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11호] 혹시 감독이 파시스트? <애즈 갓 커맨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혹시 감독이 파시스트? <애즈 갓 커맨즈>

<애즈 갓 커맨즈(As God commands)>는 <지중해>로 1992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최근 작이다.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받는 작가 니콜로 아망티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2009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수상 내역을 주욱 읊는 이유는 이 영화가 얼마나 훌륭한지 상의 권위를 빌어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상까지 받았다는 영화가 이토록 한심하니,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지를 공감하기 위해서이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하층민 파시스트 아버지가 등장한다. 첫 대사부터가 호모포비아가 묻어나는 발언이고, 그 다음 힘을 주어 말하는 대목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유색인종들에 대한 구체적인 혐오발언이다. 아버지는 집에서 술을 마시며 자위기구가 달려있는 TV로 포르노를 보거나 콜걸을 불러서 아들이 자는 건너방에서 섹스를 한다. 콜걸조차 집에 그려진 나찌 문양을 보고 질색을 하니, 아버지는 콜걸을 때리며 내쫓는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들은 학교 작문시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정당하고, 오늘날 이탈리아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는 글을 써서 제출은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일한 추종자 앞에서 읽어주고 화기애애한 부자간 정을 나눈다. 아버지는 그런 글을 학교에 제출하면 사회복지사로부터 간섭을 받으며, 최악의 경우 아들을 뺏어갈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아들은 내가 바보인줄 아느냐고 응수한다. 그들도 알고 있다. 파시즘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는 이토록 보기에 불편한 하층민 파시스트 부자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이들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살짝 연민하거나 두둔한다. 아버지가 파시스트인것은 가난 때문이고, 사상이 좀 특이하긴 해도 부자간 정은 두터우니 이들을 갈라놓는 사회복지 정책이 있다면 그게 더 나쁘다는 입장인 듯 하다. 물론 이런 문제도 깊이 생각해볼만한 주제이다. 가령 <아이엠 샘>에서, 지능이 부족하나 딸을 무척 사랑하는 ‘착한 장애인’에게서 천사같은 딸을 아동복지의 이름으로 떼어놓는게 옳은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단순한 질문이다. 영화가 채택하였듯이 그들 부녀를 떼어놓지 않으면서 후견 부모등의 형태로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한다는 것이 답이다. 그보다 어려운 질문이 파시스트 아버지로부터 파시스트적 사상을 주입받으며 점점 폭력성을 배워가는 청소년 아들을 사회적 개입으로 떼어놓는 게 옳은지는 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또는 사창가에서 성매매를 하는 어머니가 사춘기의 딸을 키우는 문제라든가, 광신도 어머니의 어린 자식 키우기 등 가족의 보호와 사회적 개입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애즈 갓 커맨즈>는 대단히 곤란한 문제상황을 툭 던져 놓고, 이에 대한 고민은 건너 뛴 채 부자유친에 ‘올인’한다.

급우에게 맞고 온 아들에게 ‘선빵을 날릴 것’을 자신의 코를 쳐보라며 몸소 가르치고, 둘이 잠복했다가 아들에게 급우를 죽지 않을만큼 패도록 ‘싸움의 기술’을 전수한 날, 사고가 난다. 파시스트 아버지의 추종자이자 유일한 친구로 ‘정신이 4차원’이라 ‘콰트로’로 불리는 지적 장애인이 성범죄 사고를 친 것이다. ‘콰트로’는 이들 부자의 집에 놀러와 자위기구가 장착된 TV로 포르노를 보면서 성욕이 한껏 고조된 후 였다.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던 약간 불량끼가 있어 보이는 소녀를 보고, 포르노 배우의 현신이자 신의 선물로 착각한 그는 소녀를 뒤쫓는다. 비오는 밤 길,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가던 소녀를 오토바이로 쫓아 넘어뜨리고, 몸싸움 끝에 소녀를 때려 눕힌다. 그는 쓰러진 소녀의 손을 자신의 음부에 갖다댄다. 지적 장애로 인하여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하였고, 뚜렷한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긴 어려우나, 그가 성욕 때문에 소녀를 죽게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적 장애인의 성범죄라…참으로 곤혹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욕 들끓는 지적 장애인에 의해 멀쩡한 소녀가 죽을 수 있으며, 이들에게 책임을 부과하기도 곤란한 노릇임을 드러내는 것은 지적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확 증폭시킨다. 지적 장애인이 언제든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안녕을 해칠 수 있는 위험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이는 지적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중 가장 민감한 부분이자,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지점이다. 물론 지적 장애인이 실제로 위험한 이웃일 수도 있다. 짐짓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식으로 위장한 채 이런 불편한 진실에 대해 회피하거나, 지적 장애인을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무성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 보다, 지적 장애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용기있게 발언하면서 윤리적 긴장을 견지하는 것이 훨씬 올바르고 필요한 태도이다. 영화 <마더>는 ‘바보’라고 불리던 청년이 ‘창녀’라고 불리던 소녀를 죽이는 사건의 속살을 보여주면서, 이들보다 더 무섭고 더러운 사회적 질서를 대면케 하는 윤리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그러나 <애즈 갓 커맨즈>는 그토록 예민한 문제를 꺼내 놓고는 윤리적 긴장을 방기해버린다. 사건 직후 ‘콰트로’의 전화를 받고 현장에 온 아버지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콰트로’는 도망친다. 뒤이어 현장에 도착한 아들은 소녀의 죽음이 아버지의 소행이라 오인하고,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현장을 수습한다. 소녀의 시체와 아버지의 쓰러진 몸을 차에 싣고, 아버지는 잘 씻겨 방에 눕힌 후 119를 부르고, 아들을 돌봐주러 집에 온 사회복지사의 눈을 피해 소녀의 시체를 강에 수장시킨다. 그 와중에 ‘콰트로’는 안절부절하며 계속 아버지의 총을 들고 부자의 주변을 맴돌면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자아낸다. 이 과정의 스릴러적 영화문법은 관객들에게 아들의 사체유기가 발각되지 않고 성공하기를 기원하거나, ‘콰트로’가 정말로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드디어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어 장례미사가 벌어지는 날, 소녀의 아버지가 저주를 담아 외친 ‘애즈 갓 커맨즈’ 즉 ‘신의 뜻에 따라’ 라는 추도사가 울려퍼지면서, ‘콰트로’는 자기 집에서 목을 맨다. 즉 알아서 스스로(저절로) 제거된다. 사회적으로 위험천만한 존재임을 실컷 일깨우고나서, 그러나 ‘신의 뜻이 있기에’ 궁극적으로는 위험하지도 않은 존재로 폐절시키며, 한껏 증폭시켜놓은 불안을 무책임한 방식으로 봉합해버린다.

‘콰트로’의 자살현장에서 소녀의 유품을 발견한 아들은 아버지의 행위가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영화는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중단하고, 부자유친의 장으로 이월한다. 마침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감고 있고, 아들이 아버지가 한 짓으로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속삭이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아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오해를 풀고 포옹하는 것으로 맺으며, 그동안 늘어놓은 수많은 윤리적 난제들을 방기한 채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부자가 뜨겁게 포옹하며 영화가 끝나도 윤리적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증폭된다. 소년이 아버지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면, 그러니까 부자간 불신이 해소되고 이를 통해 부자유친이 더욱 공고해지기만 하면 ‘지적 장애인에 의한 소녀의 살인’ 이라는 뜨거운 감자는 아무래도 좋은 것인가? 청소년기 아들이 한치의 윤리적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급우의 시체를 완벽하게 유기한 것은 그저 아버지를 위한 인지상정이자 과감한 위기대처능력으로 간주하여 지지하면 되는 일인가? 영화는 파시스트 아버지의 아들 키우기를 어떠한 윤리적 질문도 제기함 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이들의 부자유친을 위해 ‘지적 장애인에 의한 소녀의 살인’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금 <마더>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마더>는 ‘지적 장애인에 의한 소녀의 살인’을 통해 오히려 가장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모성애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혈육의 정’이라는 맹목적 가치를 분쇄한다. 또한 개봉을 앞둔 엄정화 주연의 영화, <베스트셀러>에도 아들과 마을 청년 몇명의 우발적 폭행으로 치명상을 입고 가매장된 처녀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수장시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부정(父情)을 옹호하지 않으며, 잔혹한 짓이라는 판단 하에 이들 모두를 죽음으로 처벌한다.

<애즈 갓 커맨즈>는 하층민 파시스트 부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이들의 파시즘적 사고에 대한 영화적 성찰도 없이, 부자유친의 가치와 소년의 ‘싸나이로서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 소녀는 살해되어 사체유기를 당하고 지적 장애인은 살인자가 되었다가 알아서 자살하는 무책임한 서사를 늘어놓는다. 파시스트 아들의 성장이 사체유기로 확인된다는 발상 또한 얼마나 끔찍한가? 영화가 생략한 에필로그가 있다면, “우리 아들 다 컸네, 혼자 사체 유기도 하고!” 라는 아버지의 칭찬에 으쓱해하는 아들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가 지지하는 것과 소비해버린 것 사이를 숙고하면, 파시스트 아버지가 쩍 벌려 보여준 파시즘적 사고와 감독의 사고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파시스트이건 뭐건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이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적 장애인들은 스스로 죽든가 그렇지 않았다면 마땅히 일소되어야 할 대상이고, 약간 불량끼 있어 보이던 소녀는 ‘거친 싸나이들의 의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죽든가 수장되든가 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가 파시즘적 사고가 아니면 무엇이랴?

도대체 어떻게 이런 파시즘적인 영화가 버젓이 만들어졌는가?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이탈이아 극우 정치성의 반영인가 생각되다가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의 비평가상을 받았다는 점은 설명이 불가해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는 감독의 출세작 <지중해> 역시 윤리적 맹점을 지닌 영화였다. <지중해>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그리스의 작은 섬에 고립된 병사들이 전쟁을 잊고 섬의 주민들과 3년간 평화 공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화이다. 고립된 군인들에게 한 여성이 찾아온다. 그녀는 군대를 따라 다니며 성매매를 해왔다는 전력과 ‘엄마도 창녀였다’는 족보까지 들먹이며 성노동을 자청한다. 군인들은 순번을 짜 그녀와 3년간 윤락을 한다. 영화는 병사들과 그녀의 관계를 평온하게 묘사하며,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한 병사가 모두 돌아가는 마지막에도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남는 것으로 맺으며 대단히 따뜻하게 그린다. 그런데 천국처럼 평화로와서 무기를 든 군인들조차 인생 본연의 의미를 깨닫는 그곳에서 그녀는 왜 홀로 성노동에 종사하는 걸까? 그녀는 병사들로부터 무엇을 받는가? 병사들에게 군표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고, 외화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 지역 화폐를 벌어 지불하는 것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아마도 감독은 섬에서 군인들이 주민들과 평화공존 하려면 성욕의 배출구가 필요한데, 그것을 ‘창녀’가 알아서 나서주면 좋겠다고 편리하게 사고한 듯 하다. 그런데 ‘창녀’는 일종의 세습신분이거나 본능이라서, 돈을 벌려는 목적이나 생계를 위한 다른 수단이 없다는 현실적인 제약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성노동에 종사할 일군의 여자들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중해>는 ‘창녀’를 직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으로 이해하며, ‘돈을 받으면 성서비스를 제공할 용의가 있는 여자’가 아니라, ‘여러 남자와 잘 수 있고, 자고 싶어하는 여자’로 파악하는 감독의 남성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영화이다. 하지만 <지중해>를 언급하면서, 감독의 평화사상을 찬양하는 일은 많아도, 감독의 남성중심주의가 비판되는 일은 없다.

이상의 살바토레 감독의 예에서 보듯이, 화려한 수상목록을 자랑하며 소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영화들조차도 미시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끔찍한 남성중심주의나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에대한 폭력적 논리가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와 윤리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얼마나 필요한지 새삼 확인되는 지점이다.

– 황진미

응답 1개

  1. lumiere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무심코 받아들이는 내용 속에 이런 폭력이 숨어 있었다니.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시야가 더 넓어지는 느낌이네요.
    앞으로 다른 영화를 볼 때도,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거리를 유지하고 비평적인 시각을 갖고 바라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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