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9호] <2001 Space Fantasia>, 우주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 편집자

<2001 Space Fantasia>, 우주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만화

어렸을 적 나는 궁벽한 시골에 살았다. 하루에 버스가 10대 조차 다니지 않는 곳. 도로는 어디나 비포장이었고 집 앞엔 넓은 개천과 논밭이, 집 뒤엔 수풀 무성한 산이 있었다. 이웃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정겨운 곳이었지만 밤에만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가로등조차 없어 밤이 되면 칠흑같은 어둠이 세상을 둘러쌌다. 세상을 집어 삼킨 어둠 속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후레시’라 부르던 손전등뿐이었다. 게다가 밤은 어찌나 길던지.

가끔은 후레시를 들고는 밖에 나가 하늘을 보곤 했다. 하늘에 빼곡히 가득 찬 별들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고는 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혹시나 별을 더 잘 보고 싶었는지 하늘을 향해 후레시를 치켜들고는 깜빡깜빡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보기도 했다. 누군가 먼 우주 저편에서 이 신호를 받아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수십 광년 떨어져있다는 저 별에 이 빛이 수십 년 뒤에는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초속 30만 km,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로도 저 별에 닿으려면 수십 년이 걸린다고 한다. 수십 년 뒤 우주 저편 어느 별에서 반짝이는 후레시 불빛을 발견하더라도 그 소년은 이미 지구에서는 중장년이 되어 있어있겠지. 바꿔 말하면 하늘에서 보는 모든 별들의 모습은 수십 광년, 혹은 수억 광년을 달려온 수십, 수억 년 전 과거 모습이라는 말이다.

숨은 명작!

<2001 Space Fantasia>는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우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화 제목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라는 SF 소설에서, 부제 <2001 야화>는 <천일야화>에서 각각 따왔다. ‘야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작가는 독립된 단편들을 ‘~번째 밤’이라는 이름으로 엮어놓았다. 천 개의 이야기를 담아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20개의 단편으로 만화는 끝난다. 각 단편들은 서로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시간 순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첫째 밤: 위대한 선조>가 지구로부터 우주로 떠나는 우주 여행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라면, 스무 번째 <마지막 밤: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우주에서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스무 개의 단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열여덟 번째 밤: 사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새 인류는 지구를 떠나 우주 곳곳 여러 콜로니를 건설하며 살아가고 있다. 라자루스는 기에나 III-2라는 소행성 콜로니의 주민이다. 그의 일터는 우주. 그런데 불행히도 갑자기 출현한 블랙홀에 그의 작업선이 휩쓸려버리고 만다. 라자루스는 작업선과 함께 소립자 단위까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우주의 먼지가 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분 안팎. 그렇게 라자루스를 빨아들인 블랙홀은 우주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라자루스가 우주에 삼켜지고 난 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간다. 30년 뒤, 알 수 없는 괴질이 퍼지자 사람들은 기에나 III-2의 콜로니를 폐기하기로 결정한다. 우주선을 타고 소행성을 떠나야하는 그 순간, 라자루스의 아내 샬롯은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라자루스를 삼켜버린 블랙홀이 다시 우주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더 놀라운 사실은 30년전 라자루스의 작업선이 그대로 있다는 점. 라자루스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그녀 역시 블랙홀로 뛰어든다.

1분 뒤면 우주의 먼지가 되는 라자루스의 작업선이 어떻게 30년이 지나도록 블랙홀에 잡혀있던 것이었을까? 여기에는 약간의 물리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이동하는 그 물체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점점 느려진다. 빛의 속도로 빨려든 라자루스에게 고작 몇 초였던 것이 밖에서는 몇 십 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라자루스는 마지막 몇 십 초를 30년 뒤의 샬롯과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샬롯은 30년 전의 라자루스를, 라자루스는 30년 뒤의 샬롯을 만난다. 그들의 만남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을 테지만 블랙홀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만남은 수 십 년, 아니 수 천 년이 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고 그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지속된다.

라자루스를 찾아온 샬롯, 라자루스에게는 고작 몇 십초가 지났을 뿐이었다.

과거와 만난 현재는 영원히 미래로

수 십 억 광년이나 되는 엄청난 거리조차 보잘것없게 만들어 버리는 광대한 우주를 상상하기위해 인간은 빛의 속도에까지 도전해야 했다. 그래서 빛의 속도를 넘어 우주를 가로지르는 데까지 상상력이 이르렀다. 혹시라도 우리가 미래에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순간적으로 우주 저편으로 도약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수십 만 년전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지구가 탄생하기도 전, 황무지같은 태양계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이렇게 우주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던 시간조차 집어삼켜버린다. 그래서 호시노 유키노부는 <2001 Space Fantasia>에서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우주를 그린다. 어떻게 보면 신화(과거)이면서 어떻게 보면 과학(미래)인 우주를. 이 만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인 동시에 먼 과거의 이야기인 셈이다. <천일야화>에서 부제를 따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2001년이 벌써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우주여행은 요원해 보인다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달조차 1969년 아폴로 11호 이후 인간의 발이 닿지 않았다. 무려 40년이 지나는 동안 우주에 내민 발걸음은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한 것이다. 사실 20세기의 우주 탐사 붐은 냉전의 자식이었다. 더 이상 우주에서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되자 우주는 무관심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영화도 만화도 더 이상 우주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SF의 시대 대신 판타지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래도 우주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어쩌면 우주는 앞으로도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선과 우주여행, 신비한 별들의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영원히 남아 있을지도. 하지만 우주는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신화와 상상력의 어머니였다. 거대한 우주 앞에서는 사실과 상상력, 과학과 신화의 경계가 무의미할 뿐이다. 어릴 적 한번이라도 우주를 동경했던 사람이라면, 지금도 우주를 꿈꿔보고 싶다면 <2001 Space Fantasia>는 매우 반가운 작품일 것이다. 마치 정통 SF소설을 한편 읽는 것 같은 뿌듯함을 선물해준다.

불행히도 숱한 SF 소설들이 그리던 것보다 21세기는 심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꿈꿀 자유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번쯤 캄캄한 별들의 바다로 시선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덧: 구하기 쉽지 않지만 절판된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다른 단편 모음집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도 강추. 아울러 작가는 다르지만 SF 마니아라면 목성 탐사까지의 여정을 그린 <플라네테스(전 4권)>도 추천한다. 문제는 이 둘 모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것!

– 기픈옹달

응답 2개

  1. 뎡야핑말하길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는 애니북스에서 올해 출간한대요 ‘ㅅ’ ㅎㅎ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