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창간호] 탄생의 신비

- 편집자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탄생의 신비

코너 이름은 ‘매이데이’, 컨셉은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쓰는 육아 일기, 어때? 글쎄, 워낙 ‘모범적인’(?) 아이라 색다른 얘기가 없을 것 같은데. 왜, 재미있을 거 같은 데, ‘매이데이’, 써봐!

이렇게 해서 위클리 수유너머의 사람과 사물의 이야기의 한 코너를 매이 이야기로 채우기로 했다.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확 땡기는 이름 찾기가 어디 쉬운가? ‘매이데이’, ‘매이의 날(들)’.

메이? 매희? 매일 매(每)에 기뻐할 이(怡) 매이다. 나날이 달라지라고 ‘每異’라고 하려다가 너무 ‘차이’의 철학을 강요하는 것 같고 남들과 ‘다르다’고 매일 왕따 당할까봐 ‘每怡’로 했다. 이름 지을 때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국제적일 것, 부르기 쉬울 것, 참신할 것. 좀처럼 마음에 드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는 개념을 생각하지 말고 사건이 펼쳐진 시공간을 떠올리는 게 좋다. 라캉의 말마따나 ‘기의 없는 기표’로서의 고유명은 개념이 아니라 잠재된 사건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모유 수유와 아무 상관없는 ‘수유 연구실’처럼. 5월 첫째 주에 태어나니까, 오월이? 영어로 ‘메이’로 하면 어떨까? 그럼 너무 속보이니까 ‘매이’로 하자. 의미는 나중에 채우고 ‘매이’로 부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썩 국제적이고, 부르기 쉽고, 확실히 특이하다.

제왕절개를 해야 해서 출산날짜를 미리 정할 수 있었다. 수정일로부터 정확히 266일 되는 날이 5월 5일인데 휴일이라 5월 1일로 하려다 또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5월 3일로 결정했다. 제왕절개를 해야 했던 이유는 초산의 산모가 서른아홉의 나이였고 고통에 대한 공포계수가 남들보다 세 배는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전치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태반이 자궁 입구에 바짝 붙어 있어서 자연분만이 불가능했다. 수정란이 자궁벽 안쪽에 착상하지 못하고 줄줄 미끄러지다 아슬아슬하게 자궁 입구에서 턱걸이를 한 셈이다. 하마터면 기적처럼 찾아온 임신 기회마저 사라질 뻔 했던 것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비밀을 다루지만 가장 근원적인 비밀은 탄생의 비밀이다.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가 아니라 욕망의 차원에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욕망은 무엇인가? 그 얽히고설킨 욕망이 태어날 아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뭐 이런 거. 사실 나는 꼭 자식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혈통관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렵기도 했다. 아내 역시 비슷했는데, 마흔을 코앞에 두니 어쩌면 인생에 주어진 기회를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린 것만 달랐다. 어떻게 할거냐. 잘 모르겠다. 남자가 왜 그러냐. 남자가 뭐? 이제 기회가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되냐? 뾰족한 결론도 없는 말다툼이 반복되고 그마저도 흐지부지 될 때였다.

터키로 패키지 관광을 떠나기 전날, 여덟 달 만에 성관계가 있었다. 여행의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가 간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레즈비언이었다. 그녀와 레즈비언 클럽에 다녀 온 탓이다. ‘그녀들’의 감도 높은 연애 욕망이 전이된 듯, 혹은 자신의 젊은 시절 레즈비언적 욕망이 떠오른 듯 아내의 성욕 게이지가 상승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혼 후 부부관계 중 드물게 행복한 성관계가 뜻하지 않게 이뤄졌고 매이가 잉태되었다. 정확히 그날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임 기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몸에서 난자가 생성되기까지는 이틀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아직 존재하지 않던 ‘매이’의 존재 욕망은 그 기다림의 공허함과 비행의 압력을 견뎌낼 정도로 강했다.

임신 사실을 안 것은 두 달 후였다. 미혼 커플은 더 하겠지만 자식을 기다리고 있지 않던 남자가 임신 사실을 통보받을 때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여자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 여성들은 자기 몸의 변화를 통해 예감하지만 남자들에게 임신 사실은 외부로부터 난입하는 충격일 수 있다. 그 순간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고 둘 간의 관계 자체를 의심하는 건 과한 해석이다. 나는 딱 10분 동안 복잡한 마음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다 ‘자 이제 뭘 해야 하지?’ 라고 말했다. 어차피 생명은 부모의 의도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의 연쇄 속에서 태어나는 법.

비행기의 압력과 흔들림으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던 생명의 씨앗은 질긴 인연의 사슬을 붙들고 엄마의 자궁 입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복용한 감기약의 기운과 알고도 직업상 시사회장을 쫓아다니며 본 영화들의 오욕칠정을 다 견디고 태어난 매이의 존재 욕망이 어떤 것일지, 그 욕망이 그보다 먼저 태어난 우리들의 욕망과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펼쳐낼 현실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젖꼭지를 향해 돌진하는 매이를 보며 아이는 부모가 낳는 게 아니라 부모를 통해 스스로 태어나는 것임을 알았다. ‘매이는 어떻게 엄마 속에 들어왔어?’라는 아내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세살박이 매이는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입으로 쑤욱 들어갔지’라고 답한다. 가임연령 턱걸이 엄마의 척박한 자궁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잘 매달려 있어줘서 고마워 매이야. 다른 건 몰라도 매이는 턱걸이는 잘할 것 같다.

– 매이 아빠

응답 8개

  1. 매이 엄마말하길

    매이가 태어난 5월 3일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날이더군요. 바로 프랑스 68혁명 발발일이 5월 3일이라고 합니다. 매이는 매이데이와 68혁명의 기운을 받아 ‘혁명적인’ 인물로 자랄까요? 아니면 레즈비언 클럽의 정기를 받아 촉망받는 레즈비언으로 자라날까요? 터키행 왕복 비행기 안에서 수정과 착상이 이루어졌으니 글로벌한 역마살이 낀 사람이 될까요? 뭐 무엇이 되든 좋겠습니다. 튼튼하게만 자라주면은요.

  2. 모모말하길

    사무실에서….
    글보다 혼자 킥킥 웃었습니다.
    매이는 좋은 아빠를 가졌군요…

  3. 가난한 의자말하길

    기대되는 매이데이예요. :)

  4. 매이아빠말하길

    저도 즐거운 강의였습니다. 열정적으로 들어주셔서 감사했구요. 앞으로도 좋은 배움터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주에 뵈요.

  5. 이순희말하길

    재미있게 잘 읽었네요. 육아일기를 쓰는 아빠를 둔 매이는 참 좋겠다. 나중에 커서 읽으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시작한 인문학 강의 재미있고 유익했어요. 내내 딴 생각을 할 수가 없더군요. 다음강의도 기대하겠습니다.^^

  6. 박혜숙말하길

    샘, 소문대로 화끈합니다. 뭉클한 데다가 유머까지!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7. 장동건말하길

    크하하하!! 너무 재밌습니다. ㅎㅎ 이거 사생활 대공개로군요!!^^;;

  8. 알라말하길

    아..뭔가 재미있고, 짠하네욤. ㅋㅋ이거 연재 맞죠? 다음 글 기대됩니다.
    참!! 이 글을 읽는데, 저도 육아일기를 연재하고 싶다는 욕망이 마구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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