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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정 막달레나공동체 대표 – 성매매여성들의 큰언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전선인터뷰 – 이옥정 막달레나공동체 대표

밥 앞에 평등

나뭇결이 벗겨지고 손때가 묻은 둥그런 밥상. 생선조림과 묵은지찌개, 호박전, 가지나물, 겉절이 등 9첩 반상이 올랐다. 푸짐하다. 게다가 3월 하순 다순 햇살이 비스듬히 밥상 위로 쏟아지니 잡지의 화보처럼 입맛을 돋운다. 첫술을 뜨며 두런두런 이야기 오가고 젓가락이 스친다. 반찬이 금세 동났다. 밥 한 그릇 뚝딱 비운 식구들은 가위바위보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느라 왁자지껄 소동이다. 성매매여성들의 쉼터 ‘막달레나의 집’ 점심시간 풍경이다.

“이 둥그런 밥상을 20년 넘게 썼어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평등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지요. 튼튼하고 아주 좋아요.”

운 좋게 설거지를 면한 이옥정 대표가 밥상의 짤막한 다리를 접어 한켠에 세워놓는다. 그와 밥상은 닮았다. 밥상이 매 끼니마다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듯 그도 그랬다. 그의 주변엔 늘 허기진 영혼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가진 걸 다 퍼주었다. 더운밥과 온정을 나누었다. 또, 둘 다 마루 신세다. 하루해가 저물면 둥그런 탁자는 벽에 기대어 잠들고 이옥정 대표는 바닥에 누워 등을 붙인다. ‘밥 앞에 평등’이라는 둥그런 마음으로 막달레나 집을 지킨 것이다.

떡국의 교훈 “베풀지 말고 나누자”

용산 주택가에 쉼터 겸 사무실을 두고 있는 막달레나공동체는 1985년 용산 성매매집결지의 허름한 방 한 칸에서 시작됐다. 어느 여름날이다. 용산역 앞을 지나다가 성매매여성과 그의 어린 딸이 취객에게 행패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옥정 대표는 그들의 삶에 눈 떴다. “오지랖이 넓어서” 끼어들었다가 삶이 얽혀버렸다. 용산에서 수많은 인연의 씨를 뿌리고 거두길 25년. 성매매여성들의 ‘큰언니’가 된 그는 현재 20명의 활동가들과 두 곳의 쉼터, 현장상담센터 등 막달레나공동체를 꾸려간다.

“한번은 떡국 나눔 잔치를 했어요. 식당 하나 빌려놓고 동네 몇 바퀴 돌면서 먹고 가라 했죠. 몇 명이 왔는데 어째 표정이 얻어먹고 간다는 느낌이에요. 나누는 게 아니고 베풀기만 하는 사람이 된 거 같았죠.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나오기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럼 우리가 가자. 들통 들고 돌았어요. 이 집은 몇 식구냐 물어서 떠주고 손님 있다고 그러면 손님 것도 한 그릇 더 주고요.

다들 “진짜 떡국이다. 맛있다” 반응이 좋았죠. 그동안 자선이 그랬잖아요. 남는 걸 주는 거. 그런데 김치도 새로 담고 멸치 다시도 진하게 냈더니 남아서 주는 게 아니란 걸 안 거예요. 나중에 그릇 가지러 가니까 아가씨들이 커피 물 올려놓고, 그릇 씻어놓고, 빈 그릇 주기 뭐하니까 자기네도 뭘 담아서 주더라고요. 아, 나눈다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았죠.”

떡국뿐이랴. 나눔은 말문을 틔워주고 문턱을 없애줬다. 이옥정 대표는 집집이 돌면서 세심히 살폈다. 집이 추워 기름이 필요한 사람, 발이 시려 버선 필요한 사람, 겉옷이 필요한 사람, 쌀이 필요한 사람 등등. 각각의 처지를 친정엄마의 눈으로 민첩하게 파악해두었다가 나중에 기회가 될 때마다 넌지시 챙겨주었다.

마냥 주기만 한 건 아니다.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얻어먹기도 필수다. 단, 줄 때처럼 받을 때도 지혜롭게 가려서 받는다. ‘밥 좀 해줘라’ ‘니가 끓이는 라면 최고야’ ‘나 김치부침개가 먹고 싶어’ 등등 손맛과 형편을 봐가며 얻어먹는다. 같이 밥을 먹다가 김치가 별로면 다음에 김치를 담가다 준다. 자연스레 받기는 주기로 연결되었다.

“그 애들 입장에서는 나도 누구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걸 굉장히 기뻐해요. 업주도 우리랑 뭘 같이 안 먹는데 큰언니가 먹어준다며 감동하죠. 물론 힘들게 번 돈이라서 마음은 편치 않지만 기쁘게 먹어요. 대신 다음에 담배를 사주든가 다른 방법으로 갚죠. 같이 먹어야 친해져요. 이것저것 다 떠나서, 나는 먹는 게 너무 좋아요. 먹을 게 없으면 화가 나고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하하.”

밥심 예찬이다. 더운밥 한 그릇,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의 힘은 실로 컸다. 예수님도 어디 가서든지 얻어 드셨다고 귀띔하는 이옥정 대표. 그에게 밥은 일상의 원동력이자 인연의 끈끈한 접착제인 것이다.

벽제화장터 “단골손님 오셨네”

이옥정 대표는 용산에서 장례전문가로 통한다. 요즘이야 성매매여성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지만 초기엔 달랐다. ‘창녀 하나 죽는 것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업주들은 아가씨가 낙태수술을 하면 부정 탄다고 굿을 할 정도였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몰랐다. 약물중독으로 죽고 암으로 죽고 간경화로 죽었다. 용산에서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족도 없고 빈소도 없어 시신실 앞 복도 의자에서 기도를 드려야했다. 비참했다. 그냥 둘 수 없었다.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당연히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외면하지 못했어요. 병이 생기면 우리가 무료병원을 알선해줘요. 병문안을 다니다가 죽으면 우리가 챙겨야죠. 한 사람 두 사람 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임종할 때쯤이나 초상만 나면 연락이 와요. 우리 애들 말고도, 동네 건달, 업주, 업주 시어머니까지 다 했죠. 영정 들고 관 들 사람이 없으니까 여자들끼리 들잖아요. 어디가도 티가 확 나고. 벽제화장터를 한 달에 서너 번 가니까 저희보고 ‘단골손님 왔다’ 그러더라고요.”

장례 치를 때 천주교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본인이나 가족 뜻에 따라 불교식으로도 치렀다. 이옥정 대표는 유가족과 같이 절을 했다. 모두가 회피하는 일을 묵묵히 마음 다해 처리했다. 처음엔 장례를 치르고 오면 뒤통수로 소금 뭉텅이가 뿌려지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호의적으로 변해갔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녀들도 동료가 죽으면 하나둘 장례식장엘 따라 나섰다. 업주들의 냉랭한 눈길이 걷혔다. 그 효과는 컸다. 업주 한 명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은 성매매여성 다섯 명의 삶이 바뀌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 지역의 공기와 문화가 달라졌고 “막달레나가 예쁨을 좀 받았다.” 막달레나공동체가 선교 단체도 아니고 종교적 색채를 내세운 적 없으나 숱한 죽음을 거둔 것은 성매매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는 계기가 됐다. 막달레나의 집 지하실에는 마지막을 함께 한 인연들의 ‘영정사진’이 보존돼 있다.

나는 좋은 추억 만들어주는 사람

‘아름다운 동행’은 초지일관 계속됐다. 이옥정 대표의 표현대로 “타고난 오지랖” 때문에 못 본 척 두 눈 감지 못해서 벌인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을 할 때 방 구할 돈을 빌려주고 상견례에 참석하고 이바지음식을 챙겼다. 친정엄마 노릇을 전담했다. 그 뿐 아니다. 아이가 있는 경우 엄마대신 소풍을 따라가고 운동회에서 뛰었다. ‘이모’ 자격으로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갔다. 직업을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성매매여성들을 위해 학교 가는 일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딱한 처지를 보면 제가 먼저 제안해요. 돈을 빌려줄 테니 원금만 갚으라고 하죠. 그렇게 해서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살아서 명절 때마다 찾아오는 애들도 있고, 결혼하고 연락을 끊는 애들도 있어요. 어쩌겠어요. 나는 비록 경제적인 피해를 봤지만 그 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식을 치러줬으니까, 큰 언니 땜에 결혼하고 산다는 건 알겠죠. 나는 그 돈 없어도 하루 밥 세 끼 잘 먹고 사니까 된 거고…”

좋은 추억 만들기. 이옥적 대표는 그것을 소임으로 알았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 중대사에 발 벗고 나서는 건 물론이고 소소한 추억도 놓치지 않았다. 신부님이나 지인들 모임에 꼭 그녀들과 같이 나갔다. 조건부 만남에 익숙한 그녀들에게 순수하고 편안하게 사람 만나는 기회를 주었다. 또 뮤지컬, 영화, 음악회를 보여주고 여행이나 캠프에 데려갔다. 감성체험을 통해 세상과 접점을 넓히고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막달레나에 와서 전부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에요. 애들이 다시 성매매현장에 안 갔으면 좋겠지만, 법을 만든 정부도 못하는 일인데…어렵지요. 저는 이런저런 끌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해요. ‘여기서는 니 얘기뿐이다. 또 와라’ 그러죠. 좋은 추억이 있으면 돌아오기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설사 오지 않더라도 자기인생에 행복했던 한 시절이 있다는 게 살면서 큰 힘이 되잖아요. 오고 안 오고는 어차피 본인 선택이고.”

늘 그랬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업주에게 시달리고 위협받기 일쑤였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필요했다. 월 1만원 후원금을 얻기 위해서 한 사람을 몇 번을 만나고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애걸하고 구걸하다시피 해서 그녀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큰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전화도 하지 말라” 원망했다.

지금은 아니다. 잘 돼서 떠나든 배신하듯 떠나든 이별이 서툴러 가슴은 철렁하지만 웃으며 보낸다.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사와라” 다독인다. 쾅 소리 나게 문 닫지 않았다. 그랬더니 인연이 지속됐다. 떠난 후에도 전화로 큰언니의 안부를 챙기고 주말에 들러 점심을 먹고 간다. 막달레나집은 누구라도 언제라도 맘 편히 머물 수 있는 소중한 나의 집이 되었다.

사진전 ‘용산, 기억의 지도’

언니들의 삶터, 용산이 재개발 특구로 지정됐다. 용산이 사라져도 막달레나는 남아있길 모두가 간절히 바랬다. 철거가 시작되면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불안감이 컸다. 그녀들은 비슷한 경험이 있고 정든 사람들끼리 집을 지어서 같이 살자고 했다. 큰언니는 “나보고 업주를 하라는 거냐”며 눈을 흘겼다. 웃고 울며 담소를 나누던 중 묘안이 나왔다. 용산이 사라지기 전에 추억을 남기자고. 작업이 시작됐다. 십 수 년 이상 살아온 지역을 구술로 남기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2009년 1월부터 여덟 명이 카메라를 들었다.

“이 동네가 성매매만을 위한 동네냐 아니다. 여기도 삶이 있는 곳이다. 24시간 성매매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웃과 나누기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김치도 담그고 누구 아프면 병문안도 가고 이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거죠.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들. 용산에 대한 기억의 지도를 그려보자고 했어요.

거기서 벌어지는 상황들. 하숙집, 여인숙, 세탁소 어디든 좋다 다 찍어봐라. 그랬더니 한 사람이 몇 백 장씩 찍더라고요. 월 1회 모여서 사진을 봤어요. 한 장 한 장 사연을 얘기하면서 감회에 젖었죠. 애들이 그래요. 그전에는 밤에 다니니까 동네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노래방 같은 것만 보였는데 이제 다른 게 보인다고, 하늘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고요.”

음지식물처럼 어둠에 길들여진 삶에 생기가 돌았다. 셔터가 터지자 빛이 들었다. 그간은 자기가 막달레나에 있었다는 것, 즉 성매매여성이란 게 들통날까봐 앨범에서 사진을 다 빼서 나갈 정도로 사진을 기피했던 그녀들이다. 그런데 사진작업을 하면서 서로 모델이 되어주었다. 밤새 셀카열전이 벌어졌다. 한라산으로 출사도 떠났다. ‘하늘을 처음 나는 어린 새처럼 땅을 처음 밟는 새싹처럼’ 그녀들은 세상을 새롭게 감각했다. 그 사진들로 보스턴과 뉴욕에 있는 대학에서 ‘Our Lives, Our Space’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가졌다.

생애사 연구도 수월했다. 이 지역에서 25년 쌓아온 ‘막달레나 큰언니’의 두터운 신망이 위력을 발휘했다. 이옥정 대표가 권유하자 성매매여성은 물론 경찰, 업주, 벰푸, 사채업자까지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녀들은 누구 땜에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용산에 대한 기억과 부모와 가정사 등 살아온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터놓았다.

고통스러운 삶의 궤적을 되밟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사정과 욕구가 드러났다. 막달레나공동체가 나섰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은 만들어주고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임대아파트를 분양받도록 행정절차를 도왔다. 현재 예비당첨자까지 15명이 새 둥지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임대주택 추진, 국수집 개업

“자립을 위해서는 집과 일거리가 필수에요.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성매매집결지에서 나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중간 과정이 있어야지. 물론 파 뽑는 데라도 어울려 다니든가 포도 따고 옥수수 따고 해서 일당 벌면 밥이야 굶겠느냐, 낮춰 살라고 말하죠. 애들도 수긍해요. 하지만 사회 나가서 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어디 식당이라도 취직 하려면 훈련을 시켜야죠. 그래서 동고리를 만들었어요.”

‘동고리’는 자활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내주기 위해 막달레나공동체가 지난 3월 문을 연 국수집이다. 현재 요리사, 자원봉사자, 자활 여성 등 9명의 여성이 함께 일하고 있다. 국수집이 잘돼서 튼실한 기반이 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으리라 그는 기대한다.

“그게 누가 됐든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삼겹살 먹고 행복을 느끼면 애들도 삼겹살 먹게 해주자. 한우는 아니더라도 삼겹살 수준으로 올려주고 싶어요. 양적으로 다는 못해주죠. 다만 내가 10명은 할 수 있는데 1명 빼고 9명 품으면 죄지만 내 능력만큼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막달레나공동체는 오랜 경험을 토대로 성매매여성들의 자활을 돕는다. 현장상담센터를 통한 현장 접근 상담, 독립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주거지원, 법률지원 및 직업훈련 등을 진행한다. 예전엔 직업이 부업이나 파출부, 청소부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사회복지사, 간호사 등 적성에 따른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법률지원과 직업훈련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활을 위해서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죠. 거기에 영성이 도움이 커요. 교리 공부하고 세례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달라요. 신앙심에 의지하고 힘을 얻고, 참을 줄 알고 다른 삶을 고민하죠. 꼭 성당이 아니더라도 템플스테이도 보내요. 그러면 조용히 생각하면서 삶을 돌아보죠. 이 일을 빨리 그만 두고 다른 걸 해야지, 공공근로 해서라도 먹고 산다고 다짐해요. 삶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미안함을 갖더라고요.”

탈성매매가 곧 행복은 아니다

정부와 시민들은 탈성매매에 대한 통계를 중시한다. 숫자를 요구한다. 탈성매매가 곧 행복이라고 추측한다. 이옥정 대표는 이러한 세간의 논리에 한숨짓는다. ‘성매매 합법화냐 범죄화냐’ 흑백논리에 고개 젓는다. “입장 없음이 나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성매매에 대해 정답을 못 찾겠어요. 개개인의 삶이 다른데 특정한 하나의 입장으로 모을 수는 없어요. 성매매 피해자만 볼 게 아니라 한 사람 삶의 역사와 미래를 다 봐야 해요. 그래서 저희가 생애사를 연구한 거죠. 가까이서 보면 그 일밖에 달리 사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애들에게 성매매가 나쁜 거다, 하지 말라고 말해본 적이 없어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얼마나 힘이 드느냐. 성매매는 고통스럽기에 안 해야 한다.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죠.

성을 돈으로 살수 있다는 것.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육체 한 부분인데 파는 사람은 인격을 파는 거예요. 사는 사람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기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걸 요구하고 제3자도 그렇게 보잖아요. 성매매여성의 인격이 파괴되고 사회에서는 죄인으로 몰아가요. 그런 세상이 안 돼야 한다는 거죠. 나는 탈성매매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애들이 인격 무시당하지 않고 존재감 느끼고 살길 바랄 뿐이에요.

그리고 현장 재유입 통계치로 탈성매매의 성패 여부를 가릴 순 없어요. 그곳을 떠났든 돌아왔든 그 상태가 지속되는 건 아니죠. 1년 후, 3년 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결혼해서 35평 아파트 늘려가고 자식이 전교 1등하는 친구도 있어요. 누가 봐도 탈성매매에 성공했죠. 그런데 전화해서 한 시간씩 응어리를 토해내고 울어요.

탈성매매 여성들이 교사란 반듯한 직업을 갖고 박사학위가 있더라도 자기 안이 고통스럽고 해방되지 못한다면 성공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얼마만큼 바른 삶을 사느냐보다 살고 싶은 삶을 살게 해주느냐가 중요해요. 열 명이 탈성매매에 성공한다 한들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숫자는 숫자일 뿐이에요.”

“우리, 잘 살았다”

삶은 그렇다. 탄생조건부터 복잡계 수준의 문제가 얽혀있다. 모두가 하나의 모범답안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저마다 숱한 시도와 물음으로 고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성매매여성들은 더 쉽지 않다. “부모형제복 재물복 남자복 자식복, 다 없다.” 삶을 긍정하기조차 어려운 여건이다. 그런 그녀들이 “나는 친구복은 있다”고 얘기한다. 그 상대는 막달레나집이다.

심지어 “나 죽으면 장례 치러 달라”고 서슴없이 죽음을 내맡긴다. “미친년, 내 나이가 몇 인대. 니가 나 죽으면 해줘라!” 육자배기 같이 걸쭉한 구박세례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놈만 골라 와라. 닭 잡아줄게.”라며 살갑게 말하는 친정엄마가 곁에 있다. 그 사람은 이옥정 대표다.

‘큰언니’는 행복하다. 돌이켜보면 넘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만큼은 생겼다. 겨울이면 연탄이 쌓이고, 김장철이면 배추가 나왔다. 성탄절에는 빵과 고기가, 명절에는 내복과 양말이 딱딱 들어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졌다. 대문 열고 들어오는 자, 모두가 귀한 인연이었다. 한 명 한 명 좋은 추억을 심어주려 마음을 내다보니 가장 많은 추억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상처를 보듬고 약점은 보완하고 강점은 북돋우는 과정에서 더불어 영혼이 성장했다. 한 사람의 삶으로써 충분히 감사하다. 막달레나공동체 이옥정 대표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그거면 됐다. 나는 잘 살았다.”

– 은유

응답 7개

  1. laura말하길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크게 한방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대표님의 나눔의 삶에 대하여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2. laura말하길

    책을 읽던 중 사이트에서 찾아 다시 읽었습니다. 감사의 마음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한방 크게 얻어 맞은 듯 합니다.

  3. Ocean1021말하길

    사랑을 실천하는 이대표님, 은총가득받으시고 나뭄받은 여인들도 행복가득해지길 빌어요^~^

  4. sanna말하길

    마지막 문장 읽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이옥정 대표도 훌륭하시고, 필자의 글도 좋습니다.

  5. 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6. 솔라리스말하길

    감동적인 삶이네여.ㅜㅜ 딴 건 못해도, 국수집에는 한 번 가봐야 할 듯 하져?*^^*

  7. sros23말하길

    대단한 인터븁니다. 글 속에 삶이 살아 숨쉬고 있어요. 정말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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