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11호] 호모 루덴스 2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호모 루덴스 2

아이는 놀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아이는 놀이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극화함으로써 무의식적 갈등을 상징화하고 극복한다. 가령 ‘피터’라는 아이가 장난감 마차와 자동차를 부딪치거나 쓰러뜨리며 놀 때 클라인은 그것이 사람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네 두 개를 마주보고 흔들리게 해 놓고는 사람이 앉는 부분을 가리키면서 “이게 어떻게 서로 부딪치는지 봐요” 라고 할 때 클라인은 그네가 성기를 부딪치는 아빠와 엄마라고 해석했다. ‘왜 꼭 그게 엄마 아빠냐’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는 사물을 자기나 타인의 신체가 연장(延長)된 것으로 감각하고 상징적 대체물로 사용한다는 취지는 공감이 간다.

돌 지날 무렵 매이가 처음으로 갖고 논 장난감은 플라스틱 용기였다. 작은 그릇을 큰 그릇 안에 넣고는 까르르 좋아했다. 여러 가지 크기의 그릇을 매이 앞에 펼쳐 놓았더니 크기에 맞게 포개려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클라인 식으로 해석하면 매이는 큰 그릇 안에 작은 그릇을 집어넣는 놀이로 자신의 몸이 엄마의 몸(젖가슴) 안에 포개져 들어가는 환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즘도 매이는 그릇을 좋아한다. 내가 설거지를 할 때면 “매이도, 매이도” 하며 의자를 받치고 올라가 싱크대의 그릇을 씻는다. 수돗물을 졸졸졸 틀어 놓고 빈 병이나 그릇에 물을 받는 걸 무척 좋아한다. 수도꼭지를 엄마 젖꼭지로 여기고 물 받는 걸 젖먹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매이는 사물에 인격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꾸며낸다. “안녕, 난, 그릇이야. 넌?” 그럼 나는 “안녕, 난 국자야. 넌 어디 사니?” 한다. 그럼 매이는 “응, 난….??? 아빠 얘 어디 살아?” 하고, 난 “매이네 집에” 라고 대답한다. 그럼 매이는 “응, 난 매이네 집에 살아. 넌?” 이렇게 만난 밥그릇과 국자는 밥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얼토당토않게 매이네 집에 사는 엄마 아빠 이야기로까지 비화된다. “응 그렇구나. 근데, 매이네 없마는 주로 뭐해?” 라며 은근슬쩍 엄마에 대한 평소 생각을 떠 본다. 그럼 매이는 웅크린 자세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응, 컴퓨터” 한다. “아빠는?” “응, 공부”(음하하. 누가 가르쳤는지 매이에게 아빠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사물놀이

이런 식의 사물놀이는 주로 목욕할 때 이뤄진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매이를 부르면 매이는 미끄러운 바닥을 살금살금 걸어와(워낙 장애물이 많은 집안 환경에 적응한 탓에 매이는 좀처럼 안 부딪치고 안 넘어진다)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몸 씻는 건 관심 없고 빈 샴프병, 목욕타올, 부러진 샤워꼭지, 비누, 병마개 따위의 사물들을 가지고 놀이를 시작한다. 부러진 샤워꼭지를 가지고 “안녕, 난 고래야. 넌?” 그럼 나는 목욕 타올을 들고 “안녕, 난 문어야. 어디 가니?” 하고, “응, 집에” 하면 “집에는 누가 있어?”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틈틈이 매이 머리 감기랴 이야기 상상하랴 헷갈린 내가 타올을 들고 “야, 해파리의 공격을 받아라!” 하면 매이는 “아니야, 그건 문어잖아!” 라며 정정한다. 혹, 내가 놀이에 집중하지 않거나 자기가 생각한 상징과 너무 어긋나면 막 신경질을 부리며 운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건 집이 아니라 용궁이라고!” 하고 소리친다. “아빠, 내가 뭐라고 그랬지?”하고 눈을 흘기며 묻다가, 매이가 했던 말을 답하면 “그래, 맞아”하고 고개를 까딱 거리지만, 못 맞추면 “아빠, 미워!” 하고 토라진다.

아이들의 놀이 중에서 단연 백미는 ‘있다. 없다’ 놀이이다. 프로이트는 한 살 반 된 손자 아이가 실패꾸러미를 장롱 밑으로 던지며 “fort~”(저기)라고 소리쳤다가 다시 잡아당기며 “da!”(여기)라고 외치는 걸 보며 그것은 엄마가 자기한테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다시 나타나 게 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극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를 통해 아이는 엄마가 부재하는 슬픔을 상징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그 실패꾸러미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 자신을 상징적으로 대체한 것이라며 아이는 그런 상징 놀이를 통해 엄마와의 직접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현존과 부재가 교차되는 상징적 질서로 편입된다고 덧붙인다. 아이가 극복한 것은 엄마의 부재 상황이 아니라 엄마와의 신체적, 직접적 밀착관계라는 것이다.

매이 역시 요람에 있을 때부터 ‘있다 없다’ 놀이를 좋아했다. 아내 친구한테서 전동모빌을 선물 받았는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매단 채 비스듬히 회전하는 모양이 꼭 태양계를 상징한 것 같았다. 회전하다가 아래로 기울어질 때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물체가 떨어지는데, 매이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손으로 잡으려고 손사위를 치다가 저 멀리 사라지면 손과 발을 흔들며 좋아 했다. 기어 다니면서는 엄마나 아빠가 수건으로 몸을 숨겼다가 깍꿍 하며 다시 나타나는 놀이에 환장했다. 걸어 다니게 되면서는 자기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놀이에 몰두한다. ‘있다 없다’ 놀이의 완성판은 역시 숨바꼭질이다. “무구화 꼬치 피었슴미다” “못찾겠다. 꾀꼬리” “찾았다. 이제 매이가 숨는다. 아빠 찾아” 청소할 때도, 설거지 할 때도, 빨래 널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숨고 찾는다. 여남은 번을 반복하고서야 “이제 그만하자”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그토록 매력적일까?


* 까꿍놀이

어둑어둑한 골목길 남의 집 헛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가슴을 콩닥거리며 발각의 긴장과 쾌감에 저녁밥도 잊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있고 없음, 현존과 부재, 은폐와 발각, 가시성과 비가시성, 빚과 어둠의 존재론적 반복만큼 인간의 놀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없나 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 ‘있다 없다’ 놀이의 쾌감은 있음의 약속에서 오는 걸까, 라캉의 말처럼 없음의 전망에서 오는 걸까? 존재의 근원에는 유(有)가 있을까? 무(無)가 있을까?

요즘 매이는 자기 전에 꼭 알깨기 놀이를 한다. 엄마보다 먼저 침대에 올라와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늦게 침실로 들어오는 엄마를 향해 “엄마. 매이 숨었어” 한다. 그러면 엄마는 “어? 우리 매이 어딨지?” 하고, 매이는 이불을 동그랗게 말고 꼼짝 않고 있다. 엄마가 “어? 여기 알이 있네?” 하면 매이는 안에서 꼼지락 거리고 엄마가 “어, 알이 흔들린다” 하면 매이는 이불 안에서 “뿌지직. 뿌지직” 소리를 내다가 이불을 벗고 튀어 나와 두 손을 허리에 짝 붙이고 손바닥은 쫙 편 채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며 오종오종 걷는다. 몇 달째 매이는 밤마다 아프락사스가 된다. 없음에 괴로워하고 있음에 안주하는 나는 있음과 없음의 무한 반복을 즐기는 매이가 부럽다.

– 매이 아빠

응답 1개

  1. 북극곰말하길

    와, 놀이가 그냥 놀이가 아니군요. 까꿍놀이가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가졌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역시 재밌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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