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11호] 편집자의 말 – ‘법 앞에서’와 ‘밥 앞에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법 앞에서’와 ‘밥 앞에서’

카프카의 작품 중에 <법 앞에서>라는 아주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고 워낙 짧은 분량이라 줄거리 요약이라는 게 이상합니다만 대강 이런 이야기입니다. 법 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시골 사람이 있고, 그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는 문지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지기는 자기 뒤에는 더 강한 문지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시골 사람은 어떻게 거기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골몰하며 긴 세월을 보내지요. 그리고는 그 앞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말합니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어. 이제 문을 닫아야겠군.”

고등학교 때인가 이 소설을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 사람을 위한 문인데도 그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지.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문을 열지 않는 것인지. 법이란 막아도 용기를 내 뚫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법에 들어가려고 평생을 허비한 그 사람이 불쌍해 보였을 뿐입니다.

시골사람의 이 실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런데 아감벤이라는 철학자가 조금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게 있더군요. 시골 사람은 실패가 아니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그는 법을 가지고 반쯤은 놀고 반쯤은 골몰이 연구하면서, 마침내 법의 문을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아감벤은 15세기 유대교의 필사본에 있는 작은 그림 이야기를 하더군요. 카프카의 소설 장면과 흡사한 상황인데요. 성 문은 열려 있고 그 옆에 문지기가 있습니다. 저 멀리 메시아를 상징하는 인물이 말을 타고 있고 그 앞에는 메시아의 진입을 준비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문은 이미 열려있는데 청년은 무엇을 위해 성문으로 다가선 걸까요. 아감벤은 메시아의 진입을 위해 문을 닫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법의 문이 닫혀야 삶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서 메시아의 도래는 법의 중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법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잣대, 그것이 작동하기를 멈춘 곳, 거기서 구원이든 혁명이든 일어난다는 거죠.

제가 이 신비한 이야기를 꺼낸 건, 법이 아무리 중요하고 제도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사는 법’의 영역이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법대로 살기’ 이전에 ‘사는 법’의 문제가 있습니다. 삶의 어떤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사는 법’과 관련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호 특집에 ‘막달레나 공동체’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이옥정 대표님을 만나보니 온통 ‘밥’ 이야기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지난 25년 간 밥해준 이야기, 밥 얻어먹은 이야기 말이지요. 거기 아이들의 이모로서 학부모가 되고, 거기서 죽은 사람들의 상주가 되어 먼 길을 배웅한 것, 성매매여성들과 포주, 주먹을 쓰는 기도와 경찰까지 뒤섞여 지지고 볶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살아온 공동체 이야기. 법이 금지했고 도덕이 비난했던 성매매 집결지에서 어떤 삶의 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삶을 돌보는 이런 코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법이나 도덕은 항상 늦게 옵니다. 그것들은 기왕의 상식과 통념을 뒤늦게 확인할 뿐 우리에게 절실한 삶의 출구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성매매를 불법화할까, 합법화할까. 그러나 법 이전에 삶이 거기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작년 강제출국 된 ‘스탑크랙다운 밴드’의 미누씨도 그랬습니다. 그는 소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여기서 18년을 살았습니다. 최근 4년은 저희 수유너머와 함께 살았지요. 우리는 법 바깥 삶을 산 셈이지만 또한 그렇게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대부분의 소수적 삶들은 법과 도덕 바깥에 있습니다. 그 삶들을 아예 바깥으로 내동댕이치거나 안으로 우겨넣기 전에, 경계와 잣대를 넘어 살 길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저 청년처럼, 지금 작동하는 법과 도덕을 잠시 침묵케 하고 그 문을 걸어 잠가 봅시다. 낡은 법과 도덕, 유치한 편견과 통념이 그 소란을 멈춘 곳, 거기서 구원을 알리는 전령사 비둘기가 조용한 걸음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모릅니다.

    고병권(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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