 연구한 책일 거라는 이야기에 바라보던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만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책을 소개해주자 그제서야 아이들은 웃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궁금한 책을 물어보라고 했다. 한 아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손을 들고 <순수에게>를 가리켰다. 칠판 앞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책 몇 권 중에서 수채화 느낌의 표지에 관심이 갔나보다. 지금 이 아이들 눈빛을 보시고 손석춘 선생은 책의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예전에 건축 관련 책을 읽으며 마음에 담은 구절이 있었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지만 그 공간은 또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간다. 자연과 단절된 공간에서 사람의 삶은 자연을 잃게 되고, 자연과 소통하는 공간에서 사람의 삶은 자연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며 건축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손석춘 선생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아름다운 집’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아름다운 집’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집’은 지금 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집에서 살아가려 하는가?’, ‘그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란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손석춘 선생의 <순수에게>(사계절)는 청소년에게 우리가 살아갈 ‘아름다운 집’을 상상하게 하고 그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청소년이 순수성을 올곧게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진실이 무엇인가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가정, 학교, 대중매체가 10대들을 사회화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실을 가리고 현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손석춘 선생은 이를 언론의 문제를 통해 보여준다. 의병을 비도(匪徒)로 표현하며 진실을 가리는 자리에 섰던 독립신문의 역사를 오늘날의 언론 또한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두 발로 서서 사회를 읽기 시작해야 하며, 그때 온전한 역사와 만나게 된다. 인류의 역사는 일상생활 속의 사랑과 차별과 억압을 없애려는 싸움으로 인해 쉼 없이 이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는 이러한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야 하며 우리 개개인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노동을 통해 자기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더듬이인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힘을 통해 가려진 현실을 걷어내고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좋은 책 읽기를 통해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익혀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기 두 발로 서서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면서 그때그때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결국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집, 아름다운 집을 짓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가 짓고 있는 아름다운 집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내가 지으려는 아름다운 집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전체 짜임새 또한 무척 탄탄했다. 쉽고 차분한 어조로 차근차근 설득해 나갔다. 마치 한 부분을 생략해버리면 전체 집이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건축물 같았다.

책 소개를 간단히 한 후 서로 마주앉게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황당해하는 아이들. ‘취미는 뭐니, 집이 어디야, 너는 몇 등하니’ 등 단순한 사실을 물어보는 질문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당황하는 아이들에게 “자, 예를 보여줄게. 00야, 앞으로 나와 줄래?” 활달해 보이는 아이를 교실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 아이에게 내가 묻는 질문에 답하라고 했다.
“너는 꿈이 뭐니?”
“저는 아직 꿈이 없는데요.”
“왜 꿈이 없을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왜 생각한 적이 없을까?”
(침묵)
“어릴 때는 꿈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꿈이 뭐였니?”
“유치원 다닐 때는 대통령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요.”
“한때 대통령이었던 아이가 왜 지금은 꿈이 없을까?”
(침묵)
“긴 호흡으로 봤을 때 어떻게 살고 싶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거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사는 거요.”
“뭘 하고 싶은데?”
(난감한 표정으로 침묵한다.)
“수고했다. 자리에 들어가렴.”

“자, 인터뷰는 이렇게 해라. 내가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하려고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대답하기 곤란해서 난감하기도 하겠지만 대답을 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된다. 자기 스스로도 몰랐던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할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질문들은 너희들이 평생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이다.”

아이들끼리 마주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감해 하거나 어색해 하는 아이들이 보이면 가까이 가서 질문을 도와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이제 ‘생각’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부터 아이들은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집을 짓고 있을 게다.

– 풍경지기 박혜숙

응답 2개

  1. 익명말하길

    이런 수업을 듣고 싶어요..

  2. lizom말하길

    와, 정말 재미있는 수업이었겠다. 제목만 보고 책 내용을 짐작하는 거, 정말 재미있겠네요. <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는 우리 전통음식 고추장을 역사 문화적으로 연구한 책!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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