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인문학 공부를 하며 만난 재소자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인문학 공부를 하며 만난 재소자들

-교도소에서 찾아든 생각-

1. 마음 속 살인범

2010년 ‘평화인문학’ (인권연대와 수유너머, 지행네트워크, 성공회대 등이 함께 진행하는, 재소자와 함께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2008년에 시작했다.)이 2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자카드를 댈 때마다 철컹거리는 쇠문 소리에 맘까지 철컹거리더니 이젠 교도소 출입이 꽤나 심상해졌다. 딸이 ‘우리 아빠 오늘 감옥 갔어요.’라고 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횟수로는 벌써 3년째다. 물론 3년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한 달 혹은 2주 프로그램을 매해 두세 번 했을 뿐이고, 심상해졌다고는 하나 건물 출입이 그렇다는 것이다. 매년 첫 강의의 긴장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푸른 옷을 입은 이들 모두가 편안한 얼굴로 나를 보는데 정작 ‘편안히 임하시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굳어 있는 꼴이다.

2008년 평화인문학을 준비할 때 다른 교도소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셨던 어느 선생이 해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자기 강의가 솔직히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했다. 수강생 중에 ‘살인범’이 있다는데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이 꼭 그렇게 보여 좀처럼 강의가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당시 교도소에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포부만 가졌을 뿐이던 나는 그 말에 ‘쫄고’ 말았다. 본 적도 없는 그 ‘살인범’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나는 가능한 자주 교도소를 방문했다. 한 번만 참석해도 그만인 교도소 견학(?)을 열릴 때마다 참석했고, 내 강의 날이 아니어도 가급적 방문하려고 했다. 무슨 정성이 뻗쳐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노력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사실 재소자가 실제로 나를 위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졸던 재소자는 본 적 있지만 노려보던 재소자는 없었다. 교도소도 그렇다. 낡고 불편한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귀곡산장 같은 곳은 아니다.

첫 수업이 쉽지 않은 건 지금도 여전하지만 이제는 맘속에 그가 살지 않는다. 그 선생을 노려보았다는, 그리고 한동안 내 안에서 수형생활을 하며 나를 또한 감옥에 가두었던, 그 마음 속 ‘살인범’ 말이다. 그 대신 누군가를 죽여 무기형을 받았으되 “철학강의 재밌었노라”고 털털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한탄”하며 십여 년 옥살이를 한 사람, 수업 시간에 이름을 적으라는 말에, “나는 왕이다”는 타이타닉의 문구가 떠올라 ‘King’이라고 적었던 사람, 그도 아니면 따분한 이야기 그만할 수 없느냐는 눈치로 하품을 해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구나 맘속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재소자 한 명을 갖고 있다. 강의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준 그 선생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도 맘속에 재소자가 있다. 때로는 자신을 위협하고, 때로는 자신을 훈계하고, 때로는 자신을 유혹하고, 때로는 자신을 약 올리는 그 재소자를 석방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눈앞에 서 있는, 온갖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이 비로소 보인다.

2. 따옴표 친, 좋은 삶

2월 강의가 끝나고 소감문을 받았다. 어느 재소자가 쓴 소감문 중에 <지금의 저는 … “좋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합니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순간 미소를 올렸다. 따옴표 친 “좋은 삶”이라는 말은 내게 보낸 호의였기 때문이다. 강의안에 적지는 않았지만 나는 강의 중에 “착한 삶을 살기는 쉽지만 좋은 삶을 살기는 어렵다”고 했다. 재소자가 <좋은 삶>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친 것은, 그것이 그냥 ‘좋은 삶’이 아니라, 우리가 머리를 맞댄 바로 그 ‘좋은 삶’이라는 걸 의미한다.

법정도, 교정시설도, 인성교육을 담당한 목사도, 아마 착하고 선한 삶에 대해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교정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잣대를 필요로 한다. 비뚤어졌음을 판단하고 바로잡을 기준 말이다. 그런데 인문학, 특히 철학은 이런 일에 적합하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답도 없는 질문을 쏟아내면, 교정의 잣대는 선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잣대가 불분명해지는 순간에 교도소의 담장도 불분명해진다. 2년 전 수유너머의 한 동료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로 교도소 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신앙심 깊던 재소자들이 강력 반발했고 사동에서는 밤늦게까지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누가 옳은지 답은 없다. 법전을 보고 형량을 찾아내는 법관의 심판과 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 비판[판단]은 다른 것이다. 니체는 철학을 기본적으로 어용이라며 조롱했지만 적어도 그의 철학은 법정 자체를 법정에 세우며 사람들을 카오스로 몰아넣었다. 인문학 공부가 우리에게 그런 카오스를 가능케 한다면, 그 공부시간이야말로 재소자들이 일시적으로 가석방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편의상 사용은 하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인간중심주의’도 싫지만, 무엇보다 인문학자들이 말하는 ‘사람다움’이나 ‘인간됨됨이’가 법이나 도덕의 배후 역할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꾸짖는 일이라면 법과 도덕으로 충분한데, 거기에 인문학까지 가세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인문학 교육은 재소자들에게 정신의 형벌을 추가하는 일이다. 나는 인문학이 재소자들에게 정신의 형벌을 보태는 일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그 반대로 부자유한 신체만큼이나 부자유한 정신의 소유자인 우리가 감옥을 벗어나 가석방의 자유를, 아니 아예 석방의 자유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교도소 안 ‘인성교육실’에서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유가 없어도, 생각이 없어도 착하게 살 수는 있다. 규칙과 규율, 통념을 지키며 살면 되기 때문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도무지 기준도 없이, 답도 없이, 자기 삶을 잘 꾸려간다는 것, 그것이 어렵고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

3. 시간의 살인자

작년 봄 수원구치소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좁은 방에 열 명 안팎이 수업에 참석하는데 항상 혼자 앉는,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였다. 의식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눈길은 자주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수료식 때 옆자리에 앉은 그에게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말을 건넸다. “들어오기 전에는 뭐하셨어요?” 이 물음은 재소자들에게 묻지 말라고 당부를 받았던 것 중 하나였는데 입에서 튀어나가는 걸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알고 싶으세요?” 그의 답변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런 것도 용기랍시고 “네!”하고 힘차게 말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해준 말은 ‘아가씨 장사’였다. 그리고 얼마 전 안마시술소 관계자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그때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래서 거기 들어와 있는 거라고 했다. 이제 한 달 후면 나간다는 말과 함께.

분위기를 전환시켜 보려고 물었던 게 강의평가였다. “어떠셨어요? 강의에서 들었던 개념 중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요?” “솔직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약간의 용기 같은 게 생겼어요. 수업은 모르겠고 선생님 공부하며 사는 이야기 할 때 뭔가 느낌을 받았어요. 솔직히 나 이거 시간 죽이려고 신청한 거예요. 한 달 남았는데 시간은 진짜 안 가고. 근데 이제 시간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기 있는 시간도 내 인생이죠.”

최신 물리이론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어떤 학설을 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인문학이 죽은 시간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에피쿠로스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죽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그 말을 그렇게 힘주어 해야 했을 정도로,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삶 곳곳에 침투한다. 슬픔과 두려움, 원한, 냉소 등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국소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우리 삶인데도 우리가 스스로 상처를 입히거나 고문을 가하고 심지어 스스로 삭제하는 경우까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시간을 죽인다. 삶이 끝나는 시간이 정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채웠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언젠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나서도 제자들과 철학적 대화에 골몰하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지난 인생에 대한 회한 때문에 그나마 남은 시간도 죽여 버리지 않는가. 삶으로부터 격리된 시간, 우리는 거기에 최대한 저항해야 한다.

4. 필요한 것은 출구

대학진학율이 80%가 넘는다고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대졸자가 생각보다 귀하다는 걸 알게 된다. 교도소도 그 중 한 곳이다. 올해 2-3월에 진행한 안양교도소 평화인문학 참여자 설문 자료를 보니 2/3 정도가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다.

순전히 주관적인 고찰이긴 하지만, 낮은 학력 탓인지 대학이나 대학원 강의 때와는 다른 형식의 질문을 종종 받는다.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은 대개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이 예전에 읽은 책이나 알고 있는 이론가들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비교형 질문이 많다. 누구의 무슨 개념과 이 개념은 어떻게 다르냐. 누구의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추방과 탈주>(2009)에 수록)에서 나는 이를 ‘앎을 참조하는 앎’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가방 끈이 짧은 사람들은 참조할 책이나 이론가가 없어서인지, 자기 살아온 인생을 참조하면서 앎은 얻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질문 중에 상황 설명이 많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강사님 말하는 게 그런 거냐. 그들 중 일부는 자기 인생 문제에 나를 끼워 넣고 해결해보라는 식으로 묻는 이들도 있다.

내가 사석에서 종종 말하곤 하는 재소자가 한 명 있다. 그는 방화죄로 2년을 살았다. 그날 나는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말했던 것 같다. “우리의 생각 중 상당수는 우리의 생각없음을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죠. 아렌트는 ‘악’이란 ‘악한 생각’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생각없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짧은 휴식 시간에 그가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말이 뭔가 와 닿는데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내 이야기 할 테니 어떻게 하는 게 다르게 생각하는 건지 말해주세요.” 그렇게 해서 꺼낸 이야기는 자신이 어떻게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이었다.

막노동을 하는 50대 남짓 되신 분이었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아버지는 지병으로 누워있고 아내는 가출 상태. 어느 비오는 날 오후 두 아이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학교수업이 없냐는 그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등록금이 너무 밀려 있어 선생님께 혼났다”는 말이었다. 비는 오고, 방구석에는 노인네가 누워있고, 아이들은 집에 돌아왔고… 그렇게 서러웠다고. 그런데 그에게는 받을 돈이 있었다. 공사장에서 일한 돈을 소장이 지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장에 찾아갔더니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소장은 그세 자리를 떠버렸다. 순간 암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내가 그때 다시 생각했어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다시 생각하는 거요?” 사실 나를 압도한 것은 그 물음이 아니라 사연이었다. 물음 자체는 답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 물음을 감싸고 있는 상황은 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때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근처 재소자들이 갑자기 나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사실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반쯤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아마도 내 입에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은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적절한 답을 못하면 ‘역시 배운 것들은 삶을 모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앎은 삶과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앎은 상황에 감싸여 있고, 배움은 거기서 출구를 찾는 문제로 바뀌어 있다.

상황에 압도된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다만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 공부가 짧은 탓이니 저 때문에 공부를 멈추지는 말아주세요.”라고 궁색하게 답했을 뿐이다. 수료식 날 조용히 다시 사과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계속 그걸 다시 생각해 볼 테니.” 우문에 현답이었다. 그는 내게 ‘앎을 참조하는 앎’과는 다른 ‘삶을 참조하는 앎’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5. 초고추장에 대한 갈망

끝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교도소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고 수번을 부른다. 사람을 번호로 부르는,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평화인문학에서는 재소자들에게 이름이든 별명이든 마음대로 정해서 가슴에 달게 한다. 참고로 내게 지난 주 편지를 보낸 이가 있는데 그는 ‘서방’이라고 적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여자 강사가 한 명이라도 오면 ‘서방님’ 소리 한 번 들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고추장’이라고 적는다. 한동안 <연구공간 수유+너머> 추장을 맡았을 때 생겨난 별칭인데, 그 이름을 아직도 너무 사랑해서 직책만 내놓고 이름은 챙겨버렸다. 그런데 재소자들 중에 내 가슴에 적인 ‘고추장’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철학’이라는 딱딱한 과목을 강의하는 사람이 ‘고추장’이라니. 거기에 수유너머 코뮨이야기를 곁들이면, 첫 강의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완전 특효다.

그런데 고추장이라는 이름을 특히 좋아했던 한 분이 떠오른다. 그는 7년을 받았다. 무슨 일 때문에 거기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7년이라는 형량으로 대강 가늠할 뿐이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며 “캄캄하지만 죽을 수도, 여기 주저앉을 수도 없다”고 했다. 내게 보낸 긴 소감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제 삶이 참 요란스러웠습니다. 세상의 힘든 짐은 나만 지고 있는 그런 기분, 정말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처럼 이곳에는 세상과 충돌해서 온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한 사람의 발악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존재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그저 세상일 뿐 바뀌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돈돈돈 하면서 세상을 살아온 이 사람이 정말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한 달에 수백만 원 버는 지체 높은 양반이 놀이 삼아 와서 이야기 하려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월수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사람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갈증! 교도소에서 인문학은 직업교육처럼 어떤 자격증을 주지도, 교도소 내 공장처럼 임금을 주지도 못한다. 주는 거라고는 ‘갈증’ 뿐이다. 주는 것 없이 사람을 충동질한다. 교도소에서 강의를 하며 깨닫게 되는 게 그것이다. 공부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기 이전에 무언가를 먼저 일깨운다는 사실. 공부는 두뇌의 문제이기 전에 정서나 충동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공부란 무엇보다 ‘배움을 배우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고 삶의 연륜이 나보다 높은 분들 앞에서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저 배움을 충동질할 뿐이다. 배우는 법을 배우자고. 나 역시 거기서 그것을 배운다.

“고추장, 정말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 선생님도 선생님 말씀처럼 한계에 도달해서 계속 전진하는, 그래서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는 그런 ‘초고추장’이 되시기를 빌게요.”

내 제자임을 자처했던, 내 선생님이 교도소에서 내 등을 그렇게 툭툭 치시는 것 같다.



* 강의후 재소자들이 보낸 편지
– 고병권(수유너머R)

응답 9개

  1. 여하말하길

    앎을 참조하는 앎으로 기울면서 역사학은 삶을 참조하는 앎에서 멀어진 듯합니다. 물론 삶을 참조하기 위해서는 앎을 참조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삶을 참조하는 앎에서 멀어지며, 그나마 지혜의 끈을 유지하던 인간들 사이의 대칭성이 깨진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동안 내가 쓴 ‘많은’ 논문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나저나 나도 ‘인문학’이란 말을 바꾸었으면 싶던데… 요즘 구로에서 ‘굴드와 도킨스’ 세미나를 하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네요. 계속 생각해보아야겠어요.

  2. 김노자말하길

    현장…내가 기대거나 함께 해야 할 현장은 어디인지 잠시 생각했습니다. 관념의 지대인가,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인가. 삶을 상실한 관념을 앎이라고 착각하는데서 오는 오류가 스스로를 피폐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은 길에서 시작하는 것이겠죠. 잘 읽었습니다.

  3. 이경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4. 김정주말하길

    오랜만에 지면을 통해 고 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항상 바라던 그 인문학의 저변 확대가 재소자들에게까지 갔다니 기쁩니다.
    그런 길을 생각해 내고 열어주고 강의할 수 있게 한 ‘평화인문학’에 박수를 보냅니다.
    제 마음 속에도 ‘재소가’가 늘 있었음을, 이 글을 통해 깨닫습니다.
    고맙습니다.

    • 고추장말하길

      김정주 선생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위클리 수유너머를 통해, 우리들의 인연이 끊기지 않고, 아니, 나중에 그 인연의 힘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5. 박혜숙말하길

    이 글 읽으면서, 이계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신선여고에서의 ‘현장인문학’ 강연이 떠올랐습니다. ‘희망찾기 모임’에서 처음으로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었지요. 그때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 작년에도 계속 책 읽고 토론하는 자리와 저자를 모시고 이야기 듣는 배움의 자리를 만들어나갔습니다. 올해도 계속되고 있구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동료 교사’에서 ‘길 위에서 함께 배우는 벗’이 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간을 죽이며’ 살던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며 ‘시간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시간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살려놓는 것 같습니다. 감각이 살아나는 만큼 현실이 무겁게 와닿습니다. 그 무게감이 아직은 힘겹게만 느껴지지만 어딘가 좁은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찾을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좋은 삶’이 담긴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조르바말하길

      “감각이 살아나는 만큼 현실이 무겁게 와닿습니다.”
      댓글에서 이 말이 왜 이렇게 와닿는지요.ㅠ
      제 경우는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현실에 대한 좌표가 전부 흐트러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무엇도 원래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무엇도 정해진 바가 없음에 불안하고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지지요.

      그래서 뭔가 사소한 것이라도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을때
      그게 남들이 인정하는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긍정하게 되는 듯합니다.

      돈은 벌어주지 못하는, 공부의 힘일까요?ㅋ

    • 고추장말하길

      길 위의 동료들이 정말 많아지네요^^ 제가 만난 상당수 동료들이 또한 박혜숙 샘 덕분에 만난 분들이죠. 선생님의 풍경지기의 책 읽기도 잘 읽고 있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