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10호] 잠과 시간과 여행(안나푸르나의 로지, 네팔)

- 윤여일(수유너머R)

1.

안나푸르나에서 트래킹을 하는 동안에는 매일 묵는 곳이 바뀐다. 로지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식사부터 주문한다. 시간이 제법 걸리니까. 밥이 나오는 동안 샤워를 하면 말끔하련만 그게 쉽지 않다. 추워서 옷을 벗으려면 결심이 필요한 데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려면 나무 두 그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개중에는 낮에 비축해둔 태양열로 물을 데우는 곳도 있다. 상쾌함과 자연보호 그리고 추위를 두고 타협을 벌인 결과 샤워는 사흘에 한 번 꼴이다.

어디에 가나 메뉴는 벼, 감자, 밀 셋 중 하나로 만든 것뿐이라서 다소 단조롭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면 이 침대는 대체 언제 청소했을까 싶다. 침대 위에 침낭을 깔고 쏙 들어간다. 사실 침낭도 빌려온 데다 며칠째 그냥 쓰고 있어서 더럽기는 마찬가지이나 사람 심리란 건 참 묘하다. 내 몸에 며칠 닿았다고 오늘 처음 본 침대보다 당연히 깨끗하다고 여겨진다. 이건 집착의 시작일까 애정의 첫 단계일까.

4시 경에 로지에 도착해 저녁도 먹었으나 밤은 아직 길다. 바깥 공기는 너무 쌀쌀해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산 속에서 해는 빨리 떨어진다. 로지의 레스토랑에 머무는 수밖에 없다.

레스토랑 안은 둘러봐도 동양계 여행자는 없는 모양이다. 항상 손만 댔으나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이럴 때 보려고 챙겨왔다. 드디어 책장을 넘긴다. 그러다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북에 옮겨 넣는다. 이따금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가 시작된다. 대개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왔는지, 앞으로의 행선지는 어디인지로 말문을 열게 된다. 그런 질의응답은 이곳에 올 때까지 서로 간에 몇 번이나 해왔으니 대화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지금 노트북에 쓰고 싶은 표현들을 영어로 떠들 재간도 없단 말이다. 몇 번 오가던 의례적 물음들과 답변들이 끊기더라도 주위의 복작대는 소리들로 시무룩한 분위기는 감추어진다. 로지에서는 카드 치는 사람들이 많다. 따뜻한 홍차를 홀짝거린다.

… 외롭다. 이런 밤이 며칠씩 계속되면 외로움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부드러운 혹은 충만한 외로움이다.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이렇게 혼자 있었다면 외로움의 질감은 달랐을 것이다. 내 기분과 주위 분위기가 대조되어 쓸쓸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나그네들뿐이다. 다른 인생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추위를 피해 한 순간 한 장소에 모여 있을 뿐이다.

서로가 품고 있을 고립감이 홀로 느낄 고독감을 덜어준다. 혼자라는 느낌은 묘하게 희석되어 서로에게 이방인뿐인 이 공간 속으로 마음이 녹아들어간다. 단 하루만을 보내는 이방인들을 매일 같이 품어내는 이곳에는 어떤 시가 있을 것 같다.

2.

서너 시간 그렇게 있으니 장작도 거의 다 꺼져간다. 콧물을 손으로 훔치는데 여기 내가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여러 정체성과 관계들은 서울에 두고 몸둥아리, 감정덩어리, 하나의 정신으로서 여기 낯선 곳에 와서 다 식은 홍차를 마치고 있다.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 하고 싶은 말들이 고인다. 자신과 잘 대면할 수 있는 곳은 집이나 직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낯선 곳일지 모른다.

잠을 청하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에 있다가 나오니 바깥 추위는 곱절처럼 느껴진다. 하늘의 별들은 모두 일등성이다. 숙소로 들어가 또 한 번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랜턴을 끄면 시각의 세계는 멎고 방 안은 소리의 세계로 바뀐다. 몸을 뒤척이는 소리, 바람이 창을 때리는 소리, 나뭇가지가 서로 스치는 소리, 코가 막혀 거칠어진 내 숨소리.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 하지만 침낭에서 나와 저 바람의 세계로 나서려면 수 분 동안의 결의가 필요하다.

피곤하다. 침낭 속에서 태아처럼 웅크린다. 나를 조이고 있는 나사들이 하나씩 풀린다. 내 온기가 나를 포근히 감싼다. 시간은 몸속으로 꿀처럼 흘러 들어온다.

3.

이제 오늘부터 하산길이다.

“빠른 스텝에 취해버린 나를 멈춰 세우고 너의 단정한 모습으로 나를 위로하라. 그보다 먼저 고독의 시간을 달라.” 그런 소망을 품고 안나푸르나를 찾았다. 이제 떠난다. 아직 산을 벗어나진 않았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고 거기를 반환점으로 삼은 때부터 그 동안 떨어져 있었던 생활의 맥락들이 되돌아온다. 슈퍼맨에서 나오는 쇠붙이를 몸으로 끌어모으는 어느 악당처럼 근심거리도 돌아온다. 급하게 마감해야할 원고, 내년에 시작하기로 한 프로젝트, 이렇게 뛰쳐나오느라 잘렸을지도 모르는 아르바이트.

여행은 공간을 옮기는 일이나 시간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에 나왔다고 신체 상태가 변하는 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진학준비, 자격취득, 승진, 주택융자, 적립예금, 노후연금, 시급 등 삶을 죄어오는 시간의 형식들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자에게 시간은 그 사람 바깥으로 외재화되어 바깥에서부터 그 사람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서른까지 지내온 모양새를 보니 앞으로도 돈을 벌겠다고 저 시간의 형식들에 매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내 안에 나를 짓누르는 시계가 있다.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정말이지 이기적이다. 시간은 불가역적인데다가 늘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자본가가 단위시간의 채산성을 높이려고 분주하듯 나 역시 시간의 밀도를 높이고자 시간과 경쟁한다. 잠들기 전, 하루가 품을 수 있는 절박함이 이 정도였나 가끔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면 시간이 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맞서야 할 대상처럼 바깥에 서서 버틴다. 똑딱똑딱. 불안하다. 거기에 존재의 축소감마저 더해지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공허한 지속을 벗어나려는 무망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런 시간은 끝없이 이어진다. 시간을 손으로 세어보지만 손에서 세어나간다. 오늘은 이렇게 그만 마무리하고 내일의 힘을 비축하려고 불을 꺼보았자 생각의 꼭지를 잠글 수 없다. 밤이라는 치유의 시간은 속절없이 낭비된다. 신경에 거슬려 똑딱 시계의 건전지도 빼두었지만 내 짧은 삶의 시간을 비웃는 광년의 조소가 들려온다. 숨은 거칠어지고 잠들지 못하는 밤은 지속된다. 이러다가 아침을 맞을까봐 공포스럽다.

그런 밤에 여행을 떠올리면 조금은 위안을 얻는다. 여행이 그저 일탈이어서가 아니라 이처럼 부담을 안기는 시간의 반대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간은 신축적이다. 딱딱하지 않고 늘어나거나 줄거나 한다. 충만하며 빛깔이 살아있고 내게 밀착되어 있다. 이렇게 시간에 시달려서야 나는 천상 여행생활자나 방랑자는 될 수 없다. 다만 상상 속에서 이 버거운 시간을 여행의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지금 시간을 좀 더 촘촘하게 사용하여 그만큼 나중에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늘어난다고 상상하면 숨통이 트인다.

다음은 어디로? 그 상상만으로도 나는 지금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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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2개

  1. 북극곰말하길

    우오오오왔!! 이게 정녕 지구상에 존재하는 곳이 맞습니까! 사진이 너무 좋습니다.^^

  2. 인호말하길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 사진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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