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9호] 편집자의 말 – 만화, 만만치 않습니다

- 편집자

만화, 만만치 않습니다

“9호는 쉬어가는 느낌으로 만화 어때?” 편집회의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 바로 나온 답변이 “만화가 그렇게 만만해?”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속웃음이 나왔습니다. 오래 전 아내에게 들었던 말이거든요. 만화 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 사귀던 때에도-그러고 보니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군요- 아내는 만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만화방은 아내가 저를 기다리는 장소였거나, 만나서 함께 찾아가는 장소였지요.

연인의 손에 이끌려 처음 만화방에 들어갈 때의 심정은, 엄마에게 들켜 만화방에서 끌려나오는 아이의 심정과 같았을 겁니다. 정말 내키지 않았거든요. 아내가 알지 모르지만 물가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이랄까. 대학 들어가서 꽤나 삐딱한 척했지만 실상은 고지식한 바보 범생이었던 거죠. 대학 다닐 때까지도 거의 만화방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른이나(!) 되는 인간들이 저마다 소파에 처박혀 키득거리는 게 영 이상했습니다. 소리라고는 후루룩~하고 입 속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면발이 입술을 문지르며 내는 소리가 전부였죠. 아내가 저를 타락으로 구원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전 금욕의 지옥 속에 갇혀 살 뻔 했습니다. 그렇게 만화방 앞에서 쭈뼛쭈뼛하던 시절 아내가 말했죠. “만화가 그렇게 만만해?”

촌구석에서 학교를 다니다 도시로 전학 왔을 때 선생님이 두 곳에 가지 말라하셨습니다. 오락실과 만화방. 정말 우리는 만화를 너무 만만하게 대했어요. 지금은 만화에 빠진 어른들이 이상해보이지도 않고, 만화로 한문, 역사, 지리, 철학을 학습시키는 출판사들이 한 밑천 잡는 때지만, 7-80년대에는 만화책이 거의 ‘공공의 적’ 수준이었죠. 역사상 많은 책들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고 하지만, 분서갱유로 따지자면 만화책을 당할 책이 있을까요? 한국 만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유명한 ‘만화책 대학살사건’이 있죠. 1972년 겨울, 한 아이가 만화책을 보고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며 시험 삼아 목을 매 죽어 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수만 권의 만화책이 화형에 처해지고 곳곳에서 추방 결의대회가 열렸죠. 그 불쌍한 아이가 그나마 성경을 읽고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인가요.

지금 수유너머 남산의 카페에는 작은 만화방이 있습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가져다 놓은 것이 이제는 제법 서가가 갖추어졌습니다. 제 하루 일과 중 하나가 점심 먹고 그 앞을 서성이는 겁니다. 번번이 허탕이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신간 코너를 보기도 하고, 이젠 읽을 게 없다며 조금 아껴 읽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합니다. 이제는 제법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고, 책으로 출판되는 것을 못 기다려,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는 성급함까지 갖추었습니다. 이 정도면 저도 꽤나 타락한 셈이죠.

<위클리 수유너머> 9호를 위해 수유너머의 몇몇 만화광들에게 최근에 본 인상적인 만화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것은 최근에 출판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제법 오래된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만화 추천도 적극 환영입니다. 사실 저도 맘 속 깊은 곳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몇몇 장면들이 있답니다. 일본 만화 <내일의 죠>(다카모리 아사오, 지바 데쓰야)에서 ‘카운터’, 그리고 ‘카운터에 대한 카운터’로 한없이 상승하며 나중에 ‘하얀 빛’으로, 그리고는 그 ‘빛의 재’로 남은 죠의 마지막 모습. 권가야의 <해와 달>에서, 녹슨 칼을 딱 필요한 만큼의 속도 -절대 속도란 이런 거겠죠-로 휘둘러대던 무사의 모습, 좀처럼 잊을 수 없습니다. 제게 자전거를 충돌질했던 박흥용의 <내 파란 세이버>, 답답한 만화 칸을 깨고 나가는 그 시원함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허영만의 <48+1>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가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마음 속 화투 한 장 때문에, 잘린 손목에 끼운 갈고리가 부르르 몸을 떨어대지요. 아내가 소개해준 일본 작가 츠게 요시하루의 <나사식>. 도무지 스토리를 종잡을 수가 없는데도 제 깊은 무의식에 그 군상들이 몰려다니는 것 같습니다. 만화라는 게 정지된 그림에 대사 몇 마디가 활자로 찍혀 있을 뿐인데, 왜 그리 맘속에서 오랫동안 꿈틀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대강 모두가 다 아는 유명 작품들뿐이네.” 아내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릴 것 같습니다. 참, 이거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만화,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응답 3개

  1. 이상엽말하길

    잘 나가는 윤태호는 없네. ^^
    요즘 무슨 지방의 조그만 야구단 취재다니나 보던데… 신작 준비인 듯 해요.
    나는 담달부터 진보신당과 함께 4대강으로…!
    4월에는 함 봐야하는데… ^^

  2. 노니말하길

    82쿡에서 intothesef님의 소개로 이곳을 알게된 노니입니다.
    저는 전철이나 사람많이 모인 곳에서의 군상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하나하나 모습을 잡아내서
    만화를 그린 만화가들이 생각 납니다.
    눈가에 별하나, 땀방울 하나를 덧대어 그렸을뿐인데…
    만화속 인물들의 성격이나 마음을 읽도록 그려내는 만화가들….
    진정 철학자가 아닌가 생각도 해본답니다.

    저는 초딩시절 만화빵에를 선생님이나 어머니 몰래 들락 거렸는데…
    만화빵에 갈때는 선생님이나 어머니보다, 호환마마보다 더무서운
    같은반 친구가 없는가 필히 살펴보아야 했지요.
    그친구가 다음날 선생님께 “노니 만화빵 가는것 봤다”고 밀고하는것이
    제일 무서운 일이죠.
    나름 모범생라인으로 서려는 저에게 동료로부터의 비판은
    선생님으로부터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커다란 모욕이 될수있던 단순한 시절이었거든요.
    나름 제가 즐겨하던 방법은 학교에서 먼 만화빵으로 가는것….
    쫀드기 하나사서 질겅질겅 찝으면 보는 만화맛이란 …
    즐겨보신분만 아실 것입니다.^^

    위의글을 읽으니
    김삼님의 007시리즈?(생각이 가물가물^^),
    고바우영감님
    꺼벙이
    황순원의 순정만화들…
    보면알것 같은데,
    이름이 생각안나는 많은 만화들생각으로 이아침이 즐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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