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11호] <붉은 벨벳 앨범 속의 여인들>과 만나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붉은 벨벳 앨범 속의 여인들>과 만나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내 활동의 주요 공간은 W-ing이었다. 재작년, 연구실 학술제 주요 행사였던 ‘현장인문학 워크샵’의 인연으로 그곳에서 강의도 하고 행사 때마다 얼굴도 비치곤 하다가 우연찮게 좀 더 가깝게 사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W-ing은 탈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쉼터와 자활훈련작업장, 그리고 그룹 홈과 임대주택을 포함한 주거공간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친구들’은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지낸다. 작년부터는 <수유너머 길>과 함께 <인문학아카데미>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W-ing에서 활동했던 몇 개월 동안 나는 한번도, 친구들에게 성매매와 관련된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이 친구들에게 어떤 호기심으로 비춰지는 게 미안했고,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친구들이나 코치들과 대화하면서 간신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삶에 대해 막연히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때 내가 막연히 알게 된 것은 친구들이 성매매로 유입되게 된 배경, 이를테면 가족 내 폭력(성폭력을 포함한)이라든가 빈곤과 같은 것들이 친구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적어도 W-ing에서의 경험으로 보자면, 성매매의 문제는 개인적 수준의 직업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점에서 성매매의 문제는 한국사회의 기형적인 경제적 구조로부터 파생된 빈곤의 문제 그리고 빈곤의 결과로 생겨나는 교육의 부재와 폭력에의 노출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은 탈성매매한 여성들의 이른바 ‘자활’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W-ing의 친구들에게는 물어보지 못했던 것, 성매매 그 자체와 관련된 것들을 나는 다시 연구실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을 통해서 배운다. 용산집결지에서 생활했던 ‘언니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용산의 언니들도 W-ing의 친구들처럼 가난과 폭력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다. 용산이 그녀들에게는 지긋지긋한 곳이지만 어떤 언니들은 아직도 차마 그곳을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녀들도 언젠가는 그곳을 영원히 떠나게 될 날을 꿈꾼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영업장에서 ‘일하는’ 언니들이 있다. ‘유리관골목’에는 포주들에게 고용된 젊은 언니들이 있고, 좀 더 나이가 든 언니들은 뒤쪽 ‘히빠리골목’에서 ‘펨푸’라고 부르는 호객행위를 주로 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업주나 펨푸는 어떤 형태로든 ‘언니들’을 착취하는 위치에 있다. 언니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의 30-60%는 모두 이들에게 지불된다. 일의 성격상 언니들은 약물과 도박에도 쉽게 노출된다. 생산도구와 노동력이 여성의 신체 위에서 하나가 되는 성매매의 현장에서 ‘언니들’은 여려 겹의 착취와 유혹으로부터 대부분 자기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 왔다. 2004년 발포된 <성매매방지법>이 용산 집결지의 언니들에게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던 것도 이 지독한 인연의 사슬이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여기에는 성매매가 아닌 방식으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수입 없이 계속되는 지출에 대한 부담도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책에서 인터뷰에 응했던 언니들은 40대 이상 60대까지 제법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용산 집결지의 산증인들이다. 언니들 중 몇몇은 독립을 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은 결혼도 했다. 용산에 남아 있는 언니들도 모두 ‘막달래나의 집’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언니들의 삶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큼이나 앞으로도 평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암에 걸려 투병중인 경우도 있고,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언니들이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평범한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통카드를 버스 단말기에 대는 것 하나도 이 언니들에게는 진땀나는 일이며, 병원이나 시장에 가는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도 큰 행사처럼 여겨지곤 한다. 어쩌면,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낙인에 대한 공포가 이 언니들을 계속 주눅 들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 낙인은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막연한 시선 이전에 언니들 자신의 가슴 속에 깊이 화인처럼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산은 대형마트와 극장, 백화점이 있는 놀이터, 혹은 전철을 타기 위해 지나가는 번잡한 동네에 지나지 않지만, 이 언니들에게 용산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상처와 생활의 기억이 생생한 곳, 하지만 지금은 그곳의 몰락을 지켜봐야만 하는 복잡한 애증의 장소이다. 그 곳의 경험과 기억을 한 손에 들고 오늘도 누군가는 짐을 챙겨 ‘평범한 삶’ 속으로 걸어 나올 것이다. ‘평범한 삶’을 향한 언니들의 용기와 희망이 꺾이지 않기를, 다시 제 발로 그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없기를, 삶이 그녀들에게 더 이상 가혹하지 않고, 그녀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책을 덮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W-ing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와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조만간 ‘친구들’ 손잡고 <동고리>에 국수 먹으러 가야겠다.

– 권용선(수유너머 남산)

응답 1개

  1. 북극곰말하길

    평범한 삶을 향한 언니들의 용기와 희망이 꺽이지 않기를…^^ 잘 봤습니다. 글이 국수같이 후루룩 넘어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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