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10호] 편집자의 말 – 노근리라고 쓰고 대추리라고 읽는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노근리라고 쓰고 대추리라고 읽는다

 

<작은연못> 시사회 날. 친구 따라 극장 갔다. 일전에 얼핏 들었다. 노근리 사건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대추리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알고 갔다. 친구가 그랬을 리 없다. 내 머릿속 편집기 소행이다. ‘노근리’를 ‘대추리’로 접수한 것이다. 극장 안. 무대인사 차 올라온 제작자가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에 맞춰 영화를 개봉하게 됐습니다.” 그 순간 왜곡됐던 기억이 재빠르게 돌아왔다. “아! 맞다. 노근리였지!” -_-;

<작은연못>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충북 노근리에서 피난민 500여명이 미군에 사살당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동화적인 느낌의 다큐멘터리다. 어르신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장기 두고,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토끼처럼 뛰어 다니고, 소학교 운동장에는 긴 생머리 선생님이 치는 풍금소리가 울려 퍼진다. 작은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이 수채화톤으로 그려지다가 점차 마을 전체가 총성, 울음, 그리고 피로 얼룩진다. 계절이 바뀌어 만산홍엽 물든 가을이 됐을 때, 마을엔 25명의 주민만이 남는다.

베트남 밀라이 사건과 더불어 20세기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기록된 노근리 사건을 담은 <작은연못>은 전쟁에 저항한다. 여수, 순천, 제주도 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명 양민학살 사건. 국경 넘어 르완다, 이라크에서도 일어난 전쟁을 봐도 그렇다. 어떠한 전쟁이든 희생자는 민간인 이라는 것. 그들은 전쟁을 원한 적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노근리라고 듣고 대추리라고 읽었던 나는 ‘마을단위’로 벌어지는 일들의 끔찍성에 주목했다. 구전동요처럼 리리리리(里)자로 끝나는 사건들은 그만큼 변방에 사는 무지렁이 민초들이 피해를 입는다. 2006년 대추리 주민들도 평택 미군기지 확장으로 집과 땅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야했다. 무차별 폭격이 없다 뿐 노근리와 추방의 메커니즘은 유사하다. 벼를 자식같이 여기고 농부가 천직이라고 여기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평생 농사지은 땅에서 쫓겨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나라를 위하여’

예나 지금이나 마을 하나 없애는 것쯤이야 국가권력에게는 대수롭지 않다. 오랜 세월 함께 한 논과 집, 삶의 터전을 무참히 짓밟히고 마을을 떠나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주민교체 작업은 갈수록 활발하다. 더 잘사는 나라. 신성한 국방의 의무. 국가 경쟁력 강화. 뉴타운 건설이 절대 선이다. 신성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만으로도 죄가 성립되므로, 오직 복종만이 허용되기에 우리는 감히 물음표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묻는 게 중요하더라. 특히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겐 더 필요하다.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 될 수 있다. <작은연못>을 보던 날 낮에 나는 또 하나의 마을을 보았다. 인천의 배다리. 100년 된 학교 건물과 양조장, 성냥공장, 헌책방길이 남아 있는 인천의 유서 깊은 마을이다. 3년 전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와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마을이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결국 도로를 지하에 뚫기로 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겼다.

비결은 물음이다. 배다리에서 40년 헌책방을 운영한 곽현숙 씨는 말했다. “보상 넉넉히 받고 나갈까 싶었는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상해. 근데 내가 살던 데서 왜 나가야 하지? 나 스스로 묻게 되더라고요.” 그 길로 ‘박의상실’ 박 씨 아주머니와 시청 앞에 나가 피켓을 들었단다. 수억 보상금을 수십 년 삶터와 바꾸지 않겠다는 책방 할아버지도, 문화단체도 힘을 합쳤다. 높은 건물과 익명의 거주자로 채워질 뻔 했던 배다리는 마을맛 나는 동네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묻는 순간 삶이 조금씩 다르게 구성된다. 묻지마 개발에 물음표로 맞선 배다리 곽현숙씨. 묻지마 전쟁에 영화로 맞선 노근리제작팀. 묻지마 경쟁에 자퇴선언으로 맞선 고대생 김예슬씨. 묻지마 권위에 양심선언으로 맞선 변호사 김용철씨. 묻지마 징병에 병역거부로 맞선 수유너머 현민씨. 이들은 모두 이 시대의 자명한 감각에 감히 물음표를 던졌다. 왜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희망적이다.

– 은유

응답 2개

  1. 느림말하길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에 던지는 물음표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냥좀 넘어가지…뭘 그렇게 까칠하게….물음표란…용기의 또 다른 이름인것 같습니다.

  2. sros23말하길

    자명한 감각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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