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학부모 예행연습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학부모 예행연습

나는 어린이집을 ‘학교’라고 부르곤 한다. “매이야 학교가자.” “학교에서 재미있었어?” 장차 매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내가 학부모가 되었을 때 생길 문제에 대해 심리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경쟁에서 뒤쳐졌을 때, 선생님에게 문제아로 찍혔을 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을 때, 학교의 교육 방침과 내 생각이 다를 때, 내 생각과 아내의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예행연습을 해보자는 각오였다. 어린이집은 아직 살벌한 성적경쟁과 대중매체에 감염된 또래집단의 집단주의와 관료주의적 행정체계가 없지만, 그래도 미약하나마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 때문이다.

다행인지, 착각인지 매이는 어린이집에서 모범생이다. 놀이 프로그램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또래 친구들(그래봤자 네댓명이지만)에 비해 언어 표현력도 뛰어나다고 칭찬 받는다. 선생님한테 귀여움 받고 친구들한테도 사랑받는다. 매이가 작년까지 닭살스런 애정관계를 과시하던 ‘주완이’ 대신 ‘최문기’와 러브-러브 라인을 맺게 되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주완이가 과도한 애정공세로 매이를 껴안거나 질투로 밀친다며 투덜대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잠자기 전 ‘최문기’와의 선물교환 내역과 주완이의 악행을 한참씩 이야기한다.) 선생님들도 좋고 원장의 운영방침도 합리적이다.

그래도 어린이 집과의 긴장상황이 몇 번 있었다. 제 1라운드는 작년 초. 어린이집에서 특별활동 프로그램에 대한 학부모의 의견을 물어 왔다. 체육, 음악, 레고 같은 것인데(다행히, 영어수업은 없었다) 외부에서 선생님을 불러와서 하는 프로그램이라 추가로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가난해서, 혹은 그런 특별활동 따위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서너 명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아내는 시키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되면 특별활동을 하는 다수 아이들과 안 하는 소수 아이들 사이에 차별이 생기는 게 아닐까? 특별 활동 시간에 안 하는 아이들은 누가 돌보며 그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한 보따리 학부모 의견란에 적어 보냈다.

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안 하는 아이들을 위한 대책이 없으면 곤란하다. 결코 차별은 없어야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학교에 대한 ‘진정’을 예행연습한다는 생각에 사뭇 비장했다. 결과는? 좀 싱겁게 끝났다. 어린이집에서는 특별활동 안 하는 아이들을 돌봐줄 선생님을 이미 배정하고 있었고, 처음엔 반대했던 사람들도 특별활동 수업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보고 혹하는 마음으로 돌아선데다, 두 과목(체육, 음악)으로 한정하는 조건에서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제 2 라운드는 작년 말. 수료앨범 문제를 두고 아내와 갈등이 일었다. 매년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한 해 동안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이랑 수료식 사진을 묶어서 앨범을 제작하는 건데, 가격이 6만원이었다. 별반 수료할 때는 별 생각 없이 신청했다. 그런데 달반 수료할 때는 생각이 많았다. 별반 수료할 때 신청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 있었던 것이다. (윤서네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6만원이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혹시 소외감이라도 느끼면 어쩌나? 그래서 이번엔 아내를 설득해서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달반 수료식에 참석했던 아내 입이 한 뼘이나 나왔다. 다른 애들은 모두 앨범 가지고 있는데 매이만 없었다면서, 얼마나 예쁜데, 특히 매이는 표현력이 좋아서 예쁜 사진들도 많았는데 다 버리게되서 선생님들도 많이 아까와 했다고….괜히 나 때문에 앨범을 못 갖게 되었다며 “자기, 미워!” 소리를 연발했다. 나는 앞으로 기념 앨범 만들 일은 무수히 많을 거다. 봐라, 집에 있는 앨범도 안보고 있지 않느냐, 내년 졸업 앨범때는 꼭 신청하자며 겨우겨우 달랬다.

3 라운드는 지난 설날 때 벌어졌다. 설을 앞두고 매이와 목욕을 하던 아내가 거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선생님한테 선물을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텔레비전에서 남한산 초등학교의 아름다운 교육을 경탄스럽게 쳐다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 무슨 소리냐며, 안 된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비난했다. 그러자 아내가 왜 그렇게 경직된 반응을 보이냐며 반격해왔다. 담임 선생님한테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선생님들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떡이나 과일 같은 걸 하자는 건데, 내가 뭐 뇌물을 주려고 하는 거냐, 과일 몇 개 때문에 선생님들이 매이만 특별히 예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선생님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거라고 했다. (아내는 병원에 근무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환자들이 병동에 보내는 작은 ‘촌지’는 삭막한 노동환경에서 대면노동의 가치를 일깨우고-내가 그저 돈 벌려고 일하는게 아니라, ‘인간’을 돌보고 있었지?-직업적 자긍심을 높이는 작용을 할 뿐, 환자에게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진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묘한 느낌 & 닮은 동물 찾기

생각해 보니 아내 말이 맞았다. 아직 어린이집은 경쟁과 권위가 판치는 곳은 아니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경쟁과 권위의 힘을 억누르고 있다. 평등이 중요하긴 하지만 평등 때문에 공동체적 정서까지 억눌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망각의 주술과 함께 배 한 상자를 선물했다. 어떤 마음의 짐도 남기지 않고 배만 남게. 다행히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선생님의 따스한 눈빛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저 “배 잘 먹었어요” 라는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경쾌한 인사말만 전했을 뿐. 괜히 나 혼자만 생각이 복잡했다.

학교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요즘 나는 그냥 ‘어린이집’이라고 부른다. “매이야 어린이집 가자!”

– 매이 아빠

응답 1개

  1. 달맞이말하길

    읽으면서 우리 아이들 유치원에 보냈을 때를 잠시 떠올려 봤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참으로 야무진 부모로구나, 읽을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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