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9호] 반자본주의 정치영화 <데이브레이커스>

- 편집자

씨네꼼

반자본주의 정치영화 <데이브레이커스>

흡혈귀가 빨아 먹는 것은 피만이 아니다

최근 개봉한 <데이브레이커스>는 흡혈귀 SF영화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내용상 노골적인 반자본주의 정치영화이다. <데이브레이커스>의 흡혈귀, 냉혈한, 피에 굶주린 자들, 자신이 아닌 외부를 착취해야만 생존이 유지되는 존재는 다름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유비이다.

19세기 고딕소설<드라큐라>를 영화화한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 <노스페라투>(1922) 이후 뱀파이어는 전통적인 악마의 이미지를 표상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변주를 거치면서 뱀파이어는 일종의 ‘우리안의 타자’ 혹은 ‘위험성을 내포한 소수자’ 등의 메타포로 활용되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로부터 <렛미인>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를 통해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해보려는 일련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브레이커스>는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로 흡혈귀들의 세계라고 본다. 자본주의와 흡혈귀라…어쩐지 낯이 익은 연결이라고? 일찌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은 죽은 노동으로 산 노동의 흡수에 의해서만 활기를 띠는 흡혈귀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자본은 산노동의 피를 빨고, 끊임없이 외부를 착취한다. 19세기 제국주의와 20세기 양차대전은 일국내 자본이 착취할 외부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경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는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구사회주의권을 빠르게 탐식해들어가는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이제 러시아와 중국은 인도, 브라질과 함께 BRICs라는 이름의 ‘이머징 마켓’으로 불린다. 그런데 문제는…이제 그 외부가 거의 남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외부’가 국경으로만 표상되는 건 아니다. 노동유연화로 정규직 성인남성 노동력 ‘외부’에 있던 여성, 청소년 등 비정규직 노동력이 새로운 ‘외부’가 되었고, 노동의 정보화는 고용의 ‘외부’에 있는 일명 ‘네티즌’들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물을 착취한다. 그뿐인가? 소비자 신용을 통해 현재의 노동시간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시간까지 착취한다. 이러한 중층적 ‘외부’를 더 많이 생각해볼 수 있지만, 가장 가시적이고 심각한 착취를 겪는 ‘외부’는 바로 자연이다.

지난 200년동안 자본주의는 지구상의 자연을 광범위하게 착취하였다.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는 경고가 이어짐에도 개발은 멈출줄 모른다. 특히 석유자원은 지난 100년간 지구상의 총매장량의 절반이 소비되었고, 2020-2032년 사이에 생산량이 ‘피크’에 달한 후 감소곡선을 그릴 것이라는 ‘피크오일론’이 알려지고 있다. 현대 문명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석유의 고갈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할 뿐 아니라, 그보다 본질적인 식량위기로 이어질 전망이다. 1970년대 우려되었던 식량위기가 지금까지 오지 않은 것은 ‘녹색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유전자 조작작물과 ‘농업의 산업화’ 덕이었다. 현대의 농업은 공업과 마찬가지로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이며, ‘바이오 디젤’ 개발에 의한 옥수수값 폭등에서 보듯이 ‘에너지는 곧 식량’이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석유를 먹고 사는’ 현대문명은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거나 현대문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변경을 하기전에는, 종말론적인 석유위기와 식량위기를 맞을 것이란 전망을 피할 수 없다.

데이브레이커스

<데이브레이커스>는 2009년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창궐한 뒤 10년만에 전세계 인구의 95%가 뱀파이어로 바뀌고, 이들에 의해 사회질서가 장악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세계는 햇빛을 싫어하는 뱀파이어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걸맞게 잘 발달된 지하아케이트와 완벽하게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자동차 등 첨단 테크놀로지가 돋보이는 문명사회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심각한 식량란과 그로 인한 사회문제에 봉착해 있다. 인구의 대다수가 인간의 피를 먹어야 사는 뱀파이어들이지만, 이제 피를 공급할 인간이 5%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95:5 라니, 어떻게 그런 사회가 가능하냐고? 대표적인 농산물수출국인 미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2%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수치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기술혁신이다. 현대의 인간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뱀파이어 사회의 식량수급기술도 장난이 아니다. ‘블러드 뱅크’라는 거대기업은 완전 자동화된 최첨단 배양기에 인간들을 매달아놓고, 사육·번식시키면서 피를 추출·가공하여 시장에 독점적으로 공급한다. 그러나 인간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시장의 혈액가는 앙등한다. 식량고갈에 대비하기 위한 대체혈액 개발을 연구중이지만 아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혈액수급을 둘러싼 사회갈등이 증폭되어 간다. 소요사태가 빈발하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같은 뱀파이어의 피를 빨아 변종이 된 ‘서브사이더’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이들을 단속하는 국가폭력의 행사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서브사이더(subsider)들은 뱀파이어들 중에서 냉혹한 자본주의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이다. 뱀파이어 사회는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을 보듬고 함께 살고자 하는 복지 개념이 없다. 비싼 혈액을 살 수 없어 피를 오랫동안 굶게 되면 점점 흉측한 괴물로 변해가는데, 동족의 피를 먹거나 자신의 피를 먹으면 그 변형이 빨라진다. 이들은 박쥐처럼 몸이 변하고 뇌는 제 기능을 못한 채 인격이나 품위도 없이 적나라한 흡혈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들의 신체 변형은 빈민, 부랑자, 그리고 빈곤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범죄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박멸의 대상이다. 냉혈한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이 착취하는 인간에게는 물론이고, 동족에 대해서도 연민의 감정이 전혀없다. 다만 자신들이 저렇게 되지 않았음을 안도하며 사회가 그들을 제거해주길 원한다. 서브사이더들은 엄혹한 법의 적용을 받는다. 아케이트에서 타죽는 서브사이더들을 보는 말쑥한 차림의 ‘죄없는 이들’도 흡혈의 욕망을 지녔다는 점은 저들과 똑같지만, 그 욕망을 경제력에 의해 어떻게든 충족시키며 세련됨과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피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회사의 이름이 ‘블러드 뱅크’ 라니,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것이 없으면 괴물이 되어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것. 모두가 갈구하는 유일한 가치. 피같은 돈! 흡혈-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는 곧 화폐’ 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처럼 순환하는 것은 화폐이며, 그것을 돌리는 심장이 은행이다. 이들은 착취할 자본의 외부가 얼마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성장을 계속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룩할 ‘대체제’를 개발하기에 힘쓴다. (은행에서 만드는 대체제라…이를 단순하게 대체연료로 이해할수도 있지만, 이윤율 저하로 더 이상 이윤을 발생시킬 수 없는 축적의 위기에서 만들어 낸 수많은 금융파생상품이 연상되기도 한다.)

우리의 주인공 에단호크는 흡혈 자본주의 체제안에 살면서도 피 빨리는 인간들에 동정심을 느끼는 ‘양심적인 과학자’이자 인간의 피를 먹는 것을 거부하여 신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채식주의자(?)’로서, 자신의 양심을 대체제 개발에 쏟는다. 그의 생각은 대체제를 개발하면 더이상의 자연이나 타자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지 않고, 사회 내부의 경제난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일종의 공정무역론자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녹색 자본주의를 꿈꾸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개발을 독려하는 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대체제가 있더라도 진짜만 원하는 상류층을 위해 인간의 흡혈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실물 영역없이 금융자본만으로 자본주의가 굴러가진 않는다.)  그러니까 이는 한계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거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뱀파이어가 되기를 거부하고, 뱀파이어들로부터 피 빨리는 것을 거부하며 사는 이들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좌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들은 흡혈 자본주의의 적이고, 주류사회로부터 내몰려 변방으로 쫓겨다닌다. 이들은 흩어져 있는 인간들을 찾아 합류하고 얼마남지 않은 인간의 음식물을 나눠먹으며, 자신들끼리 진지를 구축하고 대안적 형태의 삶을 산다. 그러나 이들은 군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사살되거나, 생포되어 ‘공포의 향취’ 가득한 혈액을 뽑히거나, 뱀파이어-자본가의 딸의 경우엔 뱀파이어로 개조되어 주류사회로의 편입을 강요당한다.

이들 중에는 한번 뱀파이어 였다가 인간으로 ‘전향’한 자가 있다. 그는 잘 나가는 뱀파이어 기술자였는데, 어느날 우연한 사고로 죽다가 살아나면서 더 이상의 흡혈을 욕망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전향’은 머리 속에서 생각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문제이자, 욕망을 바꾸는 문제이고, 존재를 바꾸는 것, 즉 몸을 바꾸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뱀파이어였다가 인간으로 ‘전향’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대체제를 연구하던 에단호크에게 불같은 희망을 준다. 대체제를 개발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 아니라, ‘지속 가능치 않은’ 흡혈의 욕망을 지닌 존재로부터 ‘지속 가능한’ 욕망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사고과정을 자신의 몸에 재현하여 스스로 인간이 된다. 그리고 최초의 전향자의 희생을 통해 전향한 자의 피가 뱀파이어를 다시 인간이 되게 하는 치료제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뱀파이어였다가 다시 인간이 된 자들의 피, 즉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인간(초인)”의 보혈과 희생으로 뱀파이어가 다시 인간이 된다는 설정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뱀파이어가 인간이 되는 방식은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는 방식과 완전히 반대이다. 뱀파이어(가해자)가 인간(피해자)을 물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같은 속성이 된다. 이것이 가학적 전염의 논리이다. 학대를 당하던 이가 학대를 하는 이가 되고, 피착취자가 착취자가 되는 가학의 논리를 통해 세상은 가학자, 강한자, 포식자들로 넘쳐난다. 자본주의가 외부를 잠식해가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번엔 반대이다. 무는 자(가해자)가 물리는 자(피해자)의 존재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전향한 인간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 몸을 내어주면 그것을 먹은 뱀파이어들은 다시 인간이 된다. 기독교적 순교나 들뢰즈의 마조히즘적 저항이 연상되는 이 방식은 실로 엄청난 전염력을 지닌다. 한 몸을 열명이 뜯어먹으면 10의 n승, 그러니까 기하급수 정도가 아니라 멱급수적 증가가 가능한 것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에서 이 세계를 구하는 방식은 대체제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브레이커스’, 즉 ‘새벽을 여는 사람들’ 이라는 조어를 제목으로 채택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치료제는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이다. 실로 엄창난 반자본주의 영화가 아닐 수 없다.

– 황진미

응답 7개

  1. lumiere말하길

    평론 정말 잘 읽었습니다.
    피와 자본. 정말 적절한 비유네요.
    허심관 매혈기에서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오늘날 가장의 역할과 경제적 부담감을 나타내던 것이 떠오르네요.
    피. 욕망.
    ‘자본’에 대한 욕망의 절제가 가능한 날이 올까요..? 그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2. 지장보리말하길

    와우, 멋진 평론입니다.
    영화를 참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런 해석의 즐거움까지!

  3. 말하길

    우와…저는 보는내내내내 너무 힘들어서 별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은 안했어요. 아무정보도 없이 봐서 그랬나. -_- 아무튼 재미있네요. 이런 글을 보니까

  4. 젊은이말하길

    내일 당장 보러가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5. 뺑덕어멈말하길

    아, 이 영화 꼭 보고 싶다.

  6. 그저물처럼말하길

    이렇게 훌륭한 해석이……감사합니다.

  7. 안티고네말하길

    와~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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