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광화문광장에서 피켓 한 장 들려합니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광화문광장에서 피켓 한 장 들려합니다.

얼마 전에 끝이 난 연속극 <추노>를 보셨습니까. <추노>에 ‘업복이’라는 노비가 나옵니다. 노비 업복이는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함께하던 동지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홀로 총을 들고 임금이 사는 궁궐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신분으로 차별하는 세상을 향해 총을 쏩니다.

그는 궁궐로 쳐들어가 죽기 전,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궁궐을 바라만 봐도 오줌이 잘금잘금 나오더니
초복이 없으면 못살 것 같다.
나는 개죽음 당하지 않을 거라니…

우리가 있었다고
우리 같은 노비가 있었다고
세상에 꼭 알리고 죽으마.
그렇게만 되면 개죽음은 아니나니
안 그러냐 초복아”

2010년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은 마치 노비의 삶 같습니다. 신분 때문에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다 죽어야가야 했던 노비가 바로 지금 현실에서 장애인 같습니다. 현대판 노비랄까요.

노비는 신분 때문에 천대를 받았습니다. 노비로 태어나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순간 천대받는 존재가 됩니다. 장애인은 장애 때문에 천대받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순간 가장 천대받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노비가 스스로 ‘나는 자랑스러운 노비로 태어났다’고 외치지 않듯이, 장애를 가지는 순간 스스로도, 사회적으로도 부끄럽고 불쌍한 존재로 규정되어버립니다.

노비가 되는 것은 개인적 운명일 수 있으나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장애를 가진다는 것은 어느 시대도 피할 수 없는 개인적 운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 때문에 장애인이 차별받게 됩니다.

노비가 존재하던 시대는 노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2010년 대한민국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장애인에게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비의 시대와 지금이 다른 건 지금은 헌법을 통해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기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의 삶은 비참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중증장애인의 대소변 처리부터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가지고, 수많은 장애인의 삶을 쥐락펴락 하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부담해야 하는 본인부담금을 올리고, 이용 기준을 까다롭게 해 많은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서비스 이용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지하철과 버스를 점거하고 투쟁하였고, 그래서 이동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까지 제정하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이동은 사랑의 이벤트처럼 이뤄집니다. 가족과 친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애여성이 허다합니다. 장애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고, 취직하지 못하고, 평생을 시설과 골방에서 유폐되어 자본주의 세상의 폐기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현대판 노비의 삶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추노>의 업복이는 비록 죽었지만 개죽음 당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드러내며 투쟁했기 때문입니다. 2001년부터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인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하철을 점거하며 투쟁했습니다. 그때부터 중증장애인들은 역사를 기록해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투쟁을 해나갔고, 조금씩 자신의 권리를 확보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큰 절망의 벽 앞에 있습니다. 투쟁으로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모든 권리가 자본과 경쟁과 효율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앞에 꺾이고 기만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끈질긴 힘으로 장애인이라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합니다. 우리에게 총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목소리를 담은 피켓 한 장은 만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시설과 방구석에서 세월을 보내며 한탄하며 개죽음 당하지 않고 장애인을 4대강에 다 빠져 죽이는 이명박 정권을 향해

‘우리가 있었다고
우리 같은 장애인이 있었다고
이명박 정권에,
세상에 꼭 알립시다!’

바라만 봐도 오줌이 잘금잘금 나올지 몰라도, 가려고 해도 경찰이 우리를 막을지 몰라도, 궁궐이 바라보이는, 아니 청와대가 바라보이는 광화문 광장에 피켓 한 장 들고 나갑시다.

– 박경석(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응답 3개

  1. 산빛말하길

    장애인이 현대판 노비라는 말 공감합니다. 좋은 글 가슴에 오래도록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사나운 대지를 달리는 말말하길

    불편함이 뭔지도 모르고 저만 사는 몸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 비포선셋말하길

    노비가 되는 것은 개인적 운명일 수 있으나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라는 말… 가슴에 새깁니다. 추노에 업복이가 멋지다고 들었는데 교장선생님도 너무 멋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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