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11호] 하늘엔 유리, 땅엔 콘크리트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하늘엔 유리, 땅엔 콘크리트

I

로지에-원시적집

서양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란 토대를 이루는 기단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인류의 기원적인 건축물이었을 게 틀림없을 집을 생각해보면,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래서 고전주의 건축논쟁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로지에가 그린 ‘원시적인 집’을 보면, 나뭇가지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허전하고 황당한 모습이다. 원시인의 건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비서구의 오래된 집들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이런 집은 없다. 가령 가장 간단한 집에 속하는 몽골인들이나 인디언의 텐트는 ‘기둥’이란 없고 다만 지붕과 벽을 유지하기 위한 골조만이 있을 뿐이다. 아라비아나 아프리카의 집들은 대개 구멍처럼 창문이 뚫린 벽면이 인상적인 집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집이 비바람과 추위, 혹은 더위를 막는 것을 일차적인 기능으로 하는 한, 벽 없는 집이란 바닥없는 가방 같은 것이다.

건축물에서 벽을 제거할 때, 건축물의 요체는 수평선과 수직선이라는 기하학적 요소로 환원된다. 벽 없는 건축물은, 가시적인 대상일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건물은 되기 어렵다. 건축물에서 벽을 제거할 때, 벽을 통해 건축물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혹은 벽을 통해 사유되어야 할 ‘기능’들도 같이 사라진다. 결국 건축물을 두고 기능이란 말을 할 때, 기능이란 수평적인 지붕을 받치는 수직선-기둥의 기능으로, 다시 말해 ‘구조적인’ 기능을 뜻하게 된다.

서양의 건축가들이 놀라울 정도로 고집스레 기단과 지붕, 기둥만으로 건축의 기본요소를 고집한 이유는(사실 하나 더 추가되어도 안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그리스 신전을 자신의 기원적 모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 이외에는 서구의 역사 어디에서도 ‘신전’(종교적 건축물)조차 이런 건축물은 찾을 수 없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이 지하에서 나와 자신들의 ‘성전’을 만들 때, 그들이 모델로 받아들였던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고 물건을 거래하던 바실리카였다. 건축가들의 눈은 벽으로 둘러친 이 건축물에서도 벽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돔이노

이전의 ‘고전적인’ 건축형태에 대해, 혹은 장식적인 건축관념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면서 기능에 따라 형태를 구성하고자 했기에 종종 ‘기능주의자’들로 불리던 근대 건축가들조차 그리스를 모델로 하는 이런 건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르 코르뷔지에는 평면의 바닥과 그것을 연결하는 계단, 그리고 지붕과 바닥을 버티는 기둥만으로 만들어진 ‘돔-이노’라는 도식을 통해 건축의 기본요소를 제시한 바 있다. 근대건축가들이 한결같이 유리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유리는 불가피해서 벽을 만들어 붙이긴 하지만 투명하기에 벽이 없는 것처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유리벽으로 둘러쳐서 지붕과 기둥의 ‘구조’가 마치 그리스 신전처럼 드러나는 건축물을 즐겨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집을 만들어주었다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 살 수가 없다는 이유로 ‘무식한’ 의뢰인-.-;;에게 고소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거야 식물이라면 좋아할 수 있을 집이었겠지만, 사람이 살 집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 난감한 것은 그렇게 기껏 그렇게 유리로 만든 투명해야 할 벽에다, 밖에서 들여다보인다면 커튼을 제멋대로 쳐서 건물 전체의 형상을 망치는 ‘무질서한’ 사용자들이다. 그래서 미스가 만든 씨그램 빌딩에선 커튼의 높이나 커튼 치는 시간까지 지정해서 관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벽 전체가 유리로 매끈하게 번쩍이는 세련된 하이테크 건축물이 전세계 도시를 덮어가고 있다. 유리의 시대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말이다.

판스워드주택

II

건축물을 마치 조각처럼 형태를 자랑하는 오브제로 만드는 것, 그리고 형태(form!)를 위해 사용자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 그것은 오히려 이론적인 성향이 더욱 강했던 근대 건축가들에게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일반화된 것 같다. 이처럼 ‘폼나는’ 건축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리와 더불어 또 하나 최고의 선물이 되었던 것은 콘크리트였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든 주형만 잘 만들어주면 맘 먹은 대로 구현해주는 재료였을 뿐 아니라, 철근을 집어넣음으로써 필요한 벽체 없이도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해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콘크리트는 돌멩이를 자르고 모르타르로 하나하나 발라 붙이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을, 철근을 세워 붓고는 며칠 기다리면 되는 간단하고 빠른 작업으로 대체해주었고, 재료와 인력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크게 줄여주었다.

특별히 미적 취향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근대 건축가들처럼 이론적 완고함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금세기의 건설업자들이 열광했던 것은 아마도 콘크리트가 갖는 이 ‘실용적인’ 이점 때문이었을 게다. 싼 비용으로 아주 빠른 시간에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건물을 짓는 ‘공급자’의 관점에서 생산을 싸고 수월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을 사용하는 ‘수요자’의 관점에서도 소비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절약 아닌 ‘소비’가 의무가 된 이른바 ‘소비사회’가, 그리하여 국가가 나서서 ‘공공사업’이란 이름으로 건설과 개발, 재개발을 주도하고 부추기는 사회가 가능했던 것은 틀림없이 콘크리트 덕분일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근대적 성장과 개발에서도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으며, 아직까지도 그렇다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그것은 ‘소비사회’를 넘어서 포스트-소비사회인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증폭되며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서브프라임론을 통해 세계경제 전체를 공황으로 처박았던 2008~09년의 경제위기가 대대적인 주택개발에 기인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한국정부는 부동산경기가 가라앉거나 부동산 시세가 저하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단지 그들이 자신이 내세우는 ‘공급적 관점’(건설업자의 관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는 경제 전체의 침체로 이어질체의 침는 공포, 그것이 아마도 입으로는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언제나 부동산 가격을 올리고 경기를 자극하는 ‘공급자 경제학’을 가동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거품은 꺼져선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꺼지지 않도록 계속 휘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민들의 부동산-민주주의에 반하는 건설업자들의 부동산-공화국, 그것이 우리가 사는 나라의 초상인 것 같다.

이제 그들은 대지에 콘크리트를 바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혁명적 사업을 만들어냈다. 어째서 우리는 땅 위에서만 건축을 생각했던 것인가! 그러기엔 한국은 땅이 너무 좁은 나라 아닌가! 건축할 땅이 모자라면, 바다를 메워서라도 만들면 될 거 아닌가? 이런 점에서 새만금 사업은 분명히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난 같던 선거공약으로 출현했던 대운하 사업이란 발상이, 실추한 인기를 부동산 개발로 경기를 부양시켜 회복해보려는 건설업자 출신 대통령의 집요한 고집과 그것을 통해 이권을 얻으려는 건축업자와 관료들의 이해에 의해 추동되면서, 또 하나의 혁명적 발상으로 이어진다. 이젠 땅이 아니라 전국의 강을 콘크리트로 뒤덮는 거대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거대한 반발을 잘 알기에, 저항이나 법적 논란이 따라오지 못할 미친듯한 속도로 전국의 강을 헤집어 놓고 있다. 콘크리트는 정부관리들이 앉아서 끊임없이 건물과 도로를 만들 것을 구상하는 이 부동산-공화국의 ‘물질적’ 토대라고 해야 할 듯하다.

III

다른 한편 이는 국가적 개발 마인드를 넘어 국민들 개개인의 마인드 안에까지 침투하여 자신이 사는 마을을 ‘개발’하고 자신이 사는 집을 재개발하는 것을 돈을 버는 방법이라고 믿는 새로운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경주에 고속철을 끌어들이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 미군부대를 끌어들이는 사람들, 거대한 방조제로 자신이 사는 땅 전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강이 어떻게 되고 거기에 기대어 사는 ‘것’들이나 사람들, 혹은 거기 기대어 사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든 개발이 되면 자신들이 잘 살게 되리라고 믿는 사람들. 난 이런 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 등에 올라탄 박정희의 유령을 본다. 박정희는 정말 우리 가슴 속에 이렇듯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대학로에 살 때, 나무에 빗물이 배어들도록 남겨둔 조그만 땅마저, 나무의 밑둥 줄기에까지 곱게 콘크리트로 발라 버린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나뭇가지에 맨 빨래줄을 보건대, 아마도 비만 오면 질척대서 빨래 너는 게 불편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그 작은 불편함만을 보고, 그렇게 콘크리트로 발라버려 살 수 없게 될 나무의 처지는 전혀 보지 못한 좁은 안목을 단지 그 개인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편안함을 위해 인간의 발 닫는 모든 것을 발라버리는 콘크리트들이 모든 도시는 물론 시골의 길들까지도 깔끔하게 뒤덮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콘크리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훌륭한 동반자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뒤덮인 콘크리트 바닥 위를 빗물은 겉돌며 흘러간다. 땅 속에서 사는 것들은 아마도 갈증에 목말라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서해바다에 살던 것들이 거기를 메울 땅과 콘크리트에 묻혀 죽어가고, 전국의 강에, 강가에 살던 것들이 자전거도로가 매끄럽게 달리는 ‘각 나오는’ 콘크리트 둑에 묻혀 죽어갈 것처럼.

전국의 대학이 개발의 열풍 속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운 건물의 건축과 개발이 학교의 발전이라고 믿는 어이없는 신앙의 물질화된 공간 속에서, 대학은 그런 개발의 신앙을 가르치는 거대한 목회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빗고 부수고 재개발하는 건설업자의 공화국이 세운 새로운 국교(國敎)는 땅만이 아니라 바다와 강마저 콘크리트로 덮는 대대적인 역사(役事)를 통해 그런 신앙의 현실적 기적들을 만들어내고, 국민들은 자기 주변에 투여된 콘크리트의 양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이익과 편의의 양을 뜻한다고 믿는 간교한 무의식으로 그 둔중한 신앙을 보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새로운 모든 건물들이 반짝이는 유리벽으로 둘러친 하이테크 건축물로 채워져 가는 지금의 지배적인 경향이, 둔탁한 콘크리트로 세상을 덮는 거대한 공사판과 정확하게 짝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엔 유리, 땅엔 콘크리트! 그것이 빛날 일이 없어도 빛이 나야만 하는 정치적 영광과, 모든 생명체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각이 나오는 거대한 군대식 평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유리와 콘크리트의 결합, 근대 건축의 형상을 만든 이 환상의 커플이 우리가 사는 대지 전체를, 나아가 강과 바다마저 장악하는 날, 근대의 종언이 어디서고 거론되는 포스트모던한 이 시대에 실제로는 근대 건축가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정도로 근대화가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 이진경 (수유너머N)

응답 2개

  1. 비포선셋말하길

    이 글을 읽고나니 앞으로 새로운 게 보일 것 같아요.. 유리와 콘크리트로 뒤덮힌 반도의 땅을 상상하면 오싹하기도 하고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북극곰말하길

    유리와 콘크리트가 이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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