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창간호] 내가 만약~♬ 늙고 병들면~누가 나를 간병해주지? – <애자>

- 편집자

암에 걸린 엄마와 마지막을 지키는 딸의 이야기를 그린 <애자>는 서사만으로 보면 참 매력이 없는 영화이다. 암에 걸린 환자가 젊은 것도 아니요, 선남선녀의 애틋한 사랑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불치병 신파 치고도 감상 포인트가 없어 보인다고 할까? 어쩌면 상업영화로 개봉관에 걸리는 것은 고사하고, TV 베스트극장용으로도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 같은 밋밋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약체의 서사가 예상외의 흥행뒷심을 발휘하는 상업영화로 거듭난 것은 순전히 캐릭터의 힘이다. 이들 모녀는 TV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오던 모녀가 아니다. 훨씬 거칠고 우악스럽다. 하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다. ‘교양 있는 서울 중산층 출신이 아닌’ 모녀들 중에는 저렇게 우악스러운 드잡이 질로 소통하는 모녀들이 종종 있다. 영화는 이들의 활력 넘치는 관계에 힘입어 관객에게 ‘신선하고 꿋꿋한 신파’로 다가온다.

<애자>는 이들 특이해 보이는 모녀를 통해 모녀관계가 지닌 원초적 의미를 보여주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노년에 엄마가 기댈 곳은 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딸이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고분고분 착한 딸이 아니라할지라도, 엄마와 사이좋게 정답게 지내던 딸래미가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 병든 엄마 입장에서 발 뻗고 누울 자리는 딸의 옆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영화는 강하게 역설한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엄마는 수의사로 일하면서 아들과 딸을 키웠는데, 아들에게는 유학이니 사업자금이니 하여 많은 돈을 들이면서도 딸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대게의 경상도 지역의 관습과 정서가 그러하다.) 딸은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고 말하며 서울에 따로 살면서 엄마를 잘 찾지 않는다. 하지만 위암 수술을 받았던 엄마가 재발하여 병세가 악화되자, 딸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내려간다. 막상 일이 터지자 끝까지 엄마의 곁을 지키며 간병을 하는 사람은 결국 딸이다. 이는 아들이 특별히 불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들은 우리사회 보통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보살핌 노동에 익숙지 않게 키워진데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악전고투 중이다.

지금까지 보살핌 노동은 대게 이러한 아들을 대리한 며느리의 몫으로 부과되어 왔다. 그래서 노후에 간병 등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아들에게 ‘투자’를 하여 경쟁력 있는 생계부양자로 키운 다음, 그 아들을 대리한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성인남성노동의 지위가 확고하지도 않거니와 아들을 ‘대리’한 며느리의 효도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의 힘도 약화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대리(represent)’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요–여기서 새삼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친밀감을 바탕으로 한 행위도 아니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이에 반해 딸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은 훨씬 자연스럽고 친밀감을 나누기에 적합하다.

그러니 이제 순전히 이기적인 차원에서라도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같이 행복한~’ 딸이 있는 사람이라면 딸에게 경제적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말고 후일 부모를 보살필 능력이 있는 독립된 개체로 키워야 하고, ‘쪼끔 불행한~’ 아들만 있는 사람은 아들을 경쟁기계가 아니라 보살핌 노동과 감정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감성과 몸을 지닌 남성존재로 키워야한다. 딸도 없고 아들도 없는 비혼자들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혈연이 아니더라도 친밀감을 나누는 개인들끼리의 보살핌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마련하여야 한다. (실제로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간병 품앗이’ 등이 실험되고 있다.) <애자>는 참 특이한 방식으로 남성중심사회의 맹점을 보여주고 여성주의적 미래비전을 촉구하는 영화이다.

– 황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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