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잔혹한 사랑, 불편한 진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잔혹한 사랑, 불편한 진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테리 트루먼 지음 / 천미나 옮김 / 책과 콩나무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니! 아동 도서에서 이처럼 파격적인 제목을 찾기도 아마 쉽지 않을 게다. 이 책은 장애인과 안락사라는 첨예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섣부른 충고나 교훈을 주절주절 늘어놓기보다는,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하지만 아들의 최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빠, 중증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는 아들, 그 사이에서 조금씩 다른 양태로 고통을 당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삶과 죽음, 사랑과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14살. 미래에 대한 꿈과 생기로 충만해 있을 한창 시기에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한 소년의 마음결을 때로는 절박하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그려냄으로써 목숨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숀 맥다니엘은 중증 장애인이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식물인간이었다. 정신 연령이 3~4개월 아이에 불과하다는 판정까지 받은, 지적 장애아다. 자신의 의지로는 근육 하나,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저능아, 바보천지. 돌대가리’다. 그러나 숀에게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달란트가 있다. 한번 들으면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몽땅 기억하는 완벽한 초능력. 하지만 아무도 숀의 비밀을 모른다.

숀의 출생은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작가이며 시인이던 아버지는 장애인 아들의 이야기를 써서 퓰리처상까지 받았음에도 가족을 떠난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장애와 더불어 사는 아들을 보는 고통을 참아내지 못한다. 아들을 불량기계로 만든 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런 아들을 참아내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과 맞서거나 이겨내기 보다는 회피하려는 것인지도. 엄마와 누나는 대단한 애정과 인내로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지만 왠지 위태위태해 보인다. 형은 조금씩 인내심을 잃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버거운 환경에 대한 불만을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드러낸다.

당사자인 숀은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 않다. 자신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며, 자신이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우울하긴 하지만 숀은 자신을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숀에게도 일상의 행복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서부터 혼란을 겪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진실 때문에 숀은 더욱 더 답답하다. 숀은 아빠의 계획에 대응하거나, 누군가에게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할 방법조차 없다. 학교를 데려다 주던 엄마 차에 개 한 마리가 치어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부터 숀에게 죽음은 공포로 다가온다.

아들이 모든 것을 들을 뿐 아니라, 인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넌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학교 저능아 반에 속해 있는 숀을 취재하러 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매년 아동 1인 당 35,000달러나 되는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고 있는데, 과연 교육 불가능한 이 아이들(중증 장애인)을 교육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뇌에 손상을 입은 두 살짜리 자기 아들을 살해한 괴물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서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아들을 죽였다”는 얼 디트로를 옹호한다. 아버지는 얼 디트로가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해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의 정의가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까지 책임져야만 하는 것”인지 되묻기까지 한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숀은 아빠가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것을 불완전한 자신의 몸 탓으로 돌린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대체 무슨 권리로 자신의 고통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대체 무슨 권리로 타인의 삶에 대해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인가?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결정하겠다면서, 당사자인 나의 판단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최선’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최선인가? 숀의 이러한 생각들은 안락사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들이다.

사랑도 여러 가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질투나 미움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묵인되는 것은 아니다. 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거짓이라고 몰아붙일 마음은 없다. 장애인을 둔 가족의 고통을 모른척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생명의 생사여탈권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잔혹함이 아닐까? 숀의 아버지가 내세운 사랑의 정의라는 것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왜 굳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일까? 누가 누군가를 책임지는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숀이 도우미와 단 둘이 있게 된 날, 아버지가 찾아온다. 숀은 직감적으로 오늘이 바로 아버지의 계획이 실행될, 그 날이라는 걸 느낀다. 도우미를 돌려보낸 아버지는 슬픈 눈으로 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베개를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아빠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빤 언제나 널 사랑했어.”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숀의 마음을 응시한다. 중증 장애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자, 스스로를 책임질 수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불필요한 존재. 숀을 둘러싸고 있는 겉모습이 아니라 난생 처음으로 발화되지 않은 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저도 사랑해요, 아빠”라는 숀의 고백,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는 간절한 숀의 전언을.

작가는 딱히 결말을 맺지 않고, 숀이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끝낸다. 숀의 입장에서 서술되므로, 숀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의 계획이 정말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명료하지 않은 그림을 통해 작가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곳곳에서 날카롭게 우리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보여지는 것들의 부조리함을 지적한다. 아버지가 가족 곁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숀이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거의’ 란 ‘어떤 것에 매우 가까운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매우 가까울 뿐, 100%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식은 ‘거의’를 ‘전부’와 때때로 혼동한다. 아버지는 ‘거의’가 품고 있는 여백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했기에 아들을 놓았다. 그러나 ‘거의와 전부 사이’ 그 보잘 것 없는 자투리의 힘이 바로 숀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항해를 계속하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 숀은 자신을 상대로 선생님 놀이를 하는 누나를 통해 글자를 배우고, 세상의 온갖 소리들을 빨아들인다. 숀에게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소리, 신문과 잡지, 지나가다 흘깃 마주친 간판과 광고판이 다 선생님이다. 그야말로 삶이 배움의 과정이다. 숀이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절실히 그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절실히 그것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숀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숀에게 초능력을 선물했던 셈. 슬프고도 찬란한 역설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숀의 입을 빌어 숀과 같은 아이들을 ‘저능아’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낱말이란 단지 그 낱말 자체를 나타낼 뿐이다. 또한 사람들이 나타내고자 의도하는 것들을 상징할 뿐이다. 정상인들이 우리를 저능아라고 하니까 저능아가 되는 거다. 사실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멍청한 아이로 간주되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은근히 즐길 때도 있다.”

숀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 속에 천재성을 숨기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겪는다. 하루에 열 번이 넘게 찾아오는 발작을 사람들은 증상이라고 말한다. 경련을 일으키고 몸을 비틀고 사방으로 몸을 움찔거리는 기묘한 행태.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증상이란 병을 앓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숀은 발작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발작을 하면 제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웃음이 그치고 나면 방이 빙글빙글 돌면서 영혼이 몸을 떠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발작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단단히 집중을 하면 아주 쬐끔 발작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숀이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발작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지만, 숀은 바로 그 고통스러운 발작의 순간에 자유를 만끽한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육체를 응시하고 조정하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작가는 이를 발작여행이라고 부른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기묘한 힘. 숀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찬가야 말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두드렸던 부분이다. 긍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스스로 살아낼 힘을 찾아내는 놀라운 인간애, 삶에 대한 적극적인 몸짓.

안락사 문제는 윤리적, 도덕적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없는 보다 미묘하고 근원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환자나 보호자, 병원……. 어느 쪽 입장에 서던지 개인의 입장에 따라 생각들이 미묘하게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뜻 ‘공동선’ 또는 ‘공공의 이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애초 서로에게 모두 다 좋은 해결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서로의 생각들을 맞추고 조율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답을 향해 가는 그 과정이 바로 답일지도 모르므로. 그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강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없다고 해서,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는 안락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잔혹한 사랑,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끄집어내어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한다.

– 달맞이

응답 6개

  1. 비포선셋말하길

    달맞이님 덕분에 매주마다 심오하고 재미난 동화의 세계에 빠져드네요…내용도 좋고 그림도 예쁘고.. 아이들 키울 땐 목아파서 책 언제 끝나나 마지막장만 기다렸는데 -.-; 달맞이님이 읽어주니까 재밌고 행복해요.

    • 달맞이말하길

      크크 샘 고마워요! 얼굴 본 지 한참 되었네요. 열심히 공부하고 바쁘게 일하는 모습에 늘 감탄해요! 홧팅!

  2. 둥근머리말하길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문제를 붙잡고 늘어진 작가… 를 생각하기보다, 내용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참 맘 불편해져요.ㅠㅠ 그래서 의미 있는 책이겠지요..

    • 달맞이말하길

      참 요상한 습관이 들었어요. 날 불편하게 하는 거, 날 참을 수 없게 하는 거에 더 끌려요.
      날 위무하는 것보다는 날 날서게 하는 것에. 아마 그건 너무 자주 널브러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적당히 안주하고 싶은, 적당히 눈 감고 싶은 욕망이 너무 거센 탓. 읔. 자기 고백을 끌어내는 재주가 있나 봐, 둥근머리님!

  3. 아기새말하길

    안락사 문제는 아이들하고도 토론을 많이 했던 내용인데요. 제목만 봐도 딱 뭔지 알거 같아요.

    • 달맞이말하길

      예전에 복제 문제를 다룬 ‘쌍둥이별’을 읽었을 때 가슴이 참 많이 답답했는데, 그러면서도 경탄에 경탄을 거듭했는데 이 책 또한 좀 거칠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네요.
      십 년 넘게 아픈 엄마와 같이 살다 보니 가족들의 아픔이 남같지 않아요.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게 참 맘에 안 들어요.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고 있지만 대개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수유에 부쩍 궁금증이 생긴 아기새님, 웹진만 아니라 종종 수유 사이트에 접속하시구려.
      그럼 더 궁금한 게 많아진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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