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 죽음으로 돈 바꿔먹기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 죽음으로 돈 바꿔먹기

“사람이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황이 또 있을까요?”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상황이요? 글쎄요… 전쟁? 테러? 아니면 신약 임상시험?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랑 나랑 싸운다 치자. 열 받아서 서로 욕도 하고 발길질도 한다. 너 같은 놈하곤 다신 상종도 안할 거라고, ‘죽어버려라’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하고는 눈탱이밤탱이 된 눈 부여잡고 병원에 갔다. 근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치료 받다가 내가 죽어 버렸다. 당신이라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개 같은 놈, 잘도 뒈졌네!’ 하고 시원해 할까? 아마 아닐 거다.(아닐 거라고 믿는다;;) 나 같아도 당신이 진짜로 죽어서 무덤에 묻히게 됐다면 정말 무서울 거다. 아까 죽으라고 한 건 그냥 열 받아서 그런 거였다. 그렇다고 진짜로 죽어버리면 어떡하나. 너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다. 죽으란다고 진짜 죽어버리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마이클 무어의 신작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 병 걸린 사회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이 ‘진짜로’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전쟁도 아니고, 폭탄 테러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 그것도 자기 회사 직원이, 같이 일하는 동료가 말이다! 헐.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상황이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당신은 이런 상황 상상이나 해봤나? 믿을 수 없겠지만 자본주의의 극단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 좋다는 미국에서 말이다. 그 이유란 것이 기가 막히다.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보험을 들어놨는데 그 보험이 이름하야 ‘죽은 일꾼’ 보험이다. 직원이 죽으면 회사가 돈을 챙기게 되는 보험이다. 신기한 것은 정작 직원들은 자신이 이런 보험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거다. 가족들도 모른다. 죽어서야 알게 된다. 보험 수령자가 회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땡전 한 푼 못 받고, 기업은 사람 죽은 대가로 어마어마한 몫의 돈을 챙긴다. 그래서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상황이 벌어진다. 병환으로 죽든, 자살을 하든, 아무튼 죽으면 좋다. 젊을수록, 그리고 남자보다는 평균 수명이 높은 여자일수록 보험금이 높아진다. 고로 젊은 여자가 죽으면 보험금은 두 배!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적어도 한 번은 이러한 보험에 ‘들어진’적이 있다고 한다. 기업의 회계 담당자들은 말한다. “사람이 너무 안 죽어서 적자나게 생겼어”

어째서 이런 보험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직원이 죽을 경우 기업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에 피해 보상의 원리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몸값이 더 나가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직원이 죽기를 바라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이런 보험에 든 기업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법한 기업이라는 것, 즉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이 ‘듣보잡 기업’ 이 아니란 거다. 시티뱅크, P&G, 월마트 등등 이른바 지구상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기업들이다. 유령회사 차려서 한 몫 챙기려는 犬(죄 없는 진짜 개님들께는 죄송하다;;)들이 벌이는 짓이 아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잘 적응하고, 고도화된 기술을 가졌다는 기업들이 택한 최고, 최신, 엣지전략이다. 적군이 얼마나 센지 알아보는 데 병사 하나하나를 다 살펴볼 필요는 없다. 적군이 그나마 제일 낫다는 부대 하나만 보면 어차피 나머지는 안 봐도 뻔 한 거 아닌가. 그러니 얘들만 보면 대강 견적이 다 나오는 거라.

‘자본주의’는 이제껏 발명된 최상의 체제입니다. 헉, 그랬구나!

그래서 선전이 필요한 거다. 온 나라 사람들이 이걸 다 알고 있으면 들고 일어날 테니 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대통령이 나와서 교육도 시키고, 때로는 전쟁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거다.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는 동안 희한하게도 주식 시장은 최고 상종가를 울렸고, 세계 경제는 엄청난 사회 불안에도 불구하고 최고조를 달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건 둘 중 하나를 해야 된다는 걸 뜻한다. 전쟁을 해서 잘 먹고 잘 살든지, 아니면 이 짓거리를 그만 두든지!

이제껏 발명된 최상의 체제라는 자본주의에는 ‘자유’가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사고 싶으면 사고, 팔고 싶으면 팔면 된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모든 것을 다 허용하고 그 배후를 못 보게 하는 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자유! 자본주의는 무엇이든지 다 허용한다. 얼마나 자유롭고 허용하는 것이 많으면 직원의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 까지도 자유롭게 허용하겠는가. 기어이 ‘죽음’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자유까지 만들어냈다. 여기서 더 얼마나 자유로운 일이 많아질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아마 더 발전된 자유가 또 나타나긴 할 것이다. 왜냐면, 이제까지 “무엇을 상상하든 항상 그 이상”을 보게끔 해줬으니 말이다.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시라. 특히 인간의 본성을 특정한 생물학적 실체로 고정시켜 생각하는 이들에게 좋다. 이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경쟁과 차별적인 보상을 사회의 원리로 삼은 자본주의 같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길 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소위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사회 구조와 함께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에서의 인간 본성은 확실히 이들이 말하는 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사람 죽길 바라는 극악무도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개편되어 상호 협동과 신뢰, 우정과 대가없는 선물이 경쟁보다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는 지만 아는 사람이 도태될 것이다. 전쟁터를 하는 수 없다는 식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꿔 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 서동욱(수유너머 R)

응답 1개

  1. 바다표범말하길

    아, 이거 재밌겠네요! 개봉한 건가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