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9호] <심야식당>,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 편집자

<심야식당>,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자고, 하루 세끼 집 밥을 먹는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아빠의 인생 철학이었다. 수능 시험을 치고 서울 신림동에 사는 언니의 자취방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나는 고등학교 내내 아침밥을 먹고 다닌 거의 유일한 아이였다. 아빠가 오래 보관이 되는 마른 반찬을 싫어하셨던 터라, 엄마는 매 끼니마다 한 두개의 반찬을 새로 하셨다. 금방 지은 밥, 따뜻한 국, 참기름 냄새를 듬뿍 담고 있는 제철 나물들, 상에 올리기 직전에 썰어 내놓은 김치, 계란말이나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부친 전. 이건 온 가족이 함께 먹을 때의 우리 집 밥상이다. 가끔씩 재료가 마땅치 않을 때, 엄마는 냉장고 구석구석을 뒤져 남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비빔밥을 해 주셨다. 분명히 먹다 남긴 반찬들인데도 엄마가 김치를 송송 썰어 양념과 함께 비벼주시면 근사한 요리같은 맛이 났다.

대학생이 되고 서울 생활을 해 보니 내가 이제껏 자주 먹어보지 못했던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 그 무렵 나는 대학생 기분을 한껏 낼 수 있는 돈까스며 스파게티, 근사한 햄버거들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예쁜 접시에 나오는 그 화려한 음식들은 이상하게도 먹으면 속이 불편했고, 금방 질려서 생각처럼 매일매일 먹을 수 없었다. 게다 학생식당은 또 어떻던지. 점심 때 김치찌개가 나오면, 저녁 때 남은 김치찌개에 몇가지 재료를 추가해 부대찌개가 나오는 학생식당. 바쁜 수업 일정 틈틈이 학생식당에서 그 밥을 묵묵히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있자면, 이건 한끼 식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찰기 없는 학생식당 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없었고, 차갑게 식은 반찬은 항상 느끼했다. 나는 종종 이 말을 되뇌이곤 했다. “이렇게 애정 없는 음식이라니.”

그 무렵의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게 바로 <심야식당> 같은 곳이었다. 심야식당은 신주쿠 귀퉁이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식당으로,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칼자국이 난 ‘마스터’가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운영하는 재미난 곳이다. 메뉴는 사실 정식세트 하나와 술 몇가지 뿐. 하지만 손님이 주문하면 재료가 있는 한에서 뭐든지 대충 만들어준다는 것이 마스터의 운영 철학인지라 이런저런 메뉴들이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예컨대 만든지 하루가 지나 적당히 굳은 가정식 카레, 밥 위에 가다랑어포를 얹어서 간장에 비벼먹는 고양이 맘마, 싸래기 눈이 내려 손발이 꽁꽁 얼었을 때 먹고 싶어지는 따뜻한 크림 스프같은.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심야식당의 단골 손님 말을 빌자면 마스터의 요리는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닌데, 왠지 정겨운 맛”이 난단다.

한 밤중에 심야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마치 엄마가 냉장고를 뒤져 재활용(?)해 준거 같은 음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뜻밖의 재회를 한다. 문어 모양 비엔나 소세지를 좋아하는 겁 많은 야쿠자 류씨는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게이 코스즈씨와 친구가 되었다. 젊고 늘씬한 심야식당 단골이 번번이 다이어트를 할 때마다 리바운드(요요현상!)로 살이 더 찌고 마는 귀여운 대식가 마유미씨에게 반하기도 한다. 음식 취향이 잘 맞는다며 자주 같이 식사를 하던 단골들은 경찰과 도둑으로 만나고, 함께 라면 한 그릇을 비우던 그녀들은 알고보니 고부지간이었다.

심야식당의 단골들이 어떤 관계가 되는 것은 항상 음식을 나눠먹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스스럼 없이 자기 그릇의 “맛있는건 아니지만 먹고 싶어지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왜 <심야식당>의 요리는 특별해 보이고, 옆 사람이 먹으면 따라서 먹고 싶어지는 걸까. 아마도 그건 심야식당의 메뉴가 본래는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과 손쉽게 만들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요리이기 때문일 거다. 야심한 시간, 화려한 신주쿠를 뒤로하고 모여든 배고프고 외로운 사람들. 이들을 심야식당으로 불러 모으는 어떤 공통점으로 인해, 심야식당의 단골들은 서로에게 식구가 되어 준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같은 밥 한 공기를 비우는 그 순간만큼 평등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순간이 또 있을까.

함께 먹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주워 들은 얘기인데, 건배를 하는 전통은 본래 서양에서 서로의 술에 독을 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행동이란다. 잔을 부딪쳐 술방울을 서로 나눔으로,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상대방에게 밝히는 것이다.비단 신뢰 뿐 아니라 한 끼 밥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심야식당의 손님들은 남에게 쉽사리 털어놓지 못할 여러 일들을 당할 때마다, 이 곳에 찾아와 자기만의 메뉴를 주문해 우선 배를 채운다. 가족 간의 화해를 위한 밥, 실연을 달래주는 밥, 외로움을 삼키기 위한 밥, 자축하기 위한 소박한 밥. 신기하게도 배가 든든하면, 마음도 너그러워지기 마련이다. 먹는 것에는 신선하고 깨끗한 재료, 멋진 요리 솜씨를 넘어서는게 있다. <심야식당>에서 거래의 형태로 나누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안티고네

응답 6개

  1. 말하길

    몇일간 정신없이 이 만화를 본 후,

    비앤나 소세지를 사와 문어모양으로 잘라 먹고
    하루 묶힌 차가운 카레를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먹곤 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서 왜 마누라와 히히덕 거리며 심야 식당 메뉴들을
    따라 해 먹었는지 알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2. 이경말하길

    심야식당~! 저도 연초록님처럼 드라마로 먼저 보았습니다.
    이 글 보고나니 가볍게 한 편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심야식당. 참 이상한 식당이지요 ㅎㅎ
    따로 오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
    글 잘 봤어요 ^^

  3. 요코코말하길

    밥을 함께 먹는 것도, 함께 만드는 것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수유너머에서 배운 것 중 하나랍니다. ‘함께 만들고 먹는다’ ‘어디서든’ 한 번 해봄직한 일인 것 같습니다.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 안티고네말하길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함께 만들어 먹는것, 같이 차려서 먹는것~ 참 좋죠잉~

  4. 연초록말하길

    심야식당이 원래는 만화였군요.저는 드라마로 보았습니다.일본드라마를 4년째 보고 있는 중인데

    처음에는 일본어 듣기교재용으로 시작했다가 드라마의 다양한 내용이 재미있어서 계속 보게 되네요.

    심야식당에서 마스터가 손님이 주문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음식을 못하는

    저는 참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지요.그런데 이 드라마를 함께 보는 다른 한 사람은 이 드라마에서

    소개되는 음식을 직접 집에서 만들어서 먹어본다고 하는 말을 듣고 아하 하고 놀란 기억이 나는군요.

    어려서부터 마이너스손이라고 느낄만큼 손이 무디었던 저는 그래서 공부로 도망을 갔고 그 장소가 편해서 늘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문제에서 도망을 다녔지요.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손 맛이란
    이모손맛이 바로 다른 아이들이 느끼는 엄마손맛이었던 셈인데 안티고네님의 글을 읽고 있으니

    그 아이들의 결핍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오는듯해서 으스스해지네요.

    수유공간너머의 루니에서 드디어 음식만들기와 대면해야 하는 일이 제겐 인생의 가장 큰 언덕을

    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곳에서 제 삶이 변화될 것같은

    강한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어디서 무엇과 접속해도 마음이 열려있으면 길이 생긴다는 것

    그것을 매일 매일 배우고 살고 있는 지금이 참 기쁘다고 마음속 깊이 느끼는 날들이 아름답습니다.

    • 안티고네말하길

      심야식당~드라마는 아직 못 봤는데…오다기리 죠가 잠깐씩 나온다고 ^^~
      저도 꽤나 마이너스의 손 계열이에요. 아주 못하는건 아닌데, 손이 워낙 느리고,
      조금만 낯설다고 느껴도 지레 겁을 먹고,
      안그래도 잘 못하는데 제 능력의 반도 발휘 못하는…

      그래도 요리의 세계는 참 즐거워요
      혼자 조용히 차근차근 요리를 하다보면 마음이 진정된달까요~

      항상 열심히, 꾸준히, 뭔가 도전하시는 연초록님 늠 멋지신 듯~
      주방에서, 즐거운 경험 하시길 바래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